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앞에 병아리가 보일 때마다 부지런히 사다 나른 덕에 수많은 얄리들과 이별해야 했지만, 개중에는 끈질긴 생명력으로 오래오래 우리 집에 머물렀던 얄리들이 꽤 있었다.
작고 동글동글한 노란 병아리에서 빨간 벼슬을 장착하고 하얀 닭이 되어버린 나의 얄리들.
언제나 그렇듯, 처음의 약속과 다짐(내가 키울 거야!)과는 다르게 자라나는 병아리의 돌봄은 모두 엄마의 몫이 되었고, 아무 죄 없는 엄마는 그렇게 불쌍한 병아리들을 열심히 먹이고 키우셨다.
베란다는 병아리를 위해 넣어놓은 배추 쪼가리들과 병아리의 배설물로 가득 차 있었고, 매일 베란다를 청소해야 했던 엄마는 청소를 할 때마다 나에게 잔소리를 끊임없이 했다. 엄마가 청소를 시작한다 싶으면 어디론가 치사하게 도망치던 어린 시절의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커버린 병아리들을 예뻐함에는 변함이 없었다.
우리 집에 가장 오래 살았던 아이의 이름은 삐순이.(왜 당연히 암탉이라고 여겼을까)
삐순이는 엄마의 정성 어린 보살핌과 나의 관심으로 무럭무럭 자랐다. 건강하게 자라는 것과 반비례하게 삐순이의 귀여움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동글동글하던 몸은 길쭉해지고, 노랗던 털이 하얘지고, 빨간 벼슬까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닭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런 삐순이가 좋아하던 취미활동은 크게 2가지였다.
하나는 거울 보기.
학교 앞에서 팔던, 한쪽에는 장국영 사진이 달린 거울을 삐순이가 볼 수 있게 고정해서 베란다 안에 넣어 주었다. 친구가 따로 없던 삐순이는(두 마리를 함께 사 왔지만 한 마리는 일찍 떠났다) 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을 친구라고 생각했던 건지, 열심히도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계속 관찰한 결과, 삐순이는 거울 안의 모습이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이 분명했다. 외모에 꽤 관심이 많았던 삐순이는 그렇게 장국영과 자신의 모습을 번갈아 보며 자신의 겉모습을 가꾸어 나갔다.
또 하나의 취미는 바깥세상 구경하기.
목까지만 들어갈 정도로 열어놓은 베란다 창문 밖으로 삐순이는 열심히 세상을 구경했다. 아파트 5층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생각보다 많았다. 하루종일 다니는 차들, 사람들, 새들, 나무들, 건물 등. 사람보다 시력이 좋은 삐순이는 그런 것들을 하루종일 열심히 관찰했다.
어느 날, 학교를 다녀오자 베란다에 있어야 할 삐순이가 보이지 않았다. 베란다 구석구석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녀석의 흔적은 없었다. 그날따라 삐순이 바깥구경용 창문을 많이 열어놨던 걸까. 눈으로 보기엔 삐순이가 지나가기엔 많이 좁아 보였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5층 아래를 내려다보았지만 삐순이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이 좁은 구멍사이로 나갔겠어?'
믿을 수 없었지만, 그것 말고는 삐순이가 갑자기 사라질 방법이 없었다. 바깥구경에 너무 심취한 삐순이가 그대로 밖으로 나가떨어진 걸까? 삐순이는 통통해 보였지만 그건 알고 보니 다 털이었던 걸까?
없어진 삐순이를 찾으러 나간 나는 여기저기 '혹시 이만한 닭도 아닌 병아리도 아닌 걸 봤냐'라고 지나치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본 적 없다는 희망 없는 대답만 듣던 와중, 누군가 경비실 뒷마당에 그만한 닭이 잡혀있다는 얘기를 내게 해 주었다. 살아 있어 다행이었다. 자기도 나름 새라고 필사의 날갯짓으로 5층에서 날아 내려왔나 보다. 나무들이 쿠션이 되어 줬을 수도 있겠다. 어찌 됐든 나의 삐순이는 정말로 하늘을 날아버렸다. 거위의 꿈도 아닌 무려 닭의 꿈을 이룬 내 동생 삐순이.
혼자 돌아다니는 닭을 보고는 경비아저씨가 노인정에 있는 어르신들과 같이 잡아먹기 위해 삐순이를 묶어놨다고 했다.
내 소중한 삐순이를 벌써 잡아먹었을까 싶어 한달음에 경비실로 달려갔다. 알고 보면 매우 똑똑한 닭은 주인을 정확하게 알아본다. 발이 묶여 그렇게 난리를 치던 삐순이는 나를 보자마자 나에게 달려들어 비로소 안정을 되찾았다. 덩치 큰, 이제는 닭이 다 되어버린 삐순이를 품에 안고 경비실을 나오자 친구들은 징그럽다며 다 내게서 도망을 갔다.
얼마 후 아침, 항상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삐순이가 보이지 않았다. 엄마는 왜인지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불안한 마음에 엄마에게 울면서 삐순이 어디 갔냐고 따져 묻자, 엄마는 더 이상은 집에서 키울 수가 없어 양계장으로 삐순이를 보냈다고 했다. 거짓말하지 말라고, 사실대로 말하라며 울부짖는 나에게 미리 말 못 한 건 미안하다고, 그럼 내가 못 보내게 할 거라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주택도 아닌 아파트에서는 더 이상 닭을 키울 수가 없다고 했다. 그 말을 이해할 정도의 나이는 되었기에, 의심스러웠지만 엄마를 믿고 삐순이가 좋은 곳으로 갔다고 믿기로 했다. 하지만 며칠 동안 나는 계속 울었고, 우리 집 식탁에는 한참 동안 닭요리가 올라오지 않았다.
나중에 나이가 한참 들어 엄마에게 물었다. 그때 삐순이 어떻게 했냐고. 나보다 더 동물을 좋아하는 엄마다. 잡아먹을 수도, 그런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정말 어디로 보낸 건지 궁금했다. 엄마는 그때는 거짓말을 했노라고 나에게 얘기했다. 알도 못 낳는 닭을 어느 양계장에서 받아주냐고도 했다.(그러고 보니 그 생각은 못해봤다. 심지어 수탉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더 이상 키울 수는 없어, 아는 사람에게 보냈고, 거기서 삐순이를 어떻게 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아마도 잡아먹었겠지...
삐순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그래도 우리 집에 함께 있는 동안 행복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