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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침 Sep 26. 2022

다시 설계

지난 미팅을 통해 우리의 요구사항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말씀을 드렸지만 첫 시작은 건축주 Q&A 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전달받은 문서 파일에는 대지 위치, 건축 면적, 예산, 가족 관계 등의 일반적인 사항부터 각 공간별 상세한 부분까지 빼곡히 적혀있었다. 꽤 많은 부분은 예전부터 생각하고 고민했던 질문이었지만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질문도 더러 있었다. 더불어 추가적인 요구사항이 있다면 양식에 구애받지 말고 자유롭게 작성해 달라는 말씀도 해주셨다.


본인의 취향을 오롯이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우리 사회는 개인의 개성보다도 집단의 선택을 우선시하도록 교육해왔고 다수의 결정을 그대로 따르는 "안전"을 강요받아왔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보다 무엇이 유행하는지가 더 큰 관심사이고 그들의 선택지를 마치 내 것 인처럼 착각하는 상황은 너무나도 보편적이다. 이런 습관 속에서 나의 취향을 극도로 반영한 건축물을 상상한다는 건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인터넷에서 예쁜 집을 찾는 게 아니라 우리의 지난 삶 속에서 행복했던 기억들을 추려보는 일이었다. 그런 기억들 속에서 각 공간의 이미지를 구체화하고 분류하여 요구사항을 정리할 수 있었다.


또 하나는 요구사항을 과도하지 않게 최대한 줄이는 일이었다. 욕심과 예산 안에서 고민하는 일은 너무나 많다. 이것저것 다 구겨 넣기에는 공간도 비좁고 산만해진다. 최대한 단순하고 군더더기 없게 정리하는 것도 중요하다.


21장의 건축주 Q&A 작성을 마치고 수십 번을 읽어보았다. 생각보다 분량이 늘어난 이유는 최대한 우리의 의도와 배경 스토리를 설명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화장실이 몇 개 필요하다 라는 건조한 요구사항이 아니라 집에 가족 친지 및 친구들이 자주 방문하고, 미래에 예상되는 가족 구성원이 어떻고 등등의 다양한 맥락을 제공하여 설계의 자유를 드리고 싶었다. 그래야 더 좋은 설계안이 나올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얼마 후 몇 개의 시안이 준비되었고 피드백을 주고받았다. 각 시안 별로 설계자의 의도를 듣고 우리가 좋았던 부분에 대한 감상을 전달하였다. 주차장과 안방 화장실에 대한 요구사항을 좀 더 보강하였고 이렇게 보강된 설계안이 현재 완성된 최종 도면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을 보면 계획 설계 과정은 매끄럽게 진행된 듯싶다. 사실상 거실과 주방, 각 방은 진작에 완성되었고 기계실, 세탁실, 공용 화장실의 치수와 형태에 꽤 많은 시간을 쏟았다. 마음 같아서는 조금이라도 더 넓게 하고 싶었지만 물리적인 공간이 허락하지 않아 이래저래 다양한 배치를 하다 보니 그런 것 같다. 줄인다고 많이 줄였는데도 사람 욕심이라는 게 어쩔 수 없더라.


또한 패시브하우스를 계획하며 포기하게 된 것들도 있는데 바로 알루미늄 창호, 벽난로, 그리고 천창이다. 알루미늄 창호는 디자인 관점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창호 프레임의 열관류율이 에너지 해석의 기준치를 만족하기 위해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금액이 필요했고 (반대로 기준치를 만족하지 못하면 열손실로 인한 결로를 피할 수 없고 이는 곧바로 하자로 이어진다) 벽난로는 연소 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와 미세먼지로 인한 실내 공기질 저하, 연도에서 발생할 수 있는 결로와 기밀성 저하, 패시브하우스 특성상 낮은 실내 온도 편차로 오히려 벽난로로 인한 오버 히팅 가능성 때문에 선택할 수 없었으며 천창은 우리나라의 기후 특성상 겨울철 담천공 비율(overcast sky)이 낮은데 이 때문에 특히 야간에 천공 복사로 손실되는 에너지가 급격하게 증가하여 결로를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선택할 수 없었다.


2년 전 처음 집을 짓겠다는 결심과 함께 꿈꾸었던 드림하우스는 루프탑 수영장이 있는 대저택이었지만(지금 생각하면 웃음만 나온다) 현실로 연착륙하는 과정은 실망과 아쉬움의 연속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래도 좌절하지 않았으면 한다. 비록 겉으로는 특별한 거 하나 없는 조그마한 집일지라도 온전히 나를 위해 설계된 집이라면 그것만으로도 가치 있는 공간임에는 틀림없기 때문이다.


건축주학교 6 : 건축주 꿈 속에서 연착륙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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