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암치료 때문에 이런저런 증상이 나타난다. 총체적 난국이다. 탈모는 기본이고 뱃멀미를 24시간째 하고 있는 것처럼 속이 좋지가 않다. 들떠있는 손톱 때문에 주방에서 요리를 할 수가 없다. 가만히 있어도 발꿈치에 불을 붙인 듯 화끈거려 서있기 힘들다. (항암제에 따라 증상은 다르게 나타난다.)
흔히 결혼프러포즈 하면서 고생 안 시킨단 의미로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해 줄게' 이런 말을 하는데, 난 다른 이유로 일정 기간 동안 손에 물을 안 묻히게 되었다.
벌써 4년이 넘었다. 이제 내가 일반인(?)인지 가끔 헷갈릴 때도 있을 만큼 감사하게도 보통의 일상을 살고 있다. 아이들 케어하는 것부터 집안일에 요리까지.
거친 파도도 언젠가는 잔잔해지듯, 인생 격변의 시기를 지나 어제와 오늘이 별 다를 거 없는 소중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엄마는 내가 수술 후 퇴원한 그날부터 지금까지 4년이 넘도록 반찬을 만들어서 보내주시고 계신다. (남편이라도 요리를 할 줄 알면 좋으련만, 요알못에다가 주말부부라 남편이 차려주는 밥상을 받는 호사를 누리는 건 다른 집 여자이야기이다.)
항암치료 때문에 요리가 힘든 딸을 위해서 만들어 보내주시기 시작한 게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렇게 보통의 일상을 살게 된 건 모두 엄마가 해 주신 반찬 덕분이다.
엄마가 건강한 음식을 정성껏 만들면, 아빠는 엄마 반찬을 싣고차로 20분 거리인 우리 집에 전해주신다.
의사 선생님이 수술로 생명을 구해주셨다면, 엄마는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신 거다.
엄마의 지극정성으로 지금의 내가 있는 듯하다.
엄마는 무뚝뚝한 편이셨다. 어렸을 때 엄마가 무서워서 속 얘기 한번 제대로 꺼낸 적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해가 간다. 엄마는 어렸을 때 아빠가 일찍 돌아가셨고 7남매라 엄마의 사랑이라는 걸 제대로 온전하게 받아본 적이 없었을 것 같다. 받아 본 적이 없었기에 아마도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을 몰랐을 거다. (초등저학년 때로 기억한다. 시험에 '부모님은 우리가 아프면 어떻게 하시나요?' 이런 문제가 나왔었다. 정답은 '걱정하신다'인데, 답을 '화를 내신다'로 골랐던 기억이 있다. 그걸로 엄마한테 또 혼이 났던. )
그런 엄마가 나를 보며 울고 있다.
수술하던 날 수술실에 들어가기 직전, 엄마는 두 눈이 붉어진 채 내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