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인과관계

CAUSATION

by DrLeeHC

제12장: 인과관계 (CAUSATION)


“모든 원인에는 결과가 있고,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 모든 일은 법칙에 따라 일어난다. 우연이란 인식되지 않은 법칙의 이름일 뿐이다. 인과의 여러 차원들이 있지만, 어떤 것도 법칙을 벗어날 수는 없다.” —키발리온.


위대한 여섯 번째 헤르메스 원리, 즉 원인과 결과의 원리는, 법칙이 우주에 편재한다는 진리를 구현한다. 즉, 어떤 것도 우연히 일어나지 않으며, 우연이란 단지 존재하지만 인식되거나 감지되지 않은 원인을 나타내는 용어일 뿐이며, 현상은 끊김이나 예외 없이 연속적이라는 것이다.


원인과 결과의 원리는 고대와 현대를 막론하고 모든 과학적 사상의 기저에 있으며, 가장 이른 시기에 헤르메스 교사들에 의해 공표되었다. 그 이후로 수많은 사상 학파들 사이에서 많고 다양한 논쟁들이 일어났지만, 이러한 논쟁들은 주로 그 원리의 작용에 대한 세부 사항들에 관한 것이었으며, 더욱 종종 특정 단어들의 의미에 관한 것이었다. 기저에 있는 원인과 결과의 원리는, 이름값을 하는 세계의 거의 모든 사상가들에 의해 올바른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달리 생각하는 것은, 우주의 현상들을 법칙과 질서의 영역에서 빼내어, 인간들이 “우연”이라 불러온 상상 속의 어떤 것의 통제에 그것을 맡기는 것과 같다.


약간의 고찰은 누구에게든, 순수한 우연과 같은 것은 실제로는 없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웹스터 사전은 “우연(Chance)”이라는 단어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힘, 법칙 또는 목적 외의 것으로 가정된 작인 또는 활동 방식, 그러한 작인의 작용 또는 활동, 그러한 작인의 가정된 효과, 일어난 일, 우연성, 재난 등.” 그러나 약간의 고찰은 당신에게, 법칙 바깥의 어떤 것, 즉 원인과 결과 바깥의 어떤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우연”과 같은 작인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현상 우주 안에서, 후자의 법칙들, 질서, 그리고 연속성과는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어떤 것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한 어떤 것은 우주의 질서 있는 경향과 완전히 독립적일 것이며, 따라서 그것보다 우월할 것이다. 우리는 ‘전체’ 바깥의 어떤 것도 법칙 바깥에 있다고 상상할 수 없으며, 이는 오직 ‘전체’가 그 자체로 법칙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우주에는 법칙 바깥에, 그리고 법칙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을 위한 자리가 없다. 그러한 어떤 것의 존재는 모든 자연법칙을 무효화하고, 우주를 혼돈스러운 무질서와 무법 상태로 빠뜨릴 것이다.


신중한 검토는, 우리가 “우연”이라 부르는 것이 단지 모호한 원인들, 즉 우리가 인지할 수 없는 원인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원인들과 관련된 표현일 뿐임을 보여줄 것이다. 우연이라는 단어는 “떨어지다”(주사위가 떨어지는 것처럼)를 의미하는 단어에서 파생되었으며, 그 개념은 주사위의 떨어짐(그리고 다른 많은 일어난 일들)이 어떤 원인과도 관련 없는 단지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 문제가 면밀히 검토될 때, 주사위의 떨어짐에 대해서는 어떤 우연도 전혀 없다는 것이 보여진다. 주사위가 떨어져 특정 숫자를 보일 때마다, 그것은 태양 주위 행성들의 공전을 지배하는 것만큼이나 틀림없는 법칙에 복종한다. 주사위의 떨어짐 이면에는, 마음이 따라갈 수 있는 것보다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는 원인들, 즉 원인들의 사슬이 있다. 상자 안의 주사위의 위치, 던질 때 소비된 근육 에너지의 양, 테이블의 상태 등등, 이 모든 것이 원인들이며, 그 효과는 보여질 수 있다. 그러나 이 보이는 원인들 이면에는 보이지 않는 선행하는 원인들의 사슬이 있으며, 이 모든 것은 위로 향하게 된 주사위의 숫자에 영향을 미쳤다.


만일 주사위가 아주 여러 번 던져진다면, 보여지는 숫자들은 거의 같을 것임이 발견될 것이다. 즉, 1점, 2점 등이 위로 나오는 동등한 횟수가 있을 것이다. 동전을 공중에 던지면, 그것은 “앞면” 또는 “뒷면”으로 내려올 수 있다. 그러나 충분한 횟수의 던지기를 하면, 앞면과 뒷면은 거의 같아질 것이다. 이것이 평균의 법칙의 작용이다. 그러나 평균과 단 한 번의 던지기 모두 원인과 결과의 법칙 아래에 있으며, 만일 우리가 선행하는 원인들을 검토할 수 있다면, 동일한 상황과 동일한 시간에, 주사위가 그렇게 떨어진 것 외에 달리 떨어지는 것은 단순히 불가능했다는 것이 명확히 보여질 것이다. 동일한 원인들이 주어지면, 동일한 결과들이 뒤따를 것이다. 모든 사건에는 항상 “원인”과 “이유”가 있다. 어떤 것도 원인, 혹은 오히려 원인들의 사슬 없이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그들이 한 가지가 어떻게 다른 것을 야기할 수 있는지, 즉 두 번째 것의 “창조자”가 될 수 있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이 원리를 고찰함에 있어 약간의 혼란이 발생했다. 사실, 어떤 “것”도 결코 다른 “것”을 야기하거나 “창조”하지 않는다. 원인과 결과는 단지 “사건들”을 다룰 뿐이다. “사건”이란 “어떤 선행하는 사건의 결과 또는 귀결로서, 오거나, 도착하거나, 일어나는 것”이다. 어떤 사건도 다른 사건을 “창조”하지 않으며, 단지 ‘전체’의 창조적 에너지로부터 흐르는 위대한 질서 있는 사건들의 사슬 안의 선행하는 고리일 뿐이다. 모든 선행, 귀결, 그리고 후속 사건들 사이에는 연속성이 있다. 이전에 일어난 모든 것과, 뒤따르는 모든 것 사이에는 관계가 존재한다. 돌 하나가 산비탈에서 떨어져 나와 아래 계곡의 오두막 지붕을 뚫고 부서진다. 언뜻 보기에 우리는 이것을 우연한 효과로 간주하지만, 그 문제를 검토할 때 우리는 그 이면에 위대한 원인들의 사슬을 발견한다. 우선, 돌을 지지하던 흙을 부드럽게 하여 그것이 떨어지게 한 비가 있었다. 그런 다음 그 이면에는, 더 큰 바위 조각에서 암석 조각을 점차 분해시킨 태양의 영향, 다른 비 등이 있었다. 그런 다음 산의 형성으로 이어진 원인들, 그리고 자연의 격변에 의한 그 융기 등이 있었으며, 그렇게 무한히 계속된다. 그런 다음 우리는 비 등의 이면에 있는 원인들을 추적할 수 있다. 그런 다음 우리는 지붕의 존재를 고려할 수 있다. 요컨대, 우리는 곧 우리 자신이 원인과 결과의 그물에 얽혀 있음을 발견하고, 곧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 애쓸 것이다.


마치 한 사람이 두 명의 부모, 네 명의 조부모, 여덟 명의 증조부모, 열여섯 명의 고조부모를 가지고, 그렇게 계산하여, 예를 들어, 40세대가 계산될 때 조상들의 수가 수백만 명에 이르는 것처럼, 눈앞을 지나가는 작은 검댕 조각과 같은 가장 사소한 사건이나 현상 이면에 있는 원인들의 수도 그러하다. 그 작은 검댕 조각을, 그것이 거대한 나무줄기의 일부를 형성했던 세계 역사의 초기 시대로, 그것이 나중에 석탄으로 변환되고, 그렇게 계속되어, 지금 당신의 시야 앞을 다른 모험들을 향한 길 위에서 지나가는 그 검댕 조각으로서 거슬러 추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사건, 원인, 그리고 결과의 거대한 사슬이 그것을 현재의 상태로 가져왔으며, 후자는 지금으로부터 수백 년 후에 다른 사건들을 만들어낼 사건들의 사슬 중 하나일 뿐이다. 그 작은 검댕 조각에서 비롯된 일련의 사건들 중 하나는 이 글들의 저술이었으며, 이는 식자공으로 하여금 어떤 작업을 수행하게 했고, 교정자로 하여금 마찬가지로 하게 했으며, 당신의 마음과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들을 불러일으킬 것이고, 이는 차례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며, 그렇게 계속되고, 계속되며, 계속되어, 인간이 더 이상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넘어설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작은 검댕 조각의 통과로부터 비롯되었으며, 이 모든 것은 사물들의 상대성과 연관성, 그리고 더 나아가 “모든 것을 야기하는 마음 안에는 큰 것도 없고, 작은 것도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잠시 멈추어 생각해보라. 만일 어떤 남자가 희미한 석기 시대의 어느 시기에 어떤 처녀를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 이 글들을 읽고 있는 당신은 지금 여기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아마도, 같은 커플이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 이 글들을 쓰고 있는 우리도 지금 여기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쪽의 바로 그 쓰는 행위와, 당신 쪽의 읽는 행위는, 당신과 우리 각자의 삶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지금 살고 있고 앞으로 올 시대에 살게 될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직접적, 또는 간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생각, 우리가 수행하는 모든 행위는, 그 직접적 및 간접적 결과들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원인과 결과의 위대한 사슬에 들어맞는다.


우리는 이 저작에서, 여러 이유로, 자유 의지나 결정론에 대한 고찰로 들어가기를 원치 않는다. 많은 이유들 가운데, 주요한 이유는 논쟁의 어느 쪽도 전적으로 옳지 않다는 것이다. 사실, 헤르메스 가르침에 따르면, 양쪽 모두 부분적으로 옳다. 극성의 원리는 둘 다 단지 반쪽 진리, 즉 진리의 반대 극들일 뿐임을 보여준다. 가르침은, 사람이 그 용어들의 의미와, 그 문제가 검토되는 진리의 높이에 따라, 자유로우면서도 동시에 필연성에 묶여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고대의 저자들은 그 문제를 이렇게 표현한다. “창조물이 중심에서 멀수록, 그것은 더 많이 묶여 있다. 중심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것은 더 자유롭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다소 유전, 환경 등의 노예이며, 매우 적은 자유를 현현한다. 그들은 외부 세계의 의견, 관습, 그리고 생각들에 의해 흔들리며, 또한 그들의 감정, 느낌, 기분 등에 의해 흔들린다. 그들은 이름값을 하는 어떤 숙달도 현현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 주장을 분개하며 부인하며 말한다. “왜, 나는 확실히 내가 기뻐하는 대로 행동하고 행할 자유가 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바로 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고 싶은 것”과 “기뻐하는 대로”가 어디서 비롯되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다른 것보다 한 가지를 “하고 싶게” 만드는가?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이것을 하기를 “기뻐하게” 하고, 저것을 하지 않게 하는가? 그들의 “기뻐함”과 “원함”에는 “이유”가 없는가? 스승은 이러한 “기쁨들”과 “원함들”을 정신적 극의 반대편 끝에 있는 다른 것들로 바꿀 수 있다. 그는 어떤 느낌, 기분, 감정, 또는 환경적 암시가 그 안에 그렇게 하려는 경향이나 욕망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의욕하는 대신, “의욕하기를 의욕할” 수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떨어지는 돌처럼, 환경, 외부 영향, 그리고 내부의 기분, 욕망 등에 순종하며, 자신들보다 더 강한 다른 이들의 욕망과 의지, 유전, 환경, 그리고 암시는 말할 것도 없이, 자신들의 저항이나 의지의 행사 없이 이리저리 끌려다닌다. 삶이라는 체커보드 위의 졸처럼 움직이며, 그들은 자신들의 역할을 하고 게임이 끝난 후에 옆으로 치워진다. 그러나 스승들은, 게임의 규칙들을 알고, 물질적 삶의 차원을 넘어 상승하여, 자신들의 본성의 더 높은 권능들과 접촉하여, 자신들을 둘러싼 환경뿐만 아니라 자신의 기분, 성격, 특질, 그리고 극성을 지배하며, 그리하여 졸 대신 게임 안의 움직이는 자, 즉 결과 대신 원인 제공자가 된다. 스승들은 더 높은 차원들의 인과관계를 피하지 않으며, 더 높은 법칙들과 일치하게 되어, 그리하여 더 낮은 차원에서의 상황들을 숙달한다. 그들은 그리하여 단지 맹목적인 도구가 되는 대신, 법칙의 의식적인 일부를 형성한다. 그들이 더 높은 차원들 위에서 봉사하는 동안, 그들은 물질적 차원 위에서 다스린다.


그러나, 더 높은 곳과 더 낮은 곳 모두에서, 법칙은 언제나 작동하고 있다. 우연과 같은 것은 없다. 눈먼 여신은 이성에 의해 폐지되었다. 우리는 이제, 지식에 의해 맑아진 눈으로, 모든 것이 보편적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 즉 무한한 수의 법칙들이 단지 하나의 위대한 법칙, 즉 ‘전체’인 법칙의 현현들일 뿐이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참새 한 마리도 ‘전체’의 마음이 알아채지 못하게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 즉 심지어 우리 머리카락의 수도 세어져 있다는 것은, 경전들이 말했듯이, 참으로 진실이다. 법칙 바깥의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그것에 반하여 일어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단지 맹목적인 자동인형이라고 생각하는 실수를 저지르지 말라.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헤르메스 가르침은, 인간이 법칙을 사용하여 법칙들을 극복할 수 있으며, 더 높은 것이 항상 더 낮은 것에 대해 우세할 것이며, 마침내 그가 법칙 그 자체에 피난처를 찾는 단계에 도달하여, 현상적인 법칙들을 비웃을 때까지 그러할 것이라는 것이다. 당신은 이것의 내적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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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12-1. 지혜의 계보와 비교 철학


헤르메스 철학의 여섯 번째 대원리, “모든 원인에는 결과가 있고,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 모든 일은 법칙에 따라 일어난다. 우연이란 인식되지 않은 법칙의 이름일 뿐이다”라는 선언은, 우리를 우주의 가장 엄격하고도 자비로운 질서의 심장부로 인도합니다. 이 ‘원인과 결과의 원리(The Principle of Cause and Effect)’는,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현상이 결코 무작위적이거나 우연한 사건의 파편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거대한 인과의 사슬에 의해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밝힙니다. 이 원리는 언뜻 보기에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냉혹한 숙명론처럼 들릴 수 있지만, 그 더 깊은 차원에는 인간에게 자신의 운명을 창조할 수 있는 궁극의 자유와 책임을 부여하는, 가장 위대한 해방의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이 심오한 인과의 법칙은 헤르메스주의만의 고유한 사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류의 가장 위대한 지혜 전통들이 공통적으로 발견했던 우주적 진리이며, 특히 동양 철학의 핵심을 이루는 ‘카르마(Karma, 業報)’ 사상 속에서 가장 정교하고도 심오한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이 두 위대한 전통을 비교 분석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 하나하나가 어떻게 미래라는 밭에 뿌려지는 씨앗이 되는지를 탐구하고자 합니다.


우연의 부정: 법칙이 지배하는 우주


『키발리온』은 ‘우연(Chance)’이라는 개념 자체를 단호히 부정하는 것으로 논의를 시작합니다. 우연이란 “인식되지 않은 법칙의 이름일 뿐”이며, “어떤 것도 법칙을 벗어날 수는 없다”고 선언합니다. 이는 우주가 법칙과 질서가 지배하는 합리적인 ‘코스모스’라는,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부터 이어져 온 근본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합니다. 만일 이 우주에 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 단 하나의 예외, 즉 ‘우연’이라는 독립적인 힘이 존재한다면, 우주의 모든 질서는 순식간에 붕괴하고 혼돈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저자들은 주사위 던지기를 예로 들어 이를 설명합니다. 주사위가 특정 숫자를 보이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그 이면에 “마음이 따라갈 수 있는 것보다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는 원인들의 사슬”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주사위의 위치, 던지는 사람의 근육 에너지, 테이블의 상태 등 수많은 원인들이 결합하여, 그 결과는 단 하나의 필연적인 숫자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현대 과학의 결정론적 세계관과도 일치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카르마(Karma): 행위와 그 열매의 법칙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동양의 카르마 사상과 마주하게 됩니다. 산스크리트어 ‘카르마’는 본래 ‘행위(action)’를 의미하며, 모든 행위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열매(결과)’를 낳는다는 우주의 근본적인 인과법칙을 가리킵니다. 힌두교와 불교, 자이나교 등 인도의 모든 정신적 전통은 바로 이 카르마의 법칙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카르마의 법칙 또한 『키발리온』과 마찬가지로 우연을 부정합니다. 우리가 현재 경험하는 모든 상황—우리의 건강, 재정 상태, 인간관계, 심지어는 우리가 태어난 환경까지도—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우리가 이 생 혹은 전생(前生)에 지었던 행위(원인)의 필연적인 결과(열매)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금 행하는 모든 행위는, 그것이 아무리 사소해 보일지라도, 미래에 우리가 거두게 될 열매를 결정하는 씨앗이 됩니다.


『키발리온』이 “모든 생각, 모든 행위는, 그 직접적 및 간접적 결과들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원인과 결과의 위대한 사슬에 들어맞는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 카르마의 법칙을 서양의 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 두 전통은 모두 우리에게, 자신의 삶에 대한 완전한 책임을 질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의 불행은 더 이상 불운이나 외부의 탓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 과거에 뿌렸던 씨앗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인과의 차원들: 운명의 노예에서 주인이 되는 길


만일 모든 것이 이처럼 엄격한 인과의 사슬에 묶여 있다면,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과연 존재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키발리온』과 카르마 사상은 모두, 우리가 인과의 ‘차원(plane)’을 이해할 때 비로소 자유의 길이 열린다고 가르칩니다.


『키발리온』은 “인과의 여러 차원들이 있지만, 어떤 것도 법칙을 벗어날 수는 없다”고 말하며, “더 높은 차원이 더 낮은 차원을 지배한다”고 덧붙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장 낮은 ‘물리적 인과의 차원’에서 살아갑니다. 그들은 유전과 환경, 그리고 타인의 의지라는 외부적 원인들에 의해, 마치 “삶이라는 체스판 위의 졸(pawn)”처럼 이리저리 끌려다닙니다. 그들은 자신이 왜 그런 삶을 사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오직 결과의 세계 속에서 반응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그러나 헤르메스의 스승, 즉 현자는, 자신의 의식을 더 높은 차원, 즉 ‘정신적 인과의 차원’으로 끌어올립니다. 그는 “자신의 기분, 성격, 특질, 그리고 극성을 지배”함으로써, 더 이상 외부 환경의 결과물이 되는 것을 멈춥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의 내면 상태를 의식적으로 선택하고 조절하여, 외부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원인 제공자(Causers)’가 됩니다. 그는 “결과 대신 원인”이 되며, “졸 대신 움직이는 자(Movers)”가 됩니다.


이것은 카르마 사상에서 ‘무지(avidyā)’의 상태에서 벗어나 ‘지혜(prajñā)’를 얻는 과정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무지의 상태에 있는 중생은, 자신의 행위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 알지 못한 채, 맹목적인 욕망과 습관에 따라 카르마의 씨앗을 뿌리고 그 고통스러운 열매를 거두는 과정을 무한히 반복합니다. 그러나 지혜를 얻은 보살은, 인과의 법칙을 명확히 꿰뚫어 보기에, 더 이상 악한 카르마의 씨앗을 뿌리지 않습니다. 그는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 자신과 모든 존재의 행복이라는 선한 의도(원인)에 따라 행함으로써, 궁극적으로 행복과 해탈이라는 선한 결과에 이르게 됩니다.


자유의 본질: 의욕하기를 의욕하기


『키발리온』은 자유의 본질에 대해 가장 심오한 통찰을 제시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바로 한다”고 말하며 자신이 자유롭다고 주장하지만, 정작 “그 ‘하고 싶은 것’이 어디서 비롯되는지”는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들의 욕망은 사실 유전, 환경, 그리고 무의식적 습관에 의해 결정된, 또 다른 인과의 사슬일 뿐입니다.


그러나 스승은, “어떤 느낌, 기분, 감정, 또는 환경적 암시가 그 안에 그렇게 하려는 경향이나 욕망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의욕하는 대신, ‘의욕하기를 의욕할(Will to will)’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그것은 외부의 원인에 의해 촉발된 욕망을 따르는 자유가 아니라, 자신의 가장 높은 이성과 신성한 의지에 따라, 자신이 무엇을 원할 것인지 자체를 선택하는 자유입니다. 그는 더 이상 떨어지는 돌이 아니라, 돌의 궤적을 결정하는 중력의 법칙 그 자체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키발리온의 이러한 여섯 번째 원리는 우리에게, 우주가 엄격한 법칙 아래 운영되는 질서정연한 체계임을 보여줌으로써 깊은 안정감을 주는 동시에, 우리가 그 법칙을 이해하고 활용하여 자신의 운명을 창조할 수 있다는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인과의 법칙은 우리를 속박하는 감옥이 아니라, 우리가 더 높은 차원으로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입니다. 이 사다리를 한 걸음 한 걸음 의식적으로 올라가며, 자신의 모든 행위의 씨앗에 책임을 지고, 마침내 자신의 삶이라는 게임의 주인이 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원인과 결과의 원리’가 현대인에게 가르쳐주는 가장 위대하고도 실천적인 구원의 길입니다.



해설 12-2. 현대인을 위한 가르침


“모든 원인에는 결과가 있고,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 이 여섯 번째 헤르메스 원리는, 우리를 둘러싼 세상이 결코 ‘우연’이라는 변덕스러운 신의 지배를 받는 곳이 아님을 선언합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사건, 모든 만남, 모든 감정은 그 이면에 반드시 그것을 낳은 원인들의 거대한 사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진리는 처음에는 우리를 불편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의 모든 삶이 이미 정해진 각본에 따라 움직이는 듯한, 냉혹한 결정론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키발리온』은 바로 이 엄격한 법칙의 이해 속에서, 역설적으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자유의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그 길은 바로, 결과의 평면에서 사는 ‘노예’가 되기를 멈추고, 원인의 평면으로 올라가 스스로의 운명을 창조하는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체스판: 졸(Pawn)에서 플레이어로


『키발리온』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을 “삶이라는 체스판 위의 졸(pawn)”에 비유합니다. 졸은 스스로 움직이지 못합니다. 그것은 외부의 힘, 즉 다른 플레이어의 의지에 의해 이리저리 옮겨지다가, 게임이 끝나면 아무 의미 없이 상자 속으로 치워집니다. 이 비유는 자신의 삶에 대한 ‘원인과 결과의 법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정확하게 묘사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불행을 항상 외부의 탓으로 돌립니다. 경제가 어려워서, 부모님이 나를 지지해주지 않아서, 혹은 단순히 ‘운이 나빠서’ 자신의 삶이 이 모양이라고 한탄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유전, 환경, 그리고 자신들보다 더 강한 다른 이들의 욕망과 의지”에 의해 움직여지는, 수동적인 ‘결과물’임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이라는 체스 게임에서, 자신이 직접 말을 움직이는 플레이어가 아니라, 그저 놓이는 대로 놓이는 장기짝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헤르메스의 스승은 다릅니다. 그는 “게임의 규칙들을 알고”, 물질적 삶의 차원을 넘어 “더 높은 차원으로 상승”합니다. 그는 더 이상 외부 환경이나 타인의 말에 의해 자신의 기분이나 결정이 좌우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기분, 성격, 특질, 그리고 극성을 지배”함으로써, 체스판 위의 ‘졸’이 아니라 게임을 움직이는 ‘플레이어(Movers)’가 됩니다. 즉, 그는 ‘결과’가 아니라 ‘원인’이 되는 길을 선택합니다.


선택의 연금술: ‘의욕하기를 의욕하기’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그 열쇠는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에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자유가 있다”고 믿지만, 정작 그 ‘원함’ 자체가 어디서 왔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습니다. 그들이 아침에 일어나 특정 커피를 마시고 싶어 하는 욕망, 특정 옷을 입고 싶어 하는 취향, 특정 정치적 견해를 지지하는 신념은, 과연 순수하게 그 자신의 것입니까? 아니면 그것은 대부분 광고, 사회적 유행,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습관, 그리고 무의식적인 감정의 반응(외부적, 내부적 원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물입니까?


『키발리온』은 진정한 주인이란, 이처럼 조건 지어진 ‘원함’에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니라, “의욕하기를 의욕할(Will to will)”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심오한 개념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무언가를 원하는 것을 넘어, 내가 ‘무엇을 원할 것인가’ 자체를 자신의 가장 높은 의지에 따라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능력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모욕적인 말을 들었을 때, 그의 무의식적인 반응(낮은 차원의 원인)은 즉각적인 분노와 복수심(결과)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졸’의 삶입니다. 그러나 헤르메스의 학생은 이 자동적인 반응의 사슬을 끊습니다. 그는 더 높은 차원, 즉 ‘나는 어떤 존재가 되기를 원하는가?’라는 차원으로 자신의 의식을 끌어올립니다. 그는 자신이 평화롭고 지혜로운 존재가 되기를 ‘의욕’합니다. 그리고 이 더 높은 의지(새로운 원인)에 따라, 그는 분노 대신 연민을, 복수 대신 용서를 ‘선택’합니다. 그는 더 낮은 법칙(자극-반응)을, 더 높은 법칙(의식적 선택)을 사용하여 극복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법칙을 사용하여 법칙들을 극복하고, 더 높은 것이 항상 더 낮은 것에 대해 우세할 것”이라는 가르침의 실제적인 의미입니다. 우리는 중력의 법칙을 없앨 수는 없지만, 양력이라는 더 높은 법칙을 사용하여 하늘을 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과거의 원인이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인과의 법칙을 없앨 수는 없지만, ‘지금, 여기’에서 새로운 원인을 창조하는 의식적인 선택의 힘을 사용하여, 과거의 사슬로부터 우리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습니다.


카르마와 자유: 씨앗을 바꾸는 지혜


이러한 가르침은 동양의 카르마(업보) 사상의 가장 깊은 가르침과도 정확히 일치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카르마를 피할 수 없는 숙명으로 오해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카르마는 ‘행위’, 즉 ‘선택’의 법칙입니다. 과거의 행위가 현재의 조건을 만들었듯이, 현재의 행위(선택)는 미래의 조건을 만듭니다. 우리는 과거의 열매를 거두어야만 하지만, 동시에 미래를 위해 새로운 씨앗을 심을 완전한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란, 인과의 법칙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법칙을 누구보다도 명확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자신의 영적 성장을 위해 의식적으로 활용하는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여섯 번째 헤르메스 원리는 현대인에게, 자신의 삶에 대한 100퍼센트의 책임을 질 것을 요구하는 동시에, 자신의 삶을 걸작으로 빚어낼 수 있는 무한한 힘이 자신 안에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더 이상 외부 환경을 탓하거나, 우연한 행운을 기다리며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과, 모든 말과, 모든 행동이 바로 미래의 우리 자신을 창조하는 원인이자 씨앗입니다. 이 진리를 깊이 깨닫고, 매 순간 신성한 주의를 기울여 선하고 지혜로운 원인의 씨앗을 심는 자, 그가 바로 자신의 운명을 지배하는 주인이자, 삶이라는 체스판을 자유롭게 움직이는 진정한 마스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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