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 유강인 19편_검은 판사, 악의 분노
유강인이 드디어 10년 전 사건의 진상을 깨달았다.
그가 달려갔던 화재 현장에서 도망친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가 바로 앞에 있었다.
유강인이 생각했다.
‘정금학의 말에 따르면 … 어머니는 유령 의사야. 백미 노인은 어머니의 스승이고.
살모사 새끼인 이동호가 어머니를 죽이고 정금학마저 죽이려 했다는 거야. 그렇다면 살모사! 살모사가 중요한 거 같아.’
생각을 마친 유강인이 정금학에게 말했다.
“정금학씨, 살모사가 대체 뭡니까?”
살모사라는 말을 듣자, 정금학이 크게 숨을 내쉬었다. 10년간 당했던 참담한 기억을 떠올리고 눈을 꼭 감았다. 그렇게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말했다.
“살모사가 뭔지 알려면 먼저 붉은 원을 알아야 해요.”
“붉은 원이라고요? … 붉은 원이 대체 뭐죠?”
“붉은 원은 어머니와 저의 스승님이신, 백미 노인이 만든 유령 의사 단체입니다.
스승님은 미국에서 성형 수술을 배우셨어요. 유령 의사들이 선생님이었습니다.
스승님은 그 실력이 탁월해서 미국에서 인기가 좋았다고 들었습니다. 유명 배우들이 스승님 수술에 만족했답니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유령 의사 단체를 창립하셨습니다. 그게 바로 붉은 원입니다.”
“미국에 그런 게 있었다고요?”
“네, 미국은 우리와 달리 오래전부터 성형 수술이 성행했답니다. 그래서 유령 의사들이 존재했다고 들었어요.
스승님은 그들한테 성형 수술을 배우고 솜씨가 좋아서 유명세를 떨치셨어요.
그러다 향수병을 이기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유령 의사 단체인 붉은 원을 창립하셨어요. 그렇게 유령 의사들을 양성했어요.
어머니도 스승님의 제자였어요. 제자 중에서 최고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별명이 황금새였어요. 황금을 벌어주는 새였죠.”
“그렇군요.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그런데 제자 중에서 어머니를 시기하는 자가 있었어요. 어머니한테 수제자 자리를 빼앗긴 자였죠. 그자의 별명이 살모사였습니다. 어미를 잡아먹는 뱀처럼 스승님을 배신했어요.”
유강인이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정금학씨, 그건 아닙니다. 살모사는 실제로는 어미를 죽이지 않아요. 어미가 알을 낳고 지쳐서 그렇게 보이는 거뿐입니다. 와전된 말입니다.”
“아, 그런 거예요. 그러면 살모사는 실제 살모사와 비교할 수 없는 놈이네요. 스승님을 철저히 배신하고 살인마가 됐으니 ….”
“정금학씨, 붉은 원이 뭔지 정확히 말해주세요.”
“붉은 원은 정당한 대가를 받고 최고의 성형 수술 서비스를 제공하는 단체입니다.
물론 불법이지만, 수요가 많았어요. 젊고 아름다워지고 싶은 건 인간의 절절한 욕망이라 이걸 막을 수가 없잖아요.”
“그렇죠.”
“그렇게 붉은 원은 창립 취지대로 성형 수술만 했어요. 그런데 살모사가 창립 취지를 어기고 수술실에서 사람을 죽이기 시작했어요.
거액을 받고 수술대에 누운 마취 환자를 죽였어요. 전신 마취된 상태니 그게 얼마나 쉬웠겠어요.
그렇게 살인에 맛 들이더니 살인 청부를 마구 받았습니다. 수술실뿐만 아니라 메스를 들고 암살도 시작했어요.”
암살이라는 말에 유강인이 두 눈이 커졌다. 현재 상어라 불리는 암살 집단이 있었다. 상어는 현재 추적 중이었다. 그 추적에 살모사를 추가해야 했다.
새로운 암살 집단이 등장하자, 유강인이 긴장감을 느꼈다. 그가 말했다.
“결국, 붉은 원 중 일부가 암살 집단으로 변모했군요.”
정금학이 고개를 끄떡이고 말을 이었다.
“그렇죠. 스승님이 이를 알고 살모사를 막으려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살모사는 살인으로 번 막대한 돈으로 세력을 키웠어요.
강한 세력으로 스승님을 핍박하고 붉은 원에서 쫓아냈어요. 그렇게 스승님은 자신이 세운 붉은 원에서 쫓겨났고 살모사 일당은 붉은 원을 장악했습니다.”
“어이가 없는 일이군요. 자기가 세운 단체에서 창립자가 쫓겨나더니. … 살모사는 조직 폭력배와 다름없습니다. 의리가 아닌 이득과 권력에 미쳤습니다.”
유강인이 말을 마치고 암살 집단 살모사를 떠올렸다. 범인을 알 수 없거나 자살로 위장한 사건 중에 살모사가 저지른 일이 있을 것만 같았다.
정금학이 말했다.
“이후 살모사는 어머니를 노렸습니다. 살모사는 최고의 기술과 미적 감각을 가진 어머니를 예전부터 시기 질투했어요.
노하우와 기술을 넘기면 거액을 주겠다고 어머니를 꼬드겼어요. 어머니는 저를 위해 은퇴하기로 마음먹고 살모사의 제안을 받아들였어요.
어머니가 약속한 대로 노하우와 기술을 넘기자, 살모사가 곧바로 마수를 드러냈어요.
교통사고를 가장해 어머니를 죽였어요. 그 일을 제 애인이었던 이동호가 맡았습니다.”
“그러면 이동호는 처음부터 목적을 갖고 정금학씨한테 접근한 거군요.”
“그렇죠. 저는 그것도 모르고 이동호를 사랑했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이동호는 잔혹한 살모사의 새끼였어요. 어머니를 죽이고 저까지 죽이려 했어요.”
“정금학씨, 살모사가 누구인지 아시나요?”
“그건, 스승님이 말해주지 않아서 모릅니다. 살모사와 싸우지 말라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싸울 힘이 없다고 기다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렇군요. 스승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군요.”
“네, 그렇습니다. 백미 노인은 어머니의 스승님이자 제 스승님이기도 합니다.
어머니가 죽자, 저를 가엽게 여겨 저한테 연락하셨습니다. 다락방 커피숍으로 한시라도 빨리 오라고 전했습니다.
그곳에서 살모사 새끼인 이동호와 목숨을 걸고 싸워서 저를 지켰습니다.
이후 저도 어머니처럼 붉은 원에 가입해 유령 의사가 됐습니다.”
“왜 유령 의사가 됐죠? 다른 일을 할 수도 있는데?”
“살모사가 계속 저를 쫓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들의 눈을 피해야 했습니다.
스승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등잔 밑이 가장 어둡다고, 그들이 장악한 붉은 원에 들어가 방심을 노렸습니다. 그래서 10년 동안 무탈했어요.
그러다 정체를 들키고 말았습니다. 미희 언니 때문에 이동호가 저를 알게 된 거 같아요.”
“혹 신분을 세탁했나요?”
“네, 그래요. 저의 본명은 윤이슬입니다. 스승님 도움으로 윤이슬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정씨 집안에 친양자로 입양해 정씨가 됐습니다. 이름도 바꾸고 신분도 바꿨어요.
금학이라는 이름은 원래 스승님이 지어준 별명이에요. 그 이름을 새로운 이름에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그렇군요. 10년 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군요. 정금학씨는 모진 역경을 견디고 지금까지 버티신 거네요.”
유강인이 무척 대단하다는 표정으로 정금학을 바라봤다. 조수 둘과 정찬우 형사도 마찬가지였다.
정금학은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였지만, 누구보다도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왔다.
정금학이 고개를 숙였다. 10년 동안의 고생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억울함과 고통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항상 힘든 건 아니었다. 성형 수술을 배우며 보람도 느꼈다. 그녀는 어머니처럼 수술에 타고난 천재였다. 다양한 수술을 배우며 그 재미를 느꼈다.
정금학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말했다.
“이동호가 마지막으로 말한 게 있어요. 그것도 기억이 나요.”
“아, 그래요. 어서 말하세요.”
정금학이 이동호의 말을 떠올리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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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전생에 죽도록 사랑했나 봐. 그러니 금생(今生, 현생)에 이런 모습이지. 우리는 아주 깊은 인연이야.
내생(來生)에는 어떨까? 다시 죽도록 사랑한다는데 과연 그럴까? 금학아, 내생에 다시 보자. 다시 사랑하자.
너는 내 애인이었으니 … 자비를 베풀어 때리지는 않을게. 대신 목이 졸려 죽어야 해. 그게 우리 법칙이야.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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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강인이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전생(前生)과 금생(今生)이 그의 귓가에 울렸다.
전생과 금생을 말한 자가 하나 더 있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면도날 살인마 송창수였다.
송창수는 중증 환자였다. 병색이 심해 조만간에 죽을 운명이었다. 그자가 유강인이 떠나기 전, 마음의 동요를 이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건 힌트였다.
냉혹한 철면피 살인마의 말이지만, 곧 죽을 사람이라 진실일 가능성이 컸다.
유강인이 송창수의 말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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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강인, 너는 전생에 극악한 살인마였을 거야. 그래서 현생에 탐정이 된 거야. 그 업을 씻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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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강인이 급히 생각했다.
‘이동호가 말한 금생은 현생을 말하는 거야. 그렇다면 전생과 현생이라는 말을 둘 다 한 거야.
한 명은 면도날 송창수고 다른 한 명은 이동호야. 송창수는 검은 판사와 깊은 관련이 있어. 검은 판사들이 그의 살해 수법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어. 이동호는 검은 판사의 일원이야.
이게 우연한 일치일까? 우연한 일치일 수도 있지만, 만약 아니라면 이게 뭘 뜻하는 거지?
전생과 현생이라는 말이 왜 반복되지?
예전 드라마에 삼생(三生)이 있었어. 전생(前生), 현생(現生), 내생(來生)을 합쳐 삼생이라고 했어.’
유강인 고개를 갸우뚱했다. 삼생이 이상하게 반복됐다.
원한을 갚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자경단, 검은 판사와 불교 용어인 삼생은 어울리는 말이 아니었다.
유강인이 갑자기 고심하자, 황수지가 녹음 앱을 끄고 유강인에게 말했다.
“탐정님, 왜 그러세요?”
유강인이 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뭔가가 좀 마음에 걸려.”
“그게 뭐죠?”
“전생, 현생이 공교롭게 겹치고 있어. 면도날 송창수가 먼저 전생과 현생을 언급했어. 그런데 자경단 이동호도 전생과 현생을 언급했어. 둘이 같은 말을 했어.”
그 말을 듣고 조수 둘과 정찬우 형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황정수가 말했다.
“그러네요, 참 이상하네요.”
그가 말을 이었다.
“우연한 일치 아닐까요? 그런 말은 일상에서도 많이 하잖아요. 부부는 전생에 원수였다고 들었어요.”
유강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연한 일치라 하기에는 둘 다 아주 중요한 순간에 그 말을 했어.
송창수는 생명이 위태로운 순간에 그 말을 했어. 이동호는 10년 전 애인을 죽이려는 순간에 그 말을 했어.
그런 순간에 허튼소리를 할 리가 없어.”
“그렇기는 하네요. 그렇다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이잖아요.”
“그렇지. 둘의 말 속에 분명 그 뜻이 있어. 둘 다 그냥 지껄인 말이 아니야.”
“듣고 보니 그러네요. 전생과 현생에 무슨 뜻이 있을까요?”
“글쎄.”
유강인이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정금학씨 더 하실 말씀이 있나요?”
정금학이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얼굴에 절절한 슬픔이 묻어 있었다.
“어머니가 남긴 말이 있어요. 그 말을 들어주고 어머니를 죽인 범인을 잡아주세요.”
유강인이 고개를 끄떡이고 말했다.
“네, 말씀하세요.”
정금학이 입을 열었다. 어머니가 죽기 전날 그녀가 사랑하는 딸에게 남긴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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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 이슬아.
엄마에겐 꿈이 있어.
그 꿈은 별거 아니야.
내 딸과 함께 조용한 곳에서 편안히 사는 거야.
엄마는 그동안 힘들게 살아왔어.
말은 안 했지만, 정말 힘들었어.
이제 그 종착점에 달했어.
그 끝에 달하자, 새로운 희망이 생겼어.
엄마는 우리 딸과 함께 새로운 꿈을 꿀 거야.
새로운 곳에서 내가 진정 원하는 일을 할 거야
딸아, 엄마를 응원해줘.
엄마도 딸의 꿈을 항상 응원할 테니.
명심해! 엄마는 항상 네 편이야.
우리 같이 손을 잡고 걸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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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금학이 말을 마치고 울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어머니 황금새가 죽기 전 그녀에게 남긴 말이었다.
가슴 찡한 말이었다. 황금새는 모든 걸 정리하고 딸과 함께 새로운 출발을 다짐했다. 하지만 그 꿈은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힌 살모사 때문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유강인이 그 말을 듣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딸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절절함이 느껴졌다. 황금새는 불법 유령 의사였지만, 딸에 대한 사랑만큼은 진심이었고 거짓이 아니었다. 분신인 딸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다른 어머니와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