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이중적이다. 모든 것은 양극을 가지며, 모든 것은 자신의 반대편을 가진다. 같고 다른 것은 같으며, 반대는 본질적으로 동일하지만, 등급이 다를 뿐이다. 극단은 만나며, 모든 진리는 반쪽 진리일 뿐이다. 모든 역설은 조화될 수 있다.” —키발리온.
위대한 네 번째 헤르메스 원리, 즉 극성의 원리는, 모든 현현한 것들이 “두 개의 면”, “두 개의 측면”, “두 개의 극”, 즉 두 극단 사이에 수많은 등급들을 가진 “한 쌍의 반대”를 가지고 있다는 진리를 구현한다. 언제나 인간의 마음을 당혹스럽게 했던 오래된 역설들은, 이 원리를 이해함으로써 설명된다. 인간은 항상 이 원리와 유사한 어떤 것을 인식해왔으며, 다음과 같은 속담, 격언, 그리고 경구들로 그것을 표현하고자 노력해왔다. “모든 것은 동시에 존재하며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진리는 반쪽 진리일 뿐이다”, “모든 진리는 반쯤 거짓이다”, “모든 것에는 양면이 있다”, “모든 방패에는 뒷면이 있다” 등등.
헤르메스 가르침은, 서로 정반대인 것처럼 보이는 것들 사이의 차이가 단지 등급의 문제일 뿐이라는 취지이다. 그것은 “반대의 쌍들은 조화될 수 있다”고 가르치며, “정립과 반정립은 본질적으로 동일하지만, 등급이 다를 뿐”이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보편적인 반대의 화해”는 이 극성의 원리를 인식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가르친다. 교사들은 이 원리의 예시들이 모든 곳에서, 그리고 어떤 것의 실재적 본성을 검토함으로써 얻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영과 물질이 단지 동일한 것의 두 극일 뿐이며, 그 중간의 차원들은 단지 진동의 등급들일 뿐임을 보여줌으로써 시작한다. 그들은 ‘전체’와 ‘다수’가 동일하며, 그 차이는 단지 정신적 현현의 등급 문제일 뿐임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법칙과 법칙들은 한 가지 것의 두 반대 극이다. 마찬가지로, 원리와 원리들. 무한한 마음과 유한한 마음들.
그런 다음 물리적 차원으로 넘어가서, 그들은 열과 냉기가 본질적으로 동일하며, 그 차이는 단지 등급의 문제일 뿐임을 보여줌으로써 그 원리를 설명한다. 온도계는 많은 온도의 등급들을 보여주며, 가장 낮은 극은 “냉기”라 불리고, 가장 높은 극은 “열”이라 불린다. 이 두 극 사이에는 많은 등급의 “열” 또는 “냉기”가 있으며, 어느 쪽으로 부르든 당신은 똑같이 옳다. 두 등급 중 더 높은 쪽은 항상 “더 따뜻하며”, 더 낮은 쪽은 항상 “더 차갑다.” 절대적인 기준은 없으며, 모든 것은 등급의 문제이다. 온도계에는 열이 멈추고 냉기가 시작되는 지점이 없다. 그것은 모두 더 높거나 낮은 진동의 문제이다. 우리가 사용해야만 하는 바로 그 “높음”과 “낮음”이라는 용어는, 단지 동일한 것의 극들일 뿐이다. 그 용어들은 상대적이다. “동과 서”도 마찬가지이다. 동쪽 방향으로 세계를 여행하면, 당신은 출발점에서 서쪽이라 불리는 지점에 도달하고, 그 서쪽 지점으로부터 돌아온다. 충분히 북쪽으로 여행하면, 당신은 자신이 남쪽으로 여행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빛과 어둠은 동일한 것의 극들이며, 그들 사이에는 많은 등급들이 있다. 음계도 마찬가지이다. “도”에서 시작하여, 당신은 다른 “도”에 도달할 때까지 위로 움직이며, 그렇게 계속된다. 판의 양 끝 사이의 차이는 동일하며, 두 극단 사이에는 많은 등급들이 있다. 색의 척도도 마찬가지이다. 높은 보라색과 낮은 붉은색 사이의 유일한 차이는 더 높거나 낮은 진동이다. 큼과 작음은 상대적이다. 소음과 고요함도 그러하며, 단단함과 부드러움도 그 규칙을 따른다. 마찬가지로 날카로움과 둔함도 그러하다. 긍정과 부정은 동일한 것의 두 극이며, 그들 사이에는 수없이 많은 등급들이 있다.
선과 악은 절대적이지 않다. 우리는 그 용어들의 사용에 따라, 척도의 한쪽 끝을 선이라 부르고 다른 쪽 끝을 악이라 부르거나, 한쪽 끝을 선이라 부르고 다른 쪽 끝을 악(Evil)이라 부른다. 어떤 것은 척도에서 더 높은 것보다 “덜 선하며”, 그러나 그 “덜 선한” 것은 차례로 그 바로 아래의 것보다 “더 선하다.” 그렇게 계속되며, “더 또는 덜”은 척도 위의 위치에 의해 조절된다.
그리고 정신적 차원에서도 그러하다. “사랑과 미움”은 일반적으로 서로 정반대인 것들, 완전히 다른 것들, 화해할 수 없는 것들로 여겨진다. 그러나 우리는 극성의 원리를 적용한다. 우리는 서로 구별되는 절대적인 사랑이나 절대적인 미움과 같은 것은 없음을 발견한다. 그 둘은 단지 동일한 것의 두 극에 적용되는 용어들일 뿐이다. 척도의 어떤 지점에서 시작하든, 우리는 척도를 올라감에 따라 “더 많은 사랑” 또는 “더 적은 미움”을 발견하며, 이 척도를 내려감에 따라 “더 많은 미움” 또는 “더 적은 사랑”을 발견한다. 이는 우리가 시작하는 지점이 높든 낮든 상관없이 그러하다. 사랑과 미움에는 등급들이 있으며, “좋아함과 싫어함”이 너무 희미해져서 그들 사이를 구별하기 어려운 중간 지점이 있다. 용기와 두려움도 같은 규칙 아래에 들어온다. 반대의 쌍들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당신이 한 가지 것을 발견하는 곳에서, 당신은 그 반대, 즉 두 극을 발견한다.
그리고 바로 이 사실이 헤르메스주의자로 하여금, 극성화의 선들을 따라, 한 정신 상태를 다른 정신 상태로 변성시킬 수 있게 한다. 다른 부류에 속하는 것들은 서로 변성될 수 없지만, 같은 부류의 것들은 바뀔 수 있다. 즉, 그들의 극성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랑은 결코 동이나 서, 또는 빨강이나 보라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미움으로 변할 수 있고 종종 그렇게 되며, 마찬가지로 미움은 그 극성을 바꿈으로써 사랑으로 변형될 수 있다. 용기는 두려움으로 변성될 수 있으며, 그 반대도 가능하다. 단단한 것들은 부드럽게 될 수 있다. 둔한 것들은 날카롭게 된다. 뜨거운 것들은 차가워진다. 그렇게 계속되며, 변성은 항상 다른 등급의 같은 종류의 것들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두려움 많은 사람의 경우를 보자. 두려움-용기의 선을 따라 그의 정신적 진동을 높임으로써, 그는 가장 높은 등급의 용기와 두려움 없음으로 채워질 수 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게으른 사람은 단지 원하는 특질의 선들을 따라 극성화함으로써, 자신을 활동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개인으로 바꿀 수 있다.
다양한 정신 과학 학파 등이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의 정신 상태에 변화를 만들어내는 과정들에 익숙한 학생은, 이러한 많은 변화들의 기저에 있는 원리를 쉽게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단 극성의 원리가 파악되고, 정신적 변화들이 극성의 변화, 즉 동일한 척도를 따라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에 의해 야기된다는 것이 보여질 때, 후자는 쉽게 이해된다. 그 변화는 한 가지 것을 전혀 다른 다른 것으로 변성시키는 본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동일한 것들 안에서의 등급의 변화일 뿐이며, 이는 매우 중요한 차이이다. 예를 들어, 물리적 차원에서 비유를 빌리자면, 열을 날카로움, 시끄러움, 높음 등으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열은 단지 진동을 낮춤으로써 쉽게 냉기로 변성될 수 있다. 같은 방식으로 미움과 사랑은 상호 변성 가능하며, 두려움과 용기도 그러하다. 그러나 두려움은 사랑으로 변형될 수 없으며, 용기는 미움으로 변성될 수 없다. 정신 상태들은 무수한 부류들에 속하며, 그 각각의 부류는 그 반대 극들을 가지고 있으며, 그 선들을 따라 변성이 가능하다.
학생은 정신 상태들에서뿐만 아니라, 물리적 차원의 현상들에서도, 두 극이 각각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으로 분류될 수 있다는 것을 쉽게 인식할 것이다. 그리하여 사랑은 미움에 대해 긍정적이며, 용기는 두려움에 대해, 활동은 비활동에 대해 그러하다. 그리고 또한, 심지어 진동의 원리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조차도, 긍정적인 극이 부정적인 것보다 더 높은 등급인 것처럼 보이며, 쉽게 그것을 지배한다는 것이 주목될 것이다. 자연의 경향은 긍정적인 극의 지배적인 활동의 방향으로 향한다.
극성화의 기술의 작용에 의해 자기 자신의 정신 상태들의 극들을 바꾸는 것에 더하여, 그 수많은 국면들에서의 정신적 영향력의 현상은, 그 원리가 다른 사람의 마음에 대한 한 마음의 영향력의 현상들을 포용하도록 확장될 수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에 대해서는 최근 몇 년간 너무나 많은 것이 쓰이고 가르쳐졌다. 정신적 유도가 가능하다는 것, 즉 정신 상태들이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유도”에 의해 생성될 수 있다는 것이 이해될 때, 그때 우리는 어떤 진동의 속도, 또는 어떤 정신 상태의 극성화가 다른 사람에게 전달될 수 있으며, 그리하여 그 종류의 정신 상태들에서의 그의 극성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많은 “정신적 치료”의 결과들이 얻어지는 것은 바로 이 원리를 따라서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우울하고”, 멜랑콜리하며,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다. 한 정신 과학자는 자신의 훈련된 의지로 자신의 마음을 원하는 진동까지 끌어올려, 그리하여 자신의 경우에 원하는 극성화를 얻은 다음, 유도에 의해 다른 사람 안에도 유사한 정신 상태를 만들어낸다. 그 결과 진동이 올라가고, 그 사람은 부정적인 끝 대신에 척도의 긍정적인 끝을 향해 극성화되며, 그의 두려움과 다른 부정적인 감정들은 용기와 유사한 긍정적인 정신 상태들로 변성된다. 약간의 연구는 당신에게 이러한 정신적 변화들이 거의 모두 극성화의 선을 따라 이루어지며, 그 변화는 종류의 변화라기보다는 등급의 변화라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이 위대한 헤르메스 원리의 존재에 대한 지식은, 학생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정신 상태들과 다른 사람들의 그것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할 것이다. 그는 이러한 상태들이 모두 등급의 문제임을 볼 것이며, 그렇게 봄으로써, 그는 의지대로 진동을 높이거나 낮출 수 있을 것이다. 즉, 자신의 정신적 극들을 바꾸고, 그리하여 그들의 하인이나 노예가 되는 대신, 자신의 정신 상태들의 주인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지식으로, 그는 자신의 동료들을 지성적으로 도울 수 있을 것이며, 같은 것이 바람직할 때 적절한 방법들로 극성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든 학생들이 이 극성의 원리에 익숙해지기를 조언하니, 그것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많은 어려운 주제들에 빛을 던져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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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10-1. 지혜의 계보와 비교 철학
헤르메스 철학의 네 번째 대원리, “모든 것은 이중적이며, 모든 것은 양극을 가진다”는 선언은,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는 가장 근본적인 틀을 뒤흔드는, 심오하고도 혁명적인 통찰입니다. 이 ‘극성의 원리(The Principle of Polarity)’는 우리가 서로 전혀 다른 별개의 실체라고 믿었던 모든 반대되는 개념들—선과 악, 사랑과 미움, 빛과 어둠, 용기와 두려움—이 사실은 “본질적으로 동일하지만, 등급이 다를 뿐”인, 하나의 연속적인 스펙트럼의 양 극단일 뿐이라고 가르칩니다. 이 원리는 수많은 철학적 역설들을 해소하는 열쇠이자, 부정적인 것을 긍정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는 ‘정신적 연금술’의 이론적 토대가 됩니다. 이 심오한 원리는 결코 헤르메스주의만의 독창적인 발상이 아니며, 고대 그리스의 스토아 철학(Stoicism), 동양의 도가(道家) 사상, 그리고 불교 철학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위대한 지혜 전통들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그 메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스토아 철학의 관점: 덕(德)과 부덕(不德)의 연속체
『키발리온』의 극성의 원리와 가장 강력한 철학적 유사성을 보여주는 전통 중 하나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번성했던 스토아 철학입니다. 스토아학파에게, 우주는 신성한 이성, 즉 ‘로고스(Logos)’에 의해 지배되는 완벽한 질서의 체계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유일한 선(善)은, 바로 이 우주적 이성, 즉 ‘자연(Nature)’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스토아 철학은 선과 악, 혹은 덕(virtue)과 부덕(vice)을 전혀 다른 두 개의 실체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든 감정(pathos)과 행위를 하나의 거대한 연속체 위에 위치시켰습니다. 예를 들어, ‘두려움’과 ‘용기’는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스토아학파에게, 두려움은 ‘미래의 악에 대한 비이성적인 수축’이며, 용기는 ‘자연에 따라 행동하는 것에 대한 굳건한 앎’입니다. 이 둘은 ‘위험에 대한 태도’라는 동일한 척도의 양 극단에 위치합니다. 한쪽 극에는 이성을 상실한 채 공포에 떠는 비겁함이 있고, 다른 쪽 극에는 이성적 판단에 따라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를 행하는 용기가 있습니다. 그 사이에는 수많은 등급의 ‘덜한 두려움’과 ‘더한 용기’가 존재합니다.
이러한 관점은 『키발리온』이 사랑과 미움을 설명하는 방식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키발리온』은 “절대적인 사랑이나 절대적인 미움과 같은 것은 없”으며, “그 둘은 단지 동일한 것의 두 극에 적용되는 용어들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Seneca)가 그의 서한에서 분노를 ‘일시적인 광기’라고 부르며, 그것이 이성적 통제를 통해 평정심으로 되돌려질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은, 바로 이 극성 변환의 원리를 실천적으로 적용한 예입니다. 스토아 현자는 감정의 노예가 되는 대신, 자신의 이성(logos)을 사용하여 감정의 극성을 의식적으로 조절하고, 언제나 ‘평정심(apatheia)’이라는 조화로운 중간 지점에 머무르고자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헤르메스주의자가 “자신의 정신적 극들을 바꾸고, 그리하여 자신의 정신 상태들의 주인이 되”려는 목표와 정확히 같습니다.
도가 사상의 음양(陰陽): 상호 의존적인 두 극의 춤
이제 우리의 시선을 동양으로 돌리면, 우리는 도가 사상의 핵심 개념인 ‘음양(陰陽)’ 이론에서 극성의 원리에 대한 또 다른 심오한 통찰을 발견하게 됩니다. 음과 양은 우주의 모든 현상을 낳는 두 가지 근원적인 힘 또는 원리입니다. 음은 어둠, 수동성, 여성성, 차가움 등을 상징하고, 양은 빛, 능동성, 남성성, 뜨거움 등을 상징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음과 양이 결코 선과 악처럼 서로 대립하고 싸우는 두 개의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첫째, 그들은 상호 의존적입니다. 빛이 없으면 어둠을 정의할 수 없듯이, 음은 양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고, 양은 음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둘째, 그들은 상호 변환 가능합니다. 밤이 깊어지면 새벽이 오고, 여름이 정점에 이르면 가을이 시작되듯이, 음이 극에 달하면 양으로 변하고, 양이 극에 달하면 음으로 변합니다. 셋째, 그들은 서로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태극(太極)의 상징에서 볼 수 있듯이, 음의 영역 안에는 양의 씨앗(작은 흰 점)이 있고, 양의 영역 안에는 음의 씨앗(작은 검은 점)이 있습니다.
이러한 음양 사상은 『키발리온』의 극성의 원리가 가진 역동적인 측면을 완벽하게 보완해 줍니다. 『키발리온』이 주로 반대되는 개념들이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정적인 측면을 강조한다면, 도가 사상은 그 두 극이 어떻게 서로를 낳고, 서로로 변하며, 영원한 순환의 춤을 추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도가의 현인(聖人)은, 어느 한쪽 극단(예: 양, 능동성, 강함)만을 추구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을 낮추고, 부드러움을 지키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無爲) 음의 덕을 실천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모든 것을 이루는(無不爲) 경지에 이릅니다. 이것은 헤르메스주의자가 “보편적인 반대의 화해”를 통해 궁극적인 조화에 이르고자 하는 것과 그 지혜의 결이 같습니다.
불교 철학의 중도(中道): 양 극단을 떠난 깨달음의 길
불교 철학, 특히 초기 불교와 용수(Nāgārjuna)의 중관(中觀) 사상은 극성의 원리에 대해 가장 급진적이고도 해체적인 관점을 제공합니다. 붓다는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중도(中道)’, 즉 두 가지 극단적인 견해를 모두 떠난 길이라고 설파했습니다. 그 두 가지 극단이란, 모든 것이 실재한다고 믿는 ‘상주론(常見, eternalism)’과, 모든 것이 단멸한다고 믿는 ‘단멸론(斷見, nihilism)’입니다.
용수의 중관 사상은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의 뿌리 자체를 파헤칩니다. 그는 ‘연기(緣起, pratītyasamutpāda)’의 논리를 통해,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독립적인 실체(자성, 自性)가 없으며, 오직 다른 것들과의 상호 의존적인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논증했습니다. 예를 들어, ‘김(long)’이라는 개념은 ‘짧음(short)’이라는 개념에 의존해서만 성립할 수 있습니다. ‘김’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반대’라고 부르는 모든 개념의 쌍(예: 선과 악, 삶과 죽음)은, 사실 서로가 서로의 존재 조건이 되는,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실재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랑’과 ‘미움’은 동일한 척도의 양 극단일 뿐만 아니라, 그 둘 모두 독립적인 실체가 없는 ‘공(空, śūnyatā)’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이름 붙이는 특정한 정신 상태는, 수많은 원인과 조건들이 일시적으로 모여 만들어낸 현상일 뿐이며, 그 조건들이 흩어지면 ‘사랑’이라는 현상 또한 사라집니다. 따라서 진정한 지혜는, 사랑이라는 한쪽 극에 집착하거나 미움이라는 다른 쪽 극을 피하려는 노력이 아니라, 사랑과 미움이라는 개념의 쌍 자체가 공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 양 극단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키발리온』이 말하는 “모든 진리는 반쪽 진리일 뿐이다”라는 격언의 가장 심오한 해석을 제공합니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은 진리의 반쪽이며, ‘미움’이라고 믿는 것 또한 진리의 반쪽입니다. 완전한 진리는 그 둘 모두를 넘어서는 곳, 즉 모든 이원적 개념이 사라진 침묵의 영역에 있습니다. 헤르메스주의자가 극성의 변환을 통해 정신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면, 불교의 수행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극성이라는 게임의 규칙 자체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절대적인 자유, 즉 열반(Nirvāṇa)에 이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키발리온』의 ‘극성의 원리’는 인류의 가장 위대한 지혜 전통들이 공통적으로 발견했던, 실재의 이원적 구조에 대한 보편적인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스토아 철학은 그것을 이성적 통제를 통해 조화시켜야 할 내면의 스펙트럼으로 보았고, 도가 사상은 그것을 우주의 영원한 순환을 이끄는 역동적인 춤으로 보았으며, 불교 철학은 그것을 궁극적으로는 그 실체가 공(空)하여 넘어서야 할 개념의 틀로 보았습니다. 이 모든 다른 관점들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더 이상 분열되고 갈등하는 전쟁터가 아니라, 모든 반대되는 것들이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더 큰 조화 속에서 화해하고 통합되는, 신성한 연금술의 장(場)으로 바라보게 하는 위대한 지혜의 문을 열어줍니다.
해설 10-2. 현대인을 위한 가르침
헤르메스 철학의 위대함은, 그것이 단지 세계를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기술을 우리에게 제공한다는 데 있습니다. ‘극성의 원리’는 그 모든 기술 중에서도 가장 실용적이고도 강력한 도구입니다. 이 원리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모든 부정적인 정신 상태가, 사실은 우리가 도달하고자 하는 긍정적인 정신 상태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며, 단지 ‘등급’이 다를 뿐이라고 가르칩니다. 이 놀라운 통찰은, 우리가 더 이상 감정의 희생자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세계를 의식적으로 조율하고 변성시킬 수 있는 ‘정신적 연금술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의 문을 활짝 열어줍니다. 이 주해의 목표는, 바로 이 ‘극성 전환의 기술’이 어떻게 현대인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특히 두려움과 미움이라는 가장 다루기 힘든 감정을 용기와 사랑으로 변화시키는 실천적인 지혜가 될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것입니다.
정신적 연금술의 제1원칙: 모든 것은 스펙트럼이다
정신적 연금술을 시작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는 보통 ‘두려움’과 ‘용기’, ‘미움’과 ‘사랑’을 완전히 다른 별개의 감정으로 인식합니다. 그러나 극성의 원리는, 이들이 사실 ‘자신감’ 혹은 ‘관계성’이라는 하나의 동일한 감정적 스펙트럼의 양 극단에 위치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온도계를 생각해 봅시다. ‘차가움’과 ‘뜨거움’은 어디에서 나뉩니까? 절대적인 경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영하 10도는 영상 10도보다 차갑지만, 영하 30도보다는 따뜻합니다. 모든 것은 상대적인 ‘등급’의 문제일 뿐, 그 본질은 모두 ‘온도’라는 하나의 현상입니다. 우리의 감정 또한 이와 같습니다. 미움은 사랑의 완전한 부재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스펙트럼의 가장 낮은 등급, 즉 가장 차가운 상태입니다. 두려움 또한 용기의 완전한 부재가 아니라, 자신감이라는 스펙트럼의 가장 낮은 등급일 뿐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만일 미움과 사랑이 전혀 다른 실체라면, 우리는 미움을 없애기 위해 그것과 싸우거나, 그것을 피해 달아나야만 합니다. 그러나 둘이 동일한 것의 다른 등급일 뿐이라면, 우리는 더 이상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마치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추거나 온도계의 눈금을 올리듯, 우리의 정신적 진동을 미움의 극에서 사랑의 극으로 ‘이동’시키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키발리온』이 말하는, “한 정신 상태를 다른 정신 상태로 변성시키는” 기술의 핵심입니다.
두려움을 용기로 변성시키는 기술
이제 구체적인 예를 통해 이 기술을 살펴보겠습니다. 중요한 발표나 시험을 앞두고 극심한 ‘두려움’에 시달리는 한 사람이 있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의 마음은 실패에 대한 부정적인 상상으로 가득 차고, 몸은 굳어지며, 호흡은 가빠집니다. 그는 지금 자신감이라는 스펙트럼의 가장 부정적인 극, 즉 ‘두려움’의 주파수에 자신의 의식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정신적 연금술의 단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관찰과 분리 (솔베, Solve):
첫 번째 단계는, 자신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는 “나는 두려운 사람이다”가 아니라, “나는 지금 두려움이라는 감정의 진동을 경험하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이처럼 자신과 자신의 감정을 분리하여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이미 감정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그것을 다룰 수 있는 주인의 위치에 서게 됩니다.
반대 극으로의 의식적 집중:
두 번째 단계는, 의지의 힘을 사용하여 자신의 주의(attention)를 의식적으로 반대 극인 ‘용기’로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는 눈을 감고, 과거에 자신이 용감했던 순간을 최대한 생생하게 떠올립니다. 만일 그런 경험이 없다면, 자신이 존경하는 용감한 인물(역사적 위인, 영화 속 영웅 등)의 모습을 마음속에 그립니다. 그는 그 용감한 인물이 어떤 자세로 서 있고, 어떤 표정을 짓고 있으며, 어떻게 숨 쉬고 말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상상합니다. 그는 그 인물의 ‘진동수’에 자신의 내면을 ‘공명’시키려 노력합니다.
육체의 변성:
정신 상태와 육체는 ‘상응의 원리’에 따라 연결되어 있습니다. 두려움이 몸을 움츠러들게 하듯이, 용기는 몸을 펴고 확장시킵니다. 그는 의식적으로 허리를 꼿꼿이 펴고, 어깨를 활짝 열며, 깊고 안정된 호흡을 시작합니다. 그는 자신의 육체적 자세를 먼저 ‘용기’의 극으로 이동시킴으로써, 자신의 정신 상태에 영향을 미칩니다.
확언과 자기암시:
마지막으로, 그는 자신의 의지를 담은 언어를 사용합니다. 그는 “나는 두렵다”는 내면의 목소리를, “나는 이 도전을 감당할 수 있는 충분한 용기와 힘을 가지고 있다”는 새로운 선언으로 대체합니다. 이 과정을 꾸준히 반복할수록, 그의 정신적 진동수는 점차 두려움의 낮은 주파수에서 용기의 높은 주파수로 이동하게 됩니다.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지라도, 그는 더 이상 그 두려움에 압도당하지 않고, 그것을 안고서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미움을 사랑으로 변성시키는 기술
더 어렵고도 심오한 변성술은 ‘미움’을 ‘사랑’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깊은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한 미움과 원망은, 우리의 영혼을 가장 강력하게 속박하는 감옥입니다. 극성의 원리는, 이 감옥에서 탈출하는 유일한 길이, 상대방을 억지로 용서하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먼저 우리 자신의 내면의 극성을 바꾸는 데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미움의 본질 이해:
첫 번째 단계는, 미움이 사실은 왜곡된 사랑의 표현임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그토록 미워하는 이유는, 사실 우리가 그에게서 무언가(사랑, 인정, 존중)를 간절히 원했지만 얻지 못했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미움은 거절당한 사랑이 남긴 상처의 다른 이름입니다. 이처럼, 미움과 사랑이 동일한 ‘관계성’이라는 셔클 위에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 모든 것의 시작입니다.
관점의 전환:
두 번째 단계는, 주의의 초점을 상대방의 ‘행동’에서, 그 행동 이면에 있는 그의 ‘고통’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그는 왜 나에게 그런 상처를 주었을까? 그의 내면에는 어떤 두려움과 결핍이 있었을까? 이처럼 상대방을 가해자가 아닌, 그 자신 또한 자신의 내면적 고통의 희생자일 수 있다는 관점에서 바라볼 때, 우리의 격렬한 미움은 점차 ‘이해’와 ‘연민’이라는 더 부드러운 감정으로 변성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상대방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미움이라는 감옥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의식적인 선택입니다.
자비의 실천:
마지막 단계는, 이 내면의 변화를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상대방에게 직접 연락하거나 만나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내 마음속에서 조용히 그를 위해 축복을 빌어주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가 자신의 고통에서 벗어나 평화를 찾기를”이라고 기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미움이라는 낮은 진동의 에너지를, 자비와 축복이라는 가장 높은 진동의 에너지로 의식적으로 변환시킬 때, 우리는 상대방을 용서하는 것을 넘어, 우리 자신을 미움의 사슬로부터 완전히 해방시키게 됩니다.
이와 같이, 『키발리온』의 ‘극성의 원리’는 우리에게, 우리가 자신의 감정적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놀라운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외부의 자극에 의해 자동으로 결정되는 감정의 노예가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의 의지와 이해를 사용하여, 자신의 내면세계의 극성을 의식적으로 조절하고, 슬픔을 기쁨으로, 두려움을 용기로, 그리고 미움을 사랑으로 바꾸어 나갈 수 있는, 위대한 ‘정신적 연금술사’입니다. 이 기술을 꾸준히 연마하고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삶이라는 납을 진정한 행복과 자유라는 황금으로 변성시키는 유일하고도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