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 유강인 01편 <행운 빌라 살인 사건>
“차선배님! 각서를 보여주세요. 빨리!”
유강인이 급히 외쳤다. 차형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답했다.
“갑자기 왜 그래?”
“선배님, 황보술이 쓴 각서를 당장 봐야 합니다! 급합니다. 빨리 주세요. 빨리 확인해야 합니다.”
“왜 이리 서둘러? 그건 다 본 거잖아. 알았어. 금방 갖고 올게.”
차수호 형사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유형사? 갑자기 무슨 일이야?”
이호식 형사가 유강인에게 물었다.
유강인이 말없이 서 있었다.
1분 후, 차수호 형사가 각서를 들고 왔다. 각서를 유강인에게 건넸다.
유강인이 각서를 꼼꼼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글자 하나하나를 살펴보다가 종이를 뒤집고 손가락으로 표면을 쓱쓱 문질렀다.
“예상대로군.”
유강인이 말을 마치고 생각에 잠겼다. 선배들이 유강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잠시 후, 유강인이 이호식 형사에게 말했다.
“이선배님! 각서를 유심히 살펴보세요.”
각서를 받은 이호식 형사가 종이를 자세히 살폈다.
“선배님, 각서가 원본이 맞습니까?”
“뭐, 뭐라고?”
“원본이 맞느냐고요?”
“원본이냐고?”
이호식 형사가 급히 각서를 이리저리 살폈다. 그도 유강인처럼 종이 뒷면을 유심히 보다가 표면을 문질렀다.
“원본이 맞는 거 같은데, 뒷면을 보니 볼펜에 눌린 자국이 있어.”
“선배님, 원본이라고 확신할 수 있나요?”
“그건, 정밀 감정에 들어가 봐야지. 내 경험으로는 원본이 확실해.”
“알겠습니다. 저도 이 각서가 원본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래야지 의문점이 풀립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차수호 형사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유강인이 입을 열었다.
“각서를 확보하고 사무실로 돌아오면서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황보술이 10년 동안 가만히 있다가 지금에 와서 강선애에게 책을 뺏으려고 한 게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건 분명 무리수였습니다. 그러다 조사실에 있는 정일권을 보고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뭔가가 있다고 ….”
“지금이라도 강선애에게 책이 있다는 거를 알아서 그런 게 아닐까?”
차수호 형사가 말했다.
유강인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10년 전 사건은 이 각서와 돈, 책을 뺏기 위해 벌어진 일입니다. 그때, 강도처럼 집안을 뒤진 흔적이 있었습니다. 그 흔적은 이 세 개를 확보하려는 시도였습니다.”
“그러면 그때 책과 각서를 확보하지 못한 게 아닐까? 돈은 현장에 없었으니, 돈만 갖고 나간 게 아닐까?”
유강인이 고개를 가로젓고 말을 이었다.
“범인의 일차 목표는 바로 이 각서입니다. 이 각서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데 각서를 확보하지 못하고 그냥 나갔다고요? 이 각서가 강선애 방에 있었는데 ….”
“그렇긴 하군. 각서가 책에 껴있었고 그 책은 강선애 방에 있었어. 강선애 방을 뒤지면 확보할 수 있었어.”
“맞습니다. 그런데 범인은 안방만 뒤지고 강선애 방은 근처도 안 가고 나갔습니다. 이게 무얼 의미하는 걸까요?”
유강인의 말에 두 형사가 머리에 망치를 맞은 듯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다 차수호 형사가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생각해보니 그렇네? 안방에 각서가 없었다면 강선애 방도 뒤졌어야 했는데 그냥 나가버렸어. 정말 이상하긴 하네.”
그때 이호식 형사가 손바닥으로 무릎을 ‘탁’ 쳤다. 그가 급히 말했다.
“그때 각서를 확보하지 못했다면 또 무슨 짓을 저질러야 했어. 그동안 아무 일도 없었어! 그러면 … 놈들이 목적을 달성하고 나갔다는 거야.”
유강인이 고개를 끄떡이고 말했다.
“맞습니다. 놈들은 목적을 달성했습니다. 각서, 책, 돈을 모두 들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차수호 형사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지금 각서하고 책이 우리 손에 있잫아. 그러면 각서가 한 개가 아니라 두 개라는 말이야?”
유강인이 크게 웃었다. 그가 말했다.
“하하하! 차형사님, 정곡을 찌르셨네요. 각서와 책이 두 개였습니다. 돈은 하나였지만.”
“뭐, 뭐라고?”
두 형사가 그 말을 듣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유강인이 계속 말을 이었다.
“강후식은 황보술에게 책 한 권과 각서 한 장을 받았습니다. 이건 분명합니다. 각서를 책에 껴서 딸에게 줬습니다. 각서를 확인한 결과 원본이 맞습니다. 그러면 한 가지 경우만 남습니다. 책과 각서를 복사해서 자기가 갖고 있었던 겁니다.”
“복사본이라고?”
이호식 형사가 크게 소리쳤다. 차수호 형사는 놀란 나머지 입만 벌리고 있었다.
유강인이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범인이 착각한 겁니다. 복사본을 진본으로 오해하고 복사본을 챙긴 겁니다. 이후 각본대로 연극 했습니다. 마치 괴한이 침입해서 강후식 일가를 처참하게 죽인 거처럼 쇼했습니다. 공범들은 목격자인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렇게 범죄를 완성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엉터리였습니다. 진본이 아니라 복사본을 갖고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안방에 책과 복사본이 있었다는 거네. 복사본이 진짜 증거네.”
“맞습니다. 복사본이 안방에 있었습니다. 복사본이 진짜 증거입니다. 우리가 확보한 원본은 범행 동기를 알려 줄 뿐입니다. 진짜 증거는 살해 현장에 있던 복사본입니다.”
“유형사, 복사본을 여태까지 남겨둘 리가 없잖아! 다 태워버렸겠지. 이런!”
“아! 그러네요. 선배님 말대로 다 태워버렸겠죠. 그러면 … 아무 소용이 없네요.”
차수호 형사가 선배의 말에 실망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유강인이 힘을 내어 말했다.
“물론, 선배님 말대로 증거를 없애버렸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가지 희망이 있습니다.”
“희망이라고? 무슨 뭐지?”
차수호 형사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유강인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건 현장에 황보술이 없었습니다. 그게 가장 중요합니다.”
“뭐라고? 어째서 그렇지?”
이호식 형사가 무척 궁금한 얼굴로 유강인에게 물었다.
유강인이 답했다.
“놈들은 확보한 각서와 책을 처리해야 했습니다.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불태우는 겁니다. 두 번째는 황보술에게 전달하는 겁니다. 두 번째 방법은 아닌 거 같습니다.”
“왜 그렇지?”
“황보술에게 증거를 전달했다면 그자가 금방 알아챘을 겁니다. 각서와 책이 복사본이라는 것을! 책을 복사해서 제본하면 그 티가 확실히 납니다. 원본과 분명히 차이가 있어요.”
“그렇지. 복사하면 당연히 원본과 다르지. 그러면 놈들이 증거를 태웠다는 건데.”
유강인이 고개를 끄떡이고 말했다.
“맞습니다. 놈들은 책과 각서를 몰래 갖고 있다가 출동한 경찰이 떠나자, 책을 불태웠을 겁니다. 그전에는 증거를 인멸할 시간이 부족했을 겁니다. 주변의 이목을 의식했을 겁니다.”
“뭐? 그러면 다 소용없는 일이잖아. 증거를 태웠다면 지금 없다는 말이야. 잿더미가 됐어. 이런!”
차수호 형사가 그만 낙담하고 말았다.
유강인이 급히 말했다.
“아닙니다. 현장에 황보술이 없었기 때문에, 한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게 뭔데? 빨리 말해 봐?”
차수호 형사가 조바심을 참지 못했다. 이호식 형사는 손에 땀을 흘렸다. 유강인의 입술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유강인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책이 아직 남아있을 수 있습니다.”
“뭐라고?”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두 형사가 놀란 표정으로 유강인을 쳐다봤다. 그들이 다음 말을 듣고 싶은지 침을 꿀컥 삼켰다.
유강인이 싱긋 웃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사이비 종교에 빠진 사람들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갈망입니다. 이는 갈증과 같습니다. 현실에서 간절히 원하는 거를 얻지 못하자, 이에 대한 반발로 망상에 빠지는 겁니다. 망상 속에서 꿈을 이루었다고 착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타오르는 목마름을 갖고 있습니다.”
“타오르는 목마름이라고?”
“네, 그 목마름 때문에 황보술 몰래 책을 빼돌릴 수 있습니다. 황보술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각서는 부하들에게 소용없습니다. 하지만 교단의 성서인 궁극지상 12계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을 통달하며 … 뭐라 그랬더라? 진실의 눈을 뜬다고 했습니다.”
“진실의 눈을 뜬다고?”
“네, 제가 볼 때 신도들은 황보술을 초능력자로 보는 거 같습니다. 무슨 신통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합니다. 다사랑 한마음 교회에 갔을 때, 성주가 암을 고쳤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강선애는 성주가 무지개를 만들었다는 소리도 했습니다.”
“뭐? 암을 고치고 무지개를 만들었다고?”
“네, 허무맹랑한 소리지만 신도들은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강후식이 돈뿐만 아니라 책도 요구한 거 같습니다. 자신도 그런 신통력을 얻고 싶어서 ….”
차수호 형사가 급히 말했다.
“만약 책이나 각서가 아직도 남아있다면 놈들을 압수 수색하면 되지 않을까요?”
이호식 형사가 고개를 끄떡이고 답했다.
“그렇지, 지금이라도 집이나 사무실을 뒤지면 뭔가가 나올 수 있어.”
“아닙니다. 압수 수색하면 안 됩니다.”
유강인이 선배들의 말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선배들이 어리둥절했다. 이호식 형사가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야?”
유강인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말없이 고개 숙여 생각했다.
잠시 후 유강인이 입을 열었다.
“놈들이 제 발로 증거를 들고나오게 해야 합니다. 현재 누가 증거를 가졌는지 알 수 없습니다. 섣불리 압수 수색을 했다가, 헛다리를 짚게 되면 큰일입니다. 증거를 가진 자가 쥐도 새도 모르게 증거를 인멸할 겁니다. 그러면 마지막 희망도 물거품이 됩니다. 사건 현장에 있었던 복사본을 확보해야 합니다. 그게 가장 중요한 물증입니다.”
“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러면 어떻게 증거를 확보하지? 방법은 있어?”
“오늘 밤이 중요합니다. 독고승과 김만호가 잡혀있고 오늘 오후에 정일권도 잡혔습니다. 분명 놈들이 오늘 밤 대책 회의를 할 겁니다.”
“대책 회의라고?”
“어디에서 하는데?”
유강인이 시계를 슬쩍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입을 열었다.
“대책 회의는 아지트에서 하겠죠.”
“아지트라고?”
“거기가 어딘데?”
유강인이 잠시 뜸을 들였다. 빙긋 웃고 입을 열었다.
“평화 부동산! 성동연합모임 신도 하연수가 운영하는 곳입니다. 행운 빌라 바로 맞은 편에 있습니다.”
차수호 형사가 급히 말했다.
“하연수! 그 사람은 강선애 건물주인데.”
이호식 형사도 급히 말했다.
“유형사! 그걸 어떻게 알아냈지? 아지트를 어떻게 알아냈어?”
“저에게 정보원이 있습니다. 행운 빌라 마을 사람들을 아주 잘 아는 청년이죠.”
“뭐? 정, 정보원이라고?”
선배들이 깜짝 놀랐다. 강력반에 갓 들어온 신입이 정보원을 확보했다. 이렇게 치밀하게 사건을 파헤칠 줄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유강인이 핸드폰을 들었다. 어딘가로 전화 걸었다.
삐리릭!
“네, 여보세요.”
“황정수씨, 서울지방경찰청 강력반 형사 유강인입니다.”
“아! 형사님이시네! 아이고 이렇게 전화도 다 하시고.”
“다름이 아니라 부탁할 게 있어서요. 지금 행운 빌라 쪽으로 갈 수 있나요?”
“네? 지금이요. 일하고 있는데.”
“아주 급한 일입니다. 잘하면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를 잡을 수 있어요.”
“아! 그래요. 지금 손님이 없어서 한가하긴 해요. 아주 오래 걸리는 일은 아니죠?”
“아마 한 시간이나 두 시간 정도면 끝날 거 같습니다.”
“다행히 손님이 별로 없을 때네요. 그럼 제가 주인아저씨게 한 번 물어볼게요.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반드시 참여하고 싶어요. 혹 위험한 일은 아니죠?”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많은 경찰과 함께 움직이는 일입니다. 황정수씨 안전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그럼, 제가 주인아저씨께 말해보고 좀 있다 전화할게요.”
유강인이 전화를 끊었다. 차수호 형사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전화 받은 사람이 정보원이야?”
“네, 맞습니다. 그건 그렇고 … 선배님, 지금 행운 빌라로 같이 가죠. 가서 결정적인 물증을 잡아야 합니다.”
“그래, 알았어. 바로 출동 준비할게.”
차수호 형사가 급히 답하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급히 외투를 입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호식 형사가 말했다.
“유형사! 나는?”
“선배님은 성동연합모임 쪽으로 가보세요. 거기에서 무슨 움직임이 있나 살펴보세요. 혹시 모르니 경찰관 여러 명을 대동하세요. 그곳이 적의 본거지입니다.”
“그래, 알았어. 그러면 누구랑 같이 갈까? 아! 우형사랑 같이 가면 되겠네.”
이호식 형사가 말을 마치고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보고서 작성에 온 신경을 쓰고 있는 우동식 형사에게 외쳤다.
“어이, 우형사! 나랑 같이 출동하자고.”
“네? 무슨 소리예요. 이거 끝나면 퇴근하려고 했는데.”
“좀 도와줘! 우형사! 이럴 때 선배를 돕지 언제 돕나?”
“선배님, 저는 행운 빌라 사건 팀도 아닌데 너무 하시네요!”
“이번 기회에 우리 팀에 들어와 봐. 우리가 범인을 잡으면 자네 실적도 쑥 올라가는 거야.”
“오우! 그래요? 뭐가 있는 모양이네요. 이선배님이 그런 말씀도 다 하시고. 대장님 아니, 유형사가 확실한 걸 잡은 모양이네요.”
“그렇지, 빨리 가자고 지금 시간이 없어.”
“네, 알겠습니다. 범인을 잡으면 저도 공이 있는 겁니다. 이거 녹음해야 하는데 … 나중에 딴소리하기 없기에요.”
“그건 걱정하지 마! 후배 공은 빼앗지 않아!”
이호식, 우동식 형사가 서둘러 외투를 입었다. 둘이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차수호 형사는 외투를 입고 유강인 옆에서 그를 기다렸다.
잠시 후, 유강인의 핸드폰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