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 유강인 19편_검은 판사, 악의 분노
유강인이 잠시 생각했다. 괴한 중 마스크를 내린 자가 있었다. 목에서 피가 흐르자, 두 손으로 목을 꽉 잡은 자였다. 그자가 이동호인 거 같았다. 그가 말했다.
“괴한 중 마스크를 내리고 목에서 피를 철철 흘린 자가 있었습니다. 그자가 이동호인가요?”
“네, 맞습니다.”
“그럼, 다른 자는 어떤가요? 그자도 아는 자인가요?”
“그자는 … 마스크를 벗지 않아서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목소리도 처음 듣는 목소리였어요. 그리고 저를 모르는 거 같았어요.
그자는 저를 제압했어요. 뒤에서 목을 꽉 졸랐어요. 그자가 한 말이 있습니다. 자신을 검은 판사라고 소개했어요.”
유강인이 그 말을 듣고 급히 말했다.
“자신을 검은 판사로 소개했다고요? 검은 판사가 확실합니까?”
“맞아요. 분명히 자신을 검은 판사라고 말했어요.”
“그렇군요.”
유강인이 검은 판사 네 글자를 뇌리에 새겼다.
정금학이 말을 마치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심호흡했다. 처참했던 일을 계속 떠올리자, 가슴이 쿵쿵 뛰는 거 같았다.
몸에서 경련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녀가 경련을 애써 참으며 말을 이었다.
“그놈은 제 뒤에 있습니다. 이동호는 앞에 있었고요. 둘 다 제가 유령 의사인 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
뒤에 있는 놈이 말했습니다. 수술 중 사람을 죽였다며 사형을 구형하고 선고했어요.
그러자 이동호가 품에서 밧줄을 꺼내더니 제 목에 밧줄로 걸었습니다.”
정금학이 치를 떨기 시작했다. 그녀가 떠올린 건 사형 집행 순간이었다.
그녀는 사형 선고를 받은 죄인이었다. 검은 판사는 사형 집행인이었다.
정금학이 말을 이었다.
“밧줄이 목에 걸리자, 뒤에 있는 놈이 밧줄을 잡더니 제 목을 인정사정없이 졸랐습니다.”
유강인이 그 말을 듣고 침을 꿀컥 삼켰다. 정금학의 증언으로 자경단의 살해 수법을 알 수 있었다. 그가 말했다.
“정금학씨, 그들이 한 말을 다시 말해보세요. 매우 중요한 증언입니다. 놈들을 잡을 실마리가 될 수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정금학이 기억을 더듬자, 유강인이 급히 황수지에게 말했다.
“수지, 녹음기를 켜.”
“네, 알겠습니다. 탐정님.”
황수지가 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녹음 앱을 시작하고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정금학이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녀가 참담했던 순간을 하나둘씩 떠올리고 입을 열었다. 마치 괴한이 그녀의 몸에 들어온 듯했다.
“우리는 … 검은 판사다. 악을 징벌하는 악마다! 검은 법전의 이름으로 너를 처벌하겠다.
너는 유령 의사로 불법 수술했고 수술 중에 사람을 죽였다. 이에 유죄다. 살인죄를 구형하고 선고한다!”
정금학이 블랙맨이 말한 그대로 전했다. 그녀는 비상한 기억력을 가졌다. 그래서 최고의 유령 의사가 될 수 있었다.
“검은 판사!”
유강인이 검은 판사라는 말을 듣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드디어 원한에 사무친 자경단의 이름이 드러났다. 그들은 ‘검은 판사’였다. 심상치 않은 이름이었다.
유강인이 생각했다.
‘그렇군. 놈들은 검은 판사였어. 자경단의 정체가 바로 검은 판사였어.
아주 그럴듯한 이름이군. 악을 처벌하는 판사라 검은 판사군.
그런데 악마라고? 악을 징벌하는 악마라고? 정의의 사도가 아니라 악을 징벌하는 악마라니 …
여타의 자경단과는 너무나도 달라.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지 않다니 ….
자경단한테는 명분이 제일 중요한데 그 명분마저 버리고 있어. 이는 악에 받친 악귀와 같아.’
유강인이 계속 생각을 이었다.
‘검은 판사, 악을 징벌하는 악마! 이게 바로 놈들의 정체야. 사무친 원수를 갚기 위해 악마한테 영혼을 판 거야.
그래서 이들이 면도날 송창수와 손을 잡은 거군. 송창수의 살해 기법을 그대로 전수받았어.
송창수 뒤에는 공범인 선생이 있었어. 선생이 바로 진정한 악마야. 면도날 송창수는 하수인에 불과했어. 검은 판사도 마찬가지일 거야.
선생이 이 모든 걸 조종하는 거야!’
유강인이 사건의 내막을 깨닫기 시작했다.
‘정금학의 말이 사실이라면 … 정금학은 유령 의사지만, 수술에는 참여하지 않았어.
그런데 검은 판사가 나타나 수술 중 사람을 죽였다며 체포했어. 사형을 구형, 선고하더니 집행까지 했어. 완전히 속전속결이야.
경찰처럼 용의자를 잡았고 검사처럼 형벌을 구형했어. 그리고 판사처럼 판결을 내렸고 최종적으로 사형 집행인 역할까지 맡았어.
문제는 정금학이 한종호의 죽음과 관련이 없다는 거야. 정금학이 그때 죽었거나 크게 다쳤다면 이는 무척 억울한 일이야.’
유강인이 이를 악물었다. 검은 판사의 성급한 행동에 분통이 터졌다.
‘검은 판사들이 사무친 원한을 갚겠다고 사람을 막 죽이고 있어. 그런데 그 대상이 잘못됐어.
사건에 단지 관여됐다고 원수처럼 죽이려 했어. 이는 너무나도 지나친 처사야.
한 대 맞을 죄가 있고 100대 맞을 죄가 있어. 한 대 맞을 죄에 100대를 때리는 건 용납할 수 없어. 이건 또 다른 만행이고 횡포야! 폭거야!’
유강인이 끓어오르는 분을 삼켰다. 그리고 정금학을 바라봤다. 정금학이 무척 슬픈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유강인이 정금학의 두 눈을 보면서 생각했다.
‘정금학은 1년 전 한종호씨 죽음에 일정 부분 책임이 있어. 유령 의사로 수술실에 들어가 집도의를 코치했으니까.
… 하지만 그녀는 그게 아주 위험한 수술이라는 걸 몰랐어. 주미희가 추가 수술을 감췄어. 분명 정금학은 죽을죄가 아니야!
검은 판사의 성급한 행동이 또 다른 억울한 사람을 낳고 말았어.’
유강인이 생각을 마치고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검은 판사는 자경단이라기보다는 원한에 사무친 시퍼런 칼날이었다.
그 칼날이 어디로 튈지 알 수 없었다. 그 칼날이 원수를 향하기도 하지만, 엄한 사람을 향해 날아올 수도 있었다.
네 번째 타깃인 정금학, 그녀의 말이 맞는다면 그녀는 살인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녀를 죽이려 했다.
‘검은 판사 … 이들은 무척 위험한 존재야. 반드시 잡아야 해.’
유강인이 각오를 다졌다. 그가 질문을 이었다.
“정금학씨, 목을 보니 밧줄 자국이 선명합니다. 확인 질문을 하겠습니다. 놈들이 밧줄을 목에 감고 졸랐나요?”
“네, 맞아요. 이동호 그놈이 품에서 밧줄을 꺼내서 제 목에 걸었습니다. 그러자 뒤에 있는 놈이 제 목을 꽉 졸랐습니다.
무릎으로 허리를 콱 누르고 졸랐습니다. 몸이 활처럼 휘어졌습니다. 숨이 막혀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습니다. 초인종 소리를 듣고 놈들이 주춤했습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품에서 메스를 꺼냈습니다. 메스로 밧줄을 자르고 이동호의 목을 벤 다음 탈출했습니다.”
“네에? 메스라고요? 메스로 목을 벴다고요?”
유강인이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이동호의 상처는 정금학의 작품이었다.
그의 머릿속에 다른 검은 판사도 떠올랐다. 그자도 등에 메스가 박힌 채 도망쳤다. 정금학이 유강인을 구하려 그자의 등에 메스를 질렀다.
유강인이 급히 생각했다.
‘정금학, 이 사람은 단순한 유령 의사가 아니야. 칼을 능숙하게 다뤄. 마치 킬러처럼.’
유강인의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유령 의사 집단이 심상치 않았다. 그가 정금학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얼굴에 차분함과 함께 냉정함이 흘러내렸다. 유령 의사는 메스와 친할 수밖에 없었다.
그 메스가 환자가 아니라 다른 곳으로 향하면 아주 위험할 수 있었다. 그들은 칼을 잘 다루었고 사람의 급소를 잘 알았다. 면허 없이 어둠 속에서 활동하는 자들이었다.
유강인이 긴장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긴장감을 내색할 수는 없었다. 그가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군요. 메스가 품에 있어서 다행히 밧줄을 끊었군요. 그런데 메스가 왜 품에 있었죠? 호신용으로 갖고 다녔나요?”
“그건 아닙니다, 탐정님이 떠난 다음, 아무리 생각해도 꺼림칙해서 화장대로 가서 메스 하나를 꺼냈습니다. 혹시 모를 일이 생기면 호신용으로 사용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 거군요.”
“그런데 탐정님 말씀대로 놈들이 정말 나타났습니다. 갑자기 나타나서 메스를 꺼내 싸울 틈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숨 막혀 죽을 뻔했습니다. 숨이 넘어갈 때 탐정님이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그 소리에 놈들이 주춤했습니다. 메스를 잡을 기회가 생겨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일이 그렇게 돌아가는군요. 메스로 이동호의 목을 베고 탈출했군요.”
“그렇죠. 그리고 탐정님한테 칼을 빼 들고 덤빈 놈도 메스로 질렀습니다.
그놈 등판에 상처가 있을 겁니다. 우측 어깨뼈 아래를 찔렀습니다. 어깨뼈 끝, 뾰족한 부분 아래라 생각하면 됩니다. 그 상처는 없어지지 않을 겁니다.”
유강인이 잘 알겠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 정금학씨, 목덜미에 생긴 매듭 흔적을 확인하겠습니다. 괜찮으시죠?”
“괜찮습니다.”
유강인이 황수지에게 말했다.
“수지, 정금학씨 뒷머리를 들어 올리고 매듭 자국이 있나 확인해 봐. 정형사도 같이 봐.”
“네, 알겠습니다.”
황수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정금학 뒤로 가서 뒷머리를 들어 올렸다.
목덜미에 동그란 매듭 자국 두 개가 있었다. 그걸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정찬우 형사도 맞는다는 듯 고개를 끄떡였다.
황수지가 유강인에게 말했다.
“다른 피해자들처럼 목덜미에 동그란 매듭 자국 두 개가 있어요.”
“수고했어.”
유강인이 잘 됐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금학을 죽이러 온 검은 판사는 송상하 부회장, 최인식 교수, 주미희 영업 사원을 죽인 자경단이 맞았다.
유강인이 정금학에게 말했다.
“검은 판사가 또 한 말이 있나요?”
정금학이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이동호 그자가 절 10년 동안 찾았다고 했어요. 제가 붉은 원의 일원이 되는 바람에 못 찾았다고, 등잔 밑이 어둡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가증스럽게도 저를 여전히 사랑한다고 말했어요.
그런데 그자의 모습은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어요. 예전에는 잘생긴 미남이었어요. 오늘 본 모습은 아주 끔찍했어요. 한쪽 얼굴에 화상을 입어서 왼쪽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어요.”
“네? 화상이라고요?”
“네, 이동호가 어머니를 죽이고 저도 죽이려 했을 때 불이 났어요. 다락방 커피숍이었어요.”
그 말을 듣고 유강인이 두 눈을 크게 떴다. 다락방 커피숍이라는 이름을 어디선가 들은 거 같았다.
정금학이 말을 이었다.
“10년 전, 경기도 동인시 다락방 커피숍에 갔어요. 이동호랑 같이 백미 노인을 만나러 갔어요.
백미 노인은 이름 그대로 눈썹이 새하얬어요. 백미 노인은 유령 의사였던 어머니의 스승이었어요. 제가 위험하다며 다락방 커피숍으로 이동호랑 같이 오라고 했어요.”
유강인이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머릿속에 한 사건이 떠올랐다.
그건 경기도 동인시 다락방 커피숍 화재 사건이었다.
그가 급히 말했다.
“지금 뭐라고 하셨죠? 경기도 동인시 다락방 커피숍이라고요? 거기에서 불이 났다고요?”
“네, 맞아요. 이동호랑 같이 다락방 커피숍에 갔어요. 거기에서 백미 노인을 만났어요.
백미 노인이 말했어요. 살모사의 새끼인 이동호가 어머니를 죽이고 저도 죽일 거라고 했어요. 그러자 이동호, 그자가 화장실에 간다며 밖으로 나갔어요.
이후 불을 질렀어요. 연기에 질식되고 불타 죽을 위기였어요. 출구를 이동호 패거리가 막았어요.
그렇게 꼼짝없이 죽을 위기에 백미 노인이 메스를 뽑아 들었어요. 혼자의 몸이었지만. 이동호 패거리를 물리쳤어요. 그렇게 같이 커피숍에서 탈출했어요.”
“헉!”
유강인이 소스라치게 놀란 나머지 크게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정금학이 말한 사건은 그도 아는 사건이었다.
10년 전 서울청 광역범죄수사대는 두더지를 잡으러 경기도 동인시에 갔었다.
두더지를 잡고 서울청으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 인근에 있는 한 커피숍에서 불이 났다.
그 커피숍의 이름이 바로 ‘다락방 커피숍’이었다. 커피숍 화재 현장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주인장이 말한 게 있었다.
젊은 여자와 눈썹이 하얀 노인이 같이 탈출했다고 말했다. 그 노인은 칼을 잘 휘둘렀다고 전했다.
하얀 눈썹이 바로 백미였다. 그자가 바로 백미 노인이었다.
10년 전 사건이 현재의 사건과 연결됐다. 유강인과 정금학은 10년 전 다락방 커피숍 화재 현장에 있었다.
하나가 분명해졌다. 10년 전 다락방 커피숍 화재 사건과 현재의 검은 판사 사건은 아주 긴밀히 연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