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지 끝을 모를 하늘이 높이 흩어져 있던 아침, 오빠와 학교를 가기 위해 장미맨션을 나선다. 오늘도 엄마는 5층 베란다에서 고개를 쭉 내밀어 아들, 딸의 이름을 부른다. 오빠는 얼굴이 시뻘게진 채 고개를 숙이며 짜증을 내고, 나는 그저 신이 나 엄마에게 두 손을 흔들며 환하게 인사한다.
집에서 국민학교 후문까지의 거리는 버스정류장 한 코스 정도. 종종 후문이 닫혀있으면, 온 거리만큼의 길을 다시 걸어 정문으로 가야 한다. 그런 날이면 가끔, 오빠는 나를 버리고 친구들과 함께 후문 담장을 넘어버리곤 했다. 뭐라 말할 새도 없이 사라진 오빠를 뒤로 하고 힘없이 툴툴대며 걸어가던 골목길.
학교 정문에 다다르니 친구들이 보인다. 어제도 만난 사이지만, 오랜만에 만난 듯이 반갑고 신이 난다. 뭐가 그리 좋은지 서로 귓속말을 해대며 킥킥거리기 바쁘다. 큰 비밀이라도 주고받는 듯, 목소리를 낮추고 웃을 때는 손으로 입을 꼭 가린다. 이럴 때는 요조숙녀가 따로 없다. 참새들처럼 쉴 새 없이 재잘거리며 정문을 통과한 뒤 장엄하리만큼 높은 계단을 헉헉대며 올라간다. 숨을 다 돌리기도 전에 건물 앞 화단에 줄지어진 빨간 샐비어 꽃무더기가 눈 안으로 쏟아진다. 그 강렬한 색을 미처 눈에 다 담기도 전에 친구들과 눈빛을 주고받으며 주변을 둘러본다. 다행히 선생님은 아무도 안 계신다. 약속이나 한 듯 다 같이 화단으로 우르르 달려든다. 연신 다른 곳을 보는 눈과 다르게 손은 이미 바쁘게 꽃을 따고 있다.
톡, 청량한 소리를 내며 기다란 나팔모양의 꽃이 가볍게 떨어진다. 가녀린 꽃의 끝, 흰 부분을 얼른 입으로 가져가 살짝 빨아본다. 달콤한 꿀이 입안에 화사하게 퍼진다.
'역시, 이 맛이야.'
꽃 한 송이에서는 꿀이 감질날 만큼만 나온다. 하지만 감질나게 빨아먹는 그 재미가 더 맛있다. 가끔은 꿀이 빈 꽃이 잡힌다. 힘을 주어 빤 입이 민망하게, 텅 빈 공기만 실없이 흘러 들어온다. 한참을 정신없이 화단 앞에 쪼그려 앉아 꿀을 빨아먹는다. 그러다 문득 발 밑에 떨어진 한 무더기의 흔적을 보고는 깜짝 놀라 후다닥 도망치듯 흩어져 학교 안으로 들어간다.
'지각하면 선생님한테 손바닥 맞는데!'
급한 마음에 얼른 실내화를 갈아 신고 계단을 뛰어 올라가려다, 무서운 6학년 선도부 오빠들의 눈총을 받고는 얌전하게 줄을 서서 계단을 걸어 올라간다.
선생님은 샐비어 꽃은 관상용이니 뜯거나 꿀을 빨아먹지 말라고 하셨다. 먹다가 걸리면 크게 혼나고 청소를 시킬 것이라 겁을 주셨지만, 아이들은 용케도 몰래몰래 꽃을 따먹었다.
물론, 모든 아이들이 그런 건 아니다. 가끔 도도하게 팔짱을 끼고 우릴 아래로 내려다보듯 비웃는 친구가 있기도 했다.
"우리 엄마가 그거 더럽다고 먹지 말랬거든!"
우리 엄마도 나에게 꽃에 매연이 많을 거라며 꿀을 빨아먹지 말라고 하셨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너무 맛있는 것을. 게다가 엄마는 여기에 안 계신다.
먹을 것이 부족한 시절도 아니다. 과자를 못 사 먹을 정도로 가난해서 먹을거리가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샐비어 꽃꿀은 포기하기가 힘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많던 꽃들은 하루 이틀이면 거의 없어졌기에, 빠른 자만이 꿀을 먹을 수 있었다. 그 뒤에 늦게 피어나거나 피어난 지 오래된 꽃들에게선 왜인지 꿀이 나오지 않았다. 막 피어난 신선한 꽃에서만 맛볼 수 있는 꿀 맛이란! 돈 주고도 사기 힘든 한정판 같은 샐비어 꿀은 맛 자체를 뛰어넘는 그것만의 매력이 있었다.
하지만 으레 그렇듯 아이들의 관심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꽃이 처음 핀 며칠만 '와'하고 달려들 뿐, 그 뒤론 다른 새로운 놀거리에 빠져 샐비어 꽃은 어느새 아이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갔다.
바람이 제법 시원해진 어느 날, 교정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샐비어가 오랜만에 눈에 들어온 날, 꽃 하나를 무심히 따서 입으로 가져가 쪽, 하고 빨아본다. 무심해진 내 마음만큼 무심한 헛바람만이 훅, 하고 꽃잎의 쓴 맛과 함께 입안으로 밀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