탐정 유강인 19편_검은 판사, 악의 분노
‘부회장이 바다에 빠졌다면 가능성은 두 가지야. 스스로 바다로 들어가 목숨을 끊었거나 아니면 누군가 바다에 강제로 집어넣은 거야.’
첫 번째 경우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자살이지만, 두 번째 경우는 타살이었다. 타살은 살인이었다. 살인이라면 그 범인을 잡아야 했다.
생각을 정리한 유강인이 최팀장에게 말했다.
“최팀장님, 송부회장이 바다에 빠진 거 같은데 … 수영할 줄 아는지 알아보셨나요?”
최팀장이 고개를 끄떡이고 답했다.
“네. 비서와 가족한테 물어봤습니다. 그들 말에 따르면 수영을 아예 못한답니다. 물에 들어가는 걸 무척 두려워해서 멀리서 보는 것만 좋아했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여기는 수영장이 아닙니다. 파도가 밀려오는 넓은 바다입니다. 물에 들어가는 걸 더 두려워했을 겁니다.”
“그렇군요.”
최팀장의 말에 유강인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다.
물을 무척 두려워하는 자가 스스로 바닷물에 빠져 죽을 거 같지는 않았다.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생을 마감할 수 있었다.
유강인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직 구속 영장이 나오지도 않았어. 신원이 확실하고 그동안 조사에 응해서 영장이 기각될 수도 있었어.
자살은 지나치게 성급한 판단이야. 스스로 죽기에는 다소 이른 감이 있어. 스스로 죽은 게 아니라면 누가 여기에 있었다는 말인데 ….’
유강인이 생각을 마치고 눈을 가늘게 떴다. 뭔가가 의심스러웠다. 무슨 일이 이곳에서 있었던 거 같았다.
그가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지형을 유심히 살폈다. 바닷가가 길게 쭉 이어지다가 이곳에서 굽이쳤다. 도로의 커브길 같았다.
‘모퉁이 돌면 반대편이 전혀 보이지 않아.’
지형을 파악한 유강인이 최팀장에게 말했다.
“최팀장님, 사건 브리핑 부탁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최팀장이 브리핑을 시작했다. 비서들의 목격담을 자세히 설명했다.
유강인이 브리핑을 듣고 다시 생각에 잠겼다.
‘부회장이 비서들과 함께 여기에 온 거군. 머리를 식히고 싶다며 여기로 가자고 비서들에게 말했어. 이곳은 부회장이 즐겨 찾는 곳이라 하니 …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야.’
유강인이 고개를 끄떡였다. 상황에 이상한 점이 전혀 없었다. 그가 생각을 이었다.
‘이곳은 한적한 바닷가야. 머리를 식히기에 적당해. 머리를 식히려고 이곳에 온 건 전혀 이상하지 않아.
바닷가에 도착한 부회장은 모래사장을 거닐었어. 비서들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그 뒤를 따랐고 ….
그러다 부회장이 저기 보이는 모퉁이를 돌았어. 바닷가가 갑자기 굽이쳤어. 그때가 중요한 거 같아.’
유강인이 고개를 끄떡였다. 바닷가 모퉁이를 다시 살폈다.
‘그래! 그때부터 비서들은 부회장을 보지 못했어. 시야에서 부회장이 사라져버렸어.
비서들은 천천히 모래사장을 걸었을 거야. 몇 분 후 모퉁이 돌았을 때 부회장이 없어진 거야.
그 몇 분 사이에 일이 벌어진 게 분명해.’
유강인이 잘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주변을 살폈다. 어젯밤 누군가가 여기에 있었던 거 같았다. 아주 독한 마음을 품고 송상하 부회장을 은밀히 기다린 거 같았다.
그럴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었다.
유강인이 송부회장을 떠올렸다. 그는 무자비한 인물이었다.
후계자 자리를 확고히 하려고 잔혹한 일을 서슴지 않았다.
이복동생인 박재영을 납치해서 살인을 지시했고 병약한 아버지가 빨리 죽기를 바라는 듯 방치했다.
그런 자라면 원망을 사기에 충분했다. 아니 차고 넘쳤다. 동생과 아버지를 죽이려 한 자이니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대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휴우~!”
유강인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미스터김 사건을 해결하고 좀 쉬려고 했는데 쉴 틈이 없었다. 다시 큰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글로벌 기업인 JS 그룹의 부회장이 실종되었다. 납치나 살인이 유력한 상황이었다.
납치라면 돈을 요구하는 연락이 왔어야 했다. 아직 그런 연락은 없었다. 금품을 요구하는 납치보다는 살인의 가능성이 훨씬 컸다.
잠시 풀밭을 살펴보던 유강인이 바다를 살폈다.
바닷가에서 실종된 사람이 육지에서 보이지 않는다면 그 행방은 바다에서 찾아야 했다.
넘실거리는 바닷물 속에 송상하 부회장이 있을 거 같았다.
유강인이 머리를 풀가동했다. 당시 벌어졌던 사건을 한 편의 영화처럼 상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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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싫어하는 부회장이 바닷물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부회장이 방심하고 있을 때
그를 기다리던 누군가가 나타났다. 남자들이었다. 한 명이 아니었다. 그들이 부회장을 꽉 잡고 입을 틀어막더니 물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부회장은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고 결국, 그들과 함께 물속으로 들어갔다.
암살자들은 준비한 작은 배를 타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숨이 끊어진 부회장을 바다에 던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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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이 선명하게 머릿속에 그려졌다.
뒤따라 오던 비서들은 모퉁이 뒤편에 있어서 부회장이 끌려가는 걸 보지 못했다.
한마디로 빈틈없는 범죄 행각이었다.
“그렇군.”
유강인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일렁이는 푸른 바다를 살폈다. 잔잔한 바다였다. 저 멀리 수평선이 아득했다.
유강인이 최팀장에게 말했다.
“최팀장님, 어젯밤 바다가 어땠나요? 파도가 심했나요?”
“아닙니다. 오늘처럼 잔잔했습니다.”
“분명 합니까?”
“네, 그렇습니다. 기상청에 확인했고 이곳 주민들한테 물어봤습니다.”
“그렇군요.”
유강인이 다시 생각에 잠겼다.
‘어젯밤 잔잔한 파도였으니 도망치게 딱 좋았군. 놈들이 배를 타고 도망쳤을 거야.
정황상 부회장을 죽인 거 같아. 납치는 아닌 거 같아. 부회장은 만인한테 지탄받는 인물이야. 그런 인물을 납치해서 얻을 건 없어.
부회장을 죽였다면 살해 동기가 뭐지? 그동안 일에 대한 업보인가? 업보라면 복수? … 음!’
유강인의 두 눈에 힘이 들어갔다. 살인 사건이라는 생각이 확실히 들자, 온몸에 전율이 일고 새파란 긴장감이 감돌았다.
12월 써늘한 하늘 아래에서 탐정 유강인이 수평선을 말없이 바라봤다. 해경 경비정이 저 멀리에 보였다.
정찬우 형사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선배님, 수사 방향을 어떻게 정하실 거죠?”
유강인이 수평선을 바라보며 답했다.
“일단 송상하 부회장부터 찾아야 해. 죽었더라도 그 시신을 반드시 찾아야 해. 그래야 사건을 풀 수 있어.”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납치됐을 수도 있어. 이곳 모래사장을 정밀하게 수색해.
파도가 몰려오는 곳이라 증거를 찾기 힘들겠지만, 최대한의 노력은 해봐야지.”
“알겠습니다. 이곳 모래사장을 정밀 수색하겠습니다.”
“그래, 수고해.”
유강인이 말을 마치고 모래사장을 내려 봤다. 참 깨끗하고 고운 모래였다. 푹신푹신하게 감촉이 좋았다.
30분 후
과학수사대가 바닷가에 도착했다. 요원들이 차에서 내렸다. 사건 현장인 모래사장을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렇게 정밀 수색이 시작됐다.
유강인은 수사본부가 차려진 나진시 동부 경찰서로 향했다. 근처 관광호텔을 숙소를 정하고 휴식을 취했다.
다음날, 2025년 12월 7일 15시 40분
검은 판사가 등장한 후, 또 다른 비극이 시작됐다.
오늘도 어제처럼 화창했다. 찬 바람만 불지 않으면 활동하기에 좋았다.
거리에 사람들이 붐볐다. 휴일인 크리스마스가 점점 다가왔다. 그래서 그런지 신이 난 거 같았다. 크리스마스가 끝나면 연말이었고 2026년 새해가 곧 밝았다.
사람들이 새해를 기대했다. 다사다난했던 2025년을 정리하고 2026년에는 좋은 일만 생기기만을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한편으로는 차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활기찬 연말 분위기 속에서 한 사람이 이를 악물고 서 있었다. 딱 봐도 오랫동안 잠을 못 잔 거 같았다.
지저분한 머리에 수염이 길었다. 흰 턱수염이 바람에 휘날리며 그의 처지를 대변했다.
그는 60대 남자였다. 충혈된 눈에 눈물 자국이 선명했다. 남루한 옷차림에 며칠 동안 씻지도 못한 거 같았다.
“으으으!”
그가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커다란 시위 피켓이 머리 위에 있었다. 피켓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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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영 병원은 내 딸과 손자를 살려내라!
내 딸이 분만 중에 죽었다. 의료사고 책임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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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대형 병원인 우영 병원 앞 인도였다. 행인들이 커다란 피켓을 보고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혀를 차기 시작했다.
“아이고, 의료사고가 있었던 모양이네.”
“그런 모양이네요. 아버지가 울분을 참지 못하고 1인 시위하고 있어요.”
행인들이 딱한 표정을 지으며 딸을 잃은 남자 앞을 지나갔다.
남자가 행인들의 얼굴을 바라봤다. 눈망울이 떨렸다. 마치 도와달라는 거 같았다. 물에 빠져서 익사하기 직전이라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남자에게 말을 걸거나 걸음을 멈추는 행인은 없었다. 이 일은 자기 일이 아니었다.
“흑!”
울분에 휩싸였던 남자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미 수많은 눈물을 흘렸지만, 눈물이 계속해서 터져 나왔다. 붉은 기가 감도는 눈물이었다.
남자가 피눈물을 쏟아내며 말없이 서 있을 때
우영 병원 본관 출입문에서 두 사람이 나왔다. 명품 정장을 입은 남자 둘이었다.
둘 다 40대였다. 급한 일이 있는 듯 걸음을 서둘렀다. 건물 앞 차도를 지나 병원 밖으로 나갔다.
인도 끝에 서더니 앞에 있는 차도를 살폈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거 같았다.
“어! 저, 저놈은”
1인 시위하던 남자가 깜짝 놀랐다. 앞에 서 있는 두 남자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시선이 한 명한테 꽂혔다. 마치 석궁에서 화살이 날아간 거 같았다.
곧 고함이 터져 나왔다.
“야! 이 살인마!”
60대 남자가 피켓을 집어던지고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남자 둘을 향해 달려갔다. 발소리가 인도에 울렸다. 쿵쾅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응?”
“뭐야?”
40대 남자 둘이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둘이 화들짝 놀랐다. 한 남자가 두 눈을 호랑이처럼 부라리고 미친 듯이 달려왔다.
“이놈아!”
60대 남자가 손을 뻗었다. 손가락을 쫙 벌려서 앞에 있는 남자의 멱살을 꽉 잡았다. 넥타이가 흐트러지면서 와이셔츠 단추 하나가 나가떨어졌다.
“다, 당신 누구야? 이거 왜 이래!”
40대 남자가 크게 소리쳤다. 대낮에 봉변을 당하고 말았다. 멱살을 잡은 60대 남자가 40대 남자의 몸을 마구 흔들어댔다. 그리고 있는 힘껏 외쳤다.
“내 딸을 살려내라고! 네놈이 맡았잖아! 손주가 죽었고 딸도 죽었어! 어서 살려내!”
“뭐? … 아!”
40대 남자가 이제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보호자분, 법대로 하세요. 법대로! 이러지 말고.”
다른 40대 남자가 60대 남자의 팔을 꽉 붙잡았다. 그리고 간곡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이러지 마세요. 이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위로금을 조금 더 드릴까요? 삼백을 드리면 되겠습니까?”
“뭐, 위로금이라고? … 삼 백!!”
위로금 300만 원이라는 말에 60대 남자가 기가 찬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