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영어 회화 책 한 권을 주문했다. 별생각 없이 주문한 책인데, 알고 보니 이 책은 심상치 않은 책이었다. 시중에서 불티나게 팔리고 있었고 소비자들 사이에서도 이미 소문이 자자했다. 책을 쓴 강사는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다음 날, 주문한 책이 도착했다. 난 미심쩍은 마음으로 상자를 뜯었다.
"이게 그 소문이 자자한 책이란 말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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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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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만한데?"
이 책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이랬다.
"할아버지 할머니도 가능!"
이 책은 너무너무너무 쉬웠다. 나쁜 의미로 쉬웠다는 게 아니라 좋은 의미로 쉬웠다. 내용이 단순했고 설명도 간결했다. 정말 누구나 이해할 만큼 잘 만든 책이었다. 그래도 나름 영어 회화 책인데, 이렇게 쉽게 썼다고? 물론 생략된 내용이 많아 깊이는 얕았지만 쉽고 재밌다는 점이 모든 단점을 상쇄시켰다.
난 이틀 만에 책을 씹어 먹었다. 쉽고 단순해서 빨리 끝낸 것도 있지만 재밌어서 이기도 했다. 쉬워서 재밌었던 건지 재밌어서 더 쉽게 느껴진 건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신나게 페이지를 넘겼다.
책을 다 소화시킨 뒤 문득 난 궁금해졌다.
"이 책의 성공 비결은 뭘까?"
이 책은 왜 이렇게 잘 팔리지? 솔직히 내용은 많이 빈약한데? 내가 내린 결론은 이거였다.
쉽고 단순하다.
영어 책은 대부분 쉽지 않다. 아무리 쉬워도 기본적인 개념은 반드시 거쳐야 한다. 1 형식 2 형식 to부정사 관계 대명사 등등등 이런 내용들은 덧셈 뺄셈처럼 당연히 지나야 하는 과정이다. 근데 이 책은 이런 개념들을 모조리 삭제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영어 공부를 포기하게 만드는 장애물들을 과감하게 없애버린 것이다. 대신 실용적인 기술 몇 가지로 전체 내용을 이끌어간다.
이 책을 만난 지 벌써 2년이 넘었는데, 난 요즘도 종종 이 책을 떠올린다. 책의 내용을 떠올리는 게 아니라 책의 방향, 이 책의 전략에 대해서 생각한다.
"쉽고 단순한 게 짱이구나"
난 며칠 전 브런치 글을 보면서도 이런 생각을 떠올렸다.
난 평소에 브런치에 올라오는 글은 잘 안 보는 편이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그동안 난 글을 쓸 때만 브런치에 들어왔다. 그런데 며칠 전 우연히 다른 작가님의 글 한편을 시작으로 여러 작가님의 글을 보게 됐다. 많은 분들에게 응원받는 작가님부터 나처럼 평범한 작가님까지. 한 분 한 분 둘러보며 느낀 점은 이거였다.
나도 쉽고 단순한 글을 좋아하는구나...
브런치에 올라오는 글을 읽다 보면 끝까지 읽는 글이 있고, 몇 줄 읽다 나가버리는 글이 있다. 그냥 나가버리는 글은 공통적으로 어려운 글이었다. 모호하거나. 복잡하거나. 직관적으로 이해가 잘 안 가는 글. 반면 끝까지 읽는 글은 공통적으로 쉽고 간결했다. 그게 문장이 됐든 내용이 됐든 어쨌든 읽기 편하게 쓰인 글이었다. 논리가 훌륭한지 스토리가 매력적인지는 뒷 일이었다.
난 생각에 잠겼다.
"다른 사람들도 내 글이 어렵다고 느꼈을까?"
"나처럼 몇 줄 읽어보고 그냥 나갔을까?"
순간 난 내가 그동안 너무 자기중심적으로 글을 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내 머릿속에 고여있는 생각을 밖으로 퍼내기만 바빴다. 내 글을 읽는 독자가 얼마나 지루할지는 고려하지 않았다. 나도 막상 이해가 잘 안 되면 바로 나가버리면서 남들은 안 그럴 거라고 생각한 건 착각이었다.
뭐든지 쉽고 단순한 게 최고이지 않을까? 깊이가 있든 어떻든 일단 쉬워야 한다. 그래야 손이 가고 그래야 쳐다보고 그래야 쓰게 된다. 근데 그게 제일 어렵다. 특히나 글은 더 그렇다. 어렵게 쓰는 건 쉽지만 쉽게 쓰는 건 어렵다. 어려운 내용을 쉽게 쓰는 건 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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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한다. 많이 배운다. 머리에 팍팍 꽂히는 작가님들의 글을 보면 난 아직 걸음마 수준이라는 걸 느낀다. 겸손한 마음으로 꾸준히 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