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진동

VIBRATION

by DrLeeHC

제9장: 진동 (VIBRATION)


“아무것도 머물러 있지 않다. 모든 것은 움직이며, 모든 것은 진동한다.” —키발리온.


위대한 세 번째 헤르메스 원리, 즉 진동의 원리는, 우주의 모든 것 안에 운동이 현현한다는 진리를 구현한다. 즉, 어떤 것도 쉬고 있지 않으며, 모든 것이 움직이고, 진동하며, 순환한다는 것이다. 이 헤르메스 원리는 그들의 체계 안에 그것을 구현했던 일부 초기 그리스 철학자들에 의해 인식되었다. 그러나 그 후, 수 세기 동안 그것은 헤르메스 학파 밖의 사상가들에게는 잊혀졌다. 그러나 19세기에 물리 과학은 그 진리를 재발견했고, 20세기의 과학적 발견들은 이 수 세기 된 헤르메스 교리의 정확성과 진실성에 대한 추가적인 증거를 더했다.


헤르메스 가르침은, 모든 것이 끊임없는 움직임과 진동 속에 있을 뿐만 아니라, 보편적 권능의 다양한 현현들 사이의 “차이점들”이 전적으로 진동의 다양한 속도와 방식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심지어 ‘전체(THE ALL)’ 그 자체도, 너무나 무한한 강도와 빠른 운동의 끊임없는 진동을 현현하여, 실질적으로는 정지해 있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교사들은 학생들의 주의를, 심지어 물리적 차원에서도 빠르게 움직이는 물체(예: 회전하는 바퀴)는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로 향하게 한다. 가르침의 취지는, 영(Spirit)이 진동의 극의 한쪽 끝에 있고, 다른 쪽 극은 어떤 극도로 거친 형태의 물질이라는 것이다. 이 두 극 사이에는 수백만, 수천만 가지의 다른 속도와 방식의 진동이 있다.


현대 과학은 우리가 물질과 에너지라고 부르는 모든 것이 단지 “진동 운동의 방식들”일 뿐임을 증명했으며, 더 진보한 일부 과학자들은 마음의 현상 또한 마찬가지로 진동이나 운동의 방식이라는 오컬티스트들의 입장으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과학이 물질과 에너지에서의 진동 문제에 관해 무엇을 말하는지 살펴보자.


우선, 과학은 모든 물질이, 어느 정도는, 온도 또는 열에서 비롯되는 진동을 현현한다고 가르친다. 어떤 물체가 차갑든 뜨겁든, 둘 다 단지 같은 것의 등급일 뿐이므로, 그것은 어떤 열 진동을 현현하며, 그런 의미에서 움직임과 진동 속에 있다. 그런 다음, 물질의 모든 입자들은 미립자에서부터 태양에 이르기까지 원형 운동을 하고 있다. 행성들은 태양 주위를 공전하며, 그들 중 다수는 자전한다. 태양들은 더 큰 중심점들 주위를 움직이며, 이것들은 다시 더 큰 것들 주위를 움직인다고 믿어지며, 그렇게 무한히 계속된다. 특정 종류의 물질을 구성하는 분자들은 서로 주위에서, 그리고 서로에 대해 끊임없는 진동과 운동 상태에 있다. 분자들은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것들 또한 마찬가지로 끊임없는 운동과 진동 상태에 있다. 원자들은 미립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때로는 “전자”, “이온” 등으로 불리는데, 이것들 또한 빠른 운동 상태에 있으며, 서로 주위를 회전하고, 매우 빠른 상태와 방식의 진동을 현현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모든 형태의 물질이, 헤르메스의 진동의 원리에 따라, 진동을 현현함을 본다.


그리고 에너지의 다양한 형태들도 그러하다. 과학은 빛, 열, 자기, 그리고 전기가 어떤 식으로든 에테르와 연결되어 있으며, 아마도 에테르로부터 발산되는 진동 운동의 형태들일 뿐이라고 가르친다. 과학은 아직 분자 인력의 원리인 응집력, 원자 인력의 원리인 화학적 친화력, 또는 (셋 중 가장 큰 신비인) 모든 물질의 입자나 덩어리가 다른 모든 입자나 덩어리에 묶이는 인력의 원리인 중력으로 알려진 현상들의 본질을 설명하려 시도하지 않는다. 이 세 가지 형태의 에너지는 아직 과학에 의해 이해되지 않았지만, 저자들은 이것들 또한 어떤 형태의 진동 에너지의 현현이라는 의견에 기우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헤르메스주의자들이 과거 수 세대 동안 견지하고 가르쳐온 사실이다.


과학에 의해 그 본질이 명확히 이해되지 않은 채 가정되는 보편적 에테르는, 헤르메스주의자들에 의해, 잘못되게 물질이라 불리는 그것의 더 높은 현현, 즉 더 높은 진동 등급의 물질일 뿐이라고 여겨지며, 그들에 의해 “에테르 물질”이라 불린다. 헤르메스 가르침은 이 에테르 물질이 극도의 희박함과 탄력성을 가지며, 보편적 공간에 스며들어, 열, 빛, 전기, 자기 등과 같은 진동 에너지의 파동들을 전달하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고 가르친다. 가르침은, 에테르 물질이 한편으로는 “물질”이라 알려진 진동 에너지의 형태들과, 다른 한편으로는 “에너지 또는 힘” 사이의 연결 고리이며, 또한 그것이 속도와 방식에 있어 전적으로 그 자신만의 진동 등급을 현현한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진동 속도를 증가시키는 효과를 보여주기 위해, 빠르게 움직이는 바퀴, 팽이, 또는 원통의 예시를 제공했다. 그 예시는 낮은 속도로 달리는 바퀴, 팽이, 또는 회전하는 원통을 가정한다. 우리는 이 회전하는 것을 예시를 따라가는 동안 “그 물체”라고 부를 것이다. 그 물체가 천천히 움직인다고 가정해 보자. 그것은 쉽게 보일 수 있지만, 그 움직임의 소리는 귀에 닿지 않는다. 속도가 점차 증가한다. 몇 분 안에 그 움직임은 너무 빨라져 깊은 으르렁거림이나 낮은 음이 들릴 수 있다. 그런 다음 속도가 증가함에 따라 음은 음계에서 하나 올라간다. 그런 다음, 움직임이 더욱 증가함에 따라, 다음으로 높은 음이 구별된다. 그런 다음, 하나씩, 음계의 모든 음들이 나타나며, 움직임이 증가함에 따라 점점 더 높아진다. 마침내 움직임이 어떤 속도에 도달했을 때, 인간의 귀에 인지될 수 있는 마지막 음에 도달하고, 날카롭고 꿰뚫는 듯한 비명은 사라지며, 침묵이 뒤따른다. 회전하는 물체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으니, 움직임의 속도가 너무 높아 인간의 귀가 그 진동을 기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오르는 열의 등급들에 대한 인식이 온다. 그런 다음 꽤 시간이 지난 후, 눈은 그 물체가 둔하고 어두운 붉은색이 되는 것을 언뜻 포착한다. 속도가 증가함에 따라, 붉은색은 더 밝아진다. 그런 다음 속도가 증가함에 따라, 붉은색은 주황색으로 녹아든다. 그런 다음 주황색은 노란색으로 녹아든다. 그런 다음, 속도가 증가함에 따라, 녹색, 파란색, 남색, 그리고 마침내 보라색의 색조들이 순차적으로 뒤따른다. 그런 다음 보라색은 사라지고, 모든 색이 사라지니, 인간의 눈이 그것들을 기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전하는 물체로부터는 보이지 않는 광선들, 즉 사진 촬영에 사용되는 광선들과, 다른 미묘한 빛의 광선들이 발산되고 있다. 그런 다음, 물체의 구성이 변함에 따라, “X선” 등으로 알려진 독특한 광선들이 현현하기 시작한다. 적절한 진동 속도에 도달했을 때, 전기와 자기가 방출된다.


물체가 어떤 진동 속도에 도달했을 때, 그 분자들은 분해되어, 그들을 구성했던 원래의 원소들 또는 원자들로 스스로를 환원한다. 그런 다음 원자들은, 진동의 원리를 따라, 그들이 구성되었던 수없이 많은 미립자들로 분리된다. 그리고 마침내, 심지어 미립자들도 사라지고, 그 물체는 에테르 물질로 구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과학은 그 예시를 더 이상 따라가기를 감히 하지 못하지만, 헤르메스주의자들은 만일 진동이 계속해서 증가한다면, 그 물체는 현현의 연속적인 상태들로 올라가, 차례로 다양한 정신적 단계들을 현현하고, 그런 다음 영을 향해 나아가, 마침내 절대적 영인 ‘전체’ 속으로 다시 들어갈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 물체”는 에테르 물질의 단계에 도달하기 훨씬 전에 “물체”이기를 멈추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그 예시는, 그것이 끊임없이 증가하는 진동의 속도와 방식의 효과를 보여주는 한, 정확하다. 위의 예시에서, “그 물체”가 빛, 열 등의 진동을 발산하는 단계들에서, 그것이 실제로 (척도에서 훨씬 더 높은) 그러한 에너지의 형태들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이 그러한 에너지의 형태들이, 경우에 따라, 그 분자, 원자, 그리고 미립자들의 속박하는 영향들로부터, 어느 정도 해방되는 진동의 등급에 도달한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이 에너지의 형태들은, 물질보다 척도에서 훨씬 더 높지만, 물질적 형태들을 통해 현현하고 사용하는 에너지들에 의해, 물질적 조합들 안에 투옥되고 속박된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물질적 형태들의 창조물들 안에 얽히고 속박되는데, 이는 어느 정도 모든 창조물들에게 해당되는 사실이며, 창조하는 힘은 그 창조물 안에 포함되게 된다.


그러나 헤르메스 가르침은 현대 과학의 그것들보다 훨씬 더 나아간다. 그들은 사상, 감정, 이성, 의지 또는 욕망, 또는 어떤 정신 상태나 조건의 모든 현현이 진동을 동반하며, 그 일부가 방출되어 “유도”에 의해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 경향이 있다고 가르친다. 이것이 “텔레파시”, 정신적 영향력, 그리고 마음이 마음에 미치는 다른 형태의 작용과 권능의 현상들을 만들어내는 원리이며, 일반 대중은 이 시기에 이러한 선들을 따라 다양한 학파, 컬트, 그리고 교사들에 의한 오컬트 지식의 광범위한 전파 덕분에 급속히 친숙해지고 있다.


모든 생각, 감정 또는 정신 상태는 그에 상응하는 진동의 속도와 방식을 가진다. 그리고 그 사람, 또는 다른 사람들의 의지의 노력에 의해, 이러한 정신 상태들은, 마치 악기가 어떤 속도로 진동하게 함으로써 음악적 음조가 재현될 수 있는 것처럼, 재현될 수 있다. 즉, 색이 같은 방식으로 재현될 수 있는 것과 같다. 정신 현상에 적용되는 진동의 원리에 대한 지식에 의해,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원하는 어떤 등급으로든 극성화시킬 수 있으며, 그리하여 자신의 정신 상태, 기분 등에 대한 완벽한 통제를 얻을 수 있다. 같은 방식으로 그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영향을 미쳐, 그들 안에 원하는 정신 상태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 요컨대, 그는 물리적 차원에서 과학이 만들어내는 것, 즉 “의지대로의 진동”을 정신적 차원에서 만들어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권능은 물론 적절한 지시, 연습, 실천 등에 의해서만 습득될 수 있으며, 그 과학은 정신적 변성술, 즉 헤르메스 기술의 한 분야이다.


우리가 말한 것에 대한 약간의 성찰은, 학생에게 진동의 원리가, 명백히 자연의 법칙들을 제쳐놓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스승들과 아뎁트들에 의해 현현되는 권능의 경이로운 현상들의 기저에 있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실제로는 단지 한 법칙을 다른 법칙에 대항하여 사용하고, 한 원리를 다른 원리들에 대항하여 사용할 뿐이며, 물질적 물체들, 또는 에너지의 형태들의 진동을 바꿈으로써 그들의 결과를 성취하며, 그리하여 보통 “기적들”이라 불리는 것을 수행한다.


옛 헤르메스 저자들 중 한 명이 진실로 말했듯이, “진동의 원리를 이해하는 자는, 힘의 왕홀을 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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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9-1. 지혜의 계보와 비교 철학


헤르메스 철학의 세 번째 대원리, “아무것도 머물러 있지 않다. 모든 것은 움직이며, 모든 것은 진동한다”는 선언은, 우리의 감각이 인지하는 안정되고 고정된 물질세계의 이면에 숨겨진, 역동적이고 살아있는 우주의 참모습을 드러내는 열쇠입니다. 이 ‘진동의 원리(The Principle of Vibration)’는, 겉보기에 서로 전혀 달라 보이는 영(Spirit)과 마음(Mind), 그리고 물질(Matter)이 사실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하나의 실체이며, 그 차이는 단지 “진동의 다양한 비율(varying rates of Vibration)”에 있을 뿐이라고 가르칩니다. 이 통찰은 서양 정신사의 가장 깊고 신비로운 전통 중 하나인 피타고라스 학파(Pythagoreanism)의 ‘우주 음악(Music of the Spheres)’ 이론과 놀라울 정도로 깊은 공명을 이룹니다. 이 두 지혜의 흐름을 함께 살펴볼 때, 우리는 우주가 무의미한 원자들의 집합이 아니라, 신성한 수학적 비율과 음악적 조화로 이루어진 하나의 거대한 교향곡임을 깨닫게 됩니다.


진동의 스펙트럼: 영에서 물질까지


『키발리온』은 존재의 모든 층위를 하나의 거대한 ‘진동의 척도(Scale of Vibrations)’ 위에 위치시킵니다. 그 척도의 한쪽 극단에는, 너무나 빠르고 강렬하여 오히려 “실질적으로는 정지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순수한 영(Pure Spirit)’, 즉 ‘전체(THE ALL)’가 있습니다. 다른 쪽 극단에는, 그 진동이 “너무 낮아 정지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가장 “거친 형태의 물질”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 두 극단 사이에는, 마음, 에너지, 그리고 더 미묘한 형태의 물질들에 해당하는 “수백만, 수천만 가지의 다양한 진동의 등급들”이 펼쳐져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혁명적인 세계관입니다. 이 관점에서, ‘영’과 ‘물질’은 더 이상 서로 적대적인 두 개의 다른 실체가 아닙니다. 그들은 마치 얼음과 수증기가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물(H₂O)이지만, 그 분자들의 진동 상태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과 같습니다. 물질은 영의 가장 낮은 진동 상태이며, 영은 물질의 가장 높은 진동 상태입니다. 따라서 이 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인 진동의 스펙트럼이 존재할 뿐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연금술의 ‘금속 변성’이라는 신비에 새로운 빛을 비추어줍니다. 비천한 납을 고귀한 황금으로 바꾸는 작업은, 사실 납의 원자적 구조를 이루는 근본적인 진동수를, 황금의 진동수와 같아질 때까지 의식적으로 높이는 기술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키발리온』이 말하는 ‘정신적 변성술’이란, 두려움이나 슬픔과 같은 낮은 진동수의 정신 상태를, 사랑과 기쁨과 같은 높은 진동수의 정신 상태로 의식적으로 전환시키는 기술입니다. 이처럼, 진동의 원리는 우주와 인간의 모든 변화와 변성의 과정을 설명하는 단 하나의 보편적인 열쇠가 됩니다.


피타고라스의 리라(Lyre): 수(數)와 우주의 조화


이러한 진동의 세계관은, 기원전 6세기경 남부 이탈리아에서 활동했던 철학자이자 수학자, 그리고 신비가였던 피타고라스(Pythagoras)의 가르침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핵심 사상은 “만물은 수(數)”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주가 무작위적인 혼돈이 아니라, 수학적인 비율과 기하학적 원리에 의해 지배되는 질서정연한 ‘코스모스(Cosmos)’, 즉 ‘조화로운 전체’라고 믿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피타고라스는 대장간을 지나다가 망치가 모루를 때리는 소리의 높낮이가 망치의 무게에 비례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통해 음악적 화음(harmony)이 단순한 정수의 비율(예: 1:2는 옥타브, 2:3은 완전 5도)로 표현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는 이 발견을 우주 전체로 확장시켰습니다. 그는 각각의 행성이 하늘을 운행할 때, 마치 리라(Lyre)의 현이 떨리며 소리를 내듯이, 각자의 고유한 진동수에 해당하는 천상의 소리를 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 행성들의 개별적인 소리들이, 그들의 거리와 속도에 따른 수학적인 비율에 따라 서로 결합하여, 인간의 귀로는 들을 수 없는 장엄하고도 완벽한 ‘우주의 음악(Music of the Spheres)’을 연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시적인 비유가 아닙니다. 피타고라스에게, 이 우주 음악은 코스모스를 지탱하는 실제적인 힘이었습니다. 모든 존재는 이 신성한 음악의 진동 속에 참여하고 있으며, 인간의 영혼 또한 그 본질상 이 우주적 조화의 일부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영혼이 병들거나 혼란스러워지는 이유는, 그 영혼의 진동이 우주의 조화로운 리듬과 불협화음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치료법은, 올바른 음악을 들려줌으로써 환자의 영혼을 다시 우주의 원래 리듬에 ‘조율(tuning)’하는 것이었습니다.


헤르메스와 피타고라스의 만남


이제 우리는 『키발리온』의 진동의 원리가 피타고라스의 우주 음악 이론과 얼마나 깊이 연결되어 있는지를 명확히 볼 수 있습니다. 피타고라스가 ‘수적 비율(numerical ratio)’이라고 불렀던 것을, 『키발리온』은 ‘진동의 비율(rate of vibration)’이라고 부를 뿐, 그 핵심적인 통찰은 동일합니다. 우주는 법칙과 조화에 의해 지배되며, 모든 현상의 차이는 근본적인 진동의 등급 차이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피타고라스가 행성들의 운행에서 우주 음악을 들었다면, 헤르메스주의자는 더 나아가 그 음악이 인간의 정신세계와 감정의 영역까지도 지배함을 발견했습니다. 『키발리온』은 “사상, 감정, 이성, 의지 또는 욕망, 또는 어떤 정신 상태나 조건의 모든 현현이 진동을 동반한다”고 말하며, 우리의 내면세계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진동의 교향곡임을 보여줍니다. 사랑은 높은 진동수의 밝은 멜로디이며, 미움은 낮은 진동수의 어두운 불협화음입니다.


그리고 이 두 전통은 모두, 인간이 이 진동을 의식적으로 통제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피타고라스 학파가 올바른 음악으로 영혼을 조율했듯이, 헤르메스주의자는 “의지의 노력”을 통해, 자신의 정신 상태를 원하는 진동의 등급으로 ‘극성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외부 환경이나 내부의 감정에 의해 수동적으로 진동하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내면 교향곡의 지휘자가 되어, 불협화음을 조화로 바꾸고, 슬픔의 단조를 기쁨의 장조로 변주하는 창조적인 예술가가 됩니다. “진동의 원리를 이해하는 자는, 힘의 왕홀을 쥔 것이다”라는 『키발리온』의 선언은, 바로 이 내면의 지휘봉을 손에 쥔 자의 권능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헤르메스의 ‘진동의 원리’는 피타고라스의 ‘우주 음악’이라는 고대의 신비로운 비전을, 현대인이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철학적, 심리적 원리로 재해석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가 차가운 물질의 감옥이 아니라, 영원한 음악이 울려 퍼지는 신성한 신전임을 가르쳐줍니다. 우리의 과업은, 우리의 귀를 세상의 소음에 닫고, 우리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이 우주적 조화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 자신의 존재라는 악기를 완벽하게 조율하여, 그 위대한 교향곡의 한 파트를 기쁘게 연주하는 것입니다.



해설 9-2. 현대인을 위한 가르침


“모든 것은 진동한다.”는 이 짧고도 강력한 헤르메스의 세 번째 원리는, 고대의 신비를 넘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자신의 내면세계를 이해하고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혁명적인 도구를 제공합니다. 이 원리는 우리 자신을 고정된 성격이나 불변하는 감정의 희생자로 보는 관점에서 벗어나, 우리를 끊임없이 변화하는 ‘에너지의 교향곡’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 모든 감정, 심지어 우리의 육체적 건강 상태마저도, 각기 다른 고유한 주파수(frequency)를 가진 ‘진동’의 한 형태입니다. 이 진리를 깊이 이해할 때,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의 기분이나 생각의 노예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 악기를 의식적으로 조율하여 원하는 삶의 멜로디를 연주할 수 있는 ‘마에스트로’가 될 수 있습니다.


주파수로서의 생각과 감정: 내면의 진동 스펙트럼


『키발리온』은 영과 물질의 차이가 단지 “진동의 다양한 비율”에 있을 뿐이라고 가르칩니다. 이 통찰은 우리의 심리적 세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의 내면 상태 또한 하나의 거대한 진동의 스펙트럼 위에 존재합니다. 그 스펙트럼의 가장 낮은 끝에는 무기력, 슬픔, 죄책감, 그리고 두려움과 같은 감정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감정들을 경험할 때, 우리는 실제로 자신의 에너지가 ‘무겁고’, ‘느리며’, ‘수축된다’고 느낍니다. 우리의 몸은 움츠러들고, 생각은 비관적으로 흐르며, 세상은 온통 잿빛으로 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낮은 주파수의 진동 상태입니다.


반대로, 스펙트럼의 가장 높은 끝에는 감사, 기쁨, 평화, 그리고 사랑과 같은 감정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감정들을 경험할 때, 우리는 자신의 에너지가 ‘가볍고’, ‘빠르며’, ‘확장된다’고 느낍니다. 우리의 가슴은 열리고, 생각은 창조적으로 변하며, 세상은 생생한 색채와 가능성으로 가득 차 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높은 주파수의 진동 상태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닙니다. 현대 과학은 ‘심박 변이도(Heart-Rate Variability, HRV)’ 연구를 통해, 인간의 심장 박동 리듬(진동)이 감정 상태에 따라 극적으로 변화한다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감사나 사랑과 같은 긍정적인 감정을 느낄 때, 심장 박동은 매우 부드럽고 일관된 사인(sine) 곡선 형태의 조화로운 리듬을 보입니다. 반면, 스트레스나 분노를 느낄 때는, 심장 박동 리듬이 매우 불규칙하고 혼란스러운 톱니 모양으로 변합니다. 우리의 심장은 말 그대로 우리 감정의 주파수에 맞춰 다른 음악을 연주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모든 생각과 감정은 그에 상응하는 고유한 에너지 주파수를 가지며, 이 주파수는 우리의 신체적 건강과 우리가 외부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정신적 조율의 기술: 의식적인 진동 조절


우리가 자신의 현재 진동 상태를 바꿀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정신적 변성술’의 핵심입니다. 『키발리온』은 “사람의 의지의 노력에 의해, 이러한 정신 상태들은 재현될 수 있다”고 말하며, 우리에게 이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내면의 주파수를 의식적으로 조율할 수 있습니까?


첫 번째 기술은 바로 『키발리온』의 네 번째 원리인 ‘극성의 원리(The Principle of Polarity)’를 활용하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두려움과 용기가 서로 다른 두 개의 감정이 아니라, ‘자신감’이라는 동일한 척도의 양 극단일 뿐이라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우리가 두려움이라는 낮은 진동 상태에 빠져 있을 때, 그것을 억지로 억누르거나 부정하는 대신, 우리는 의식적으로 우리의 주의(attention)를 그 반대 극인 ‘용기’로 옮길 수 있습니다. 과거에 내가 용감했던 순간을 떠올리거나, 용감한 인물의 이야기를 읽거나, 심지어 용기 있는 자세를 취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정신적 진동수는 두려움의 극에서 용기의 극으로 서서히 이동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라디오 다이얼을 돌려 시끄러운 채널에서 조용한 채널로 주파수를 맞추는 것과 같습니다.


두 번째 기술은 ‘감사’의 실천입니다. 감사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진동수의 감정 중 하나이며, 우리의 의식을 결핍의 상태에서 풍요의 상태로 즉시 전환시키는 가장 강력한 ‘정신적 연금술’입니다. 우리의 삶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게 느껴질지라도, 우리가 의식적으로 감사할 것을 찾아낼 때(예: 건강한 몸, 마실 물 한 잔, 친구의 따뜻한 말 한마디), 우리의 마음은 즉시 ‘없는 것’에 대한 불평에서 ‘있는 것’에 대한 감사로 그 초점을 옮기게 됩니다. 이 감사라는 높은 주파수의 진동은, 마치 강력한 자석처럼, 우리의 삶에 감사할 일을 더 많이 끌어당기는 ‘원인과 결과의 법칙’을 작동시킵니다.


세 번째 기술은 우리 주변의 ‘외부적 진동’을 의식적으로 선택하고 활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유한 진동을 가진 독립된 존재인 동시에, 주변 환경의 진동에 끊임없이 영향을 받는 공명체입니다. 슬픈 영화를 보면 슬퍼지고, 즐거운 음악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이 원리를 이해하는 자는, 자신의 내면 상태를 바꾸기 위해 외부 환경을 현명하게 사용합니다.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는 시끄러운 뉴스를 끄고, 조용하고 평화로운 클래식 음악을 듣습니다. 기운이 없을 때는, 어둡고 폐쇄된 공간을 벗어나 햇살과 맑은 공기가 가득한 자연 속을 걷습니다. 또한, 늘 불평하고 비난하는 낮은 진동수의 사람들을 멀리하고, 긍정적이고 지지해주는 높은 진동수의 사람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에너지에 자신을 ‘공명(resonance)’시킵니다.


유도와 책임: 파급 효과


『키발리온』은 우리의 정신적 진동이 단지 우리 자신에게만 머무르지 않고, 외부로 “방출되어 ‘유도’에 의해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우리의 내면 상태가 결코 사적인 문제가 아니며, 우리 주변 세계에 대한 깊은 윤리적 책임을 수반함을 의미합니다.


한 사람이 품고 있는 해결되지 않은 분노와 원망의 진동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의 가족과 직장의 동료들에게 끊임없이 불안과 긴장감이라는 ‘정신적 독소’를 퍼뜨립니다. 반면, 한 사람이 내면의 깊은 평화와 자비의 상태를 유지할 때, 그의 존재 자체는 주변 사람들의 격한 감정을 진정시키고, 그들의 마음속에 조화와 안정을 불러일으키는 치유의 힘이 됩니다. 그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도, 자신의 높은 진동수만으로 주변 세계를 변성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동의 원리’는 현대인에게 자신의 행복과 운명의 열쇠가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있음을 가르쳐주는 가장 위대한 복음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외부 환경이나 타인의 행동, 혹은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의 희생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각과 감정, 그리고 의지의 초점을 의식적으로 조절함으로써, 우리 존재의 근본적인 진동수를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진 ‘내면 우주의 지휘자’입니다. “진동의 원리를 이해하는 자는, 힘의 왕홀을 쥔 것이다”라는 고대의 선언은, 바로 이 자기-숙달의 권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왕홀을 손에 쥐고, 자신의 삶이라는 교향곡을 슬픔의 장송곡이 아닌 기쁨의 환희송으로 연주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위대한 예술이자 책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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