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리듬

RHYTHM

by DrLeeHC

제11장: 리듬 (RHYTHM)


“모든 것은 흘러나간다, 들어왔다가. 모든 것은 자신의 주기를 가지며, 모든 것은 오르고 내린다. 추의 흔들림은 모든 것에 나타나며, 오른쪽으로 흔들린 만큼이 왼쪽으로 흔들린 만큼이다. 리듬은 보상한다.” —키발리온.


위대한 다섯 번째 헤르메스 원리, 즉 리듬의 원리는, 모든 것 안에 측정된 운동, 즉 앞뒤로의 움직임, 흐름과 유입, 앞으로와 뒤로의 흔들림, 추와 같은 운동, 조수와 같은 썰물과 밀물, 만조와 간조가, 물리적, 정신적 또는 영적 차원들 위에서 현현하는 두 극 사이에서 나타난다는 진리를 구현한다. 리듬의 원리는 이전 장에서 설명된 극성의 원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리듬은 극성의 원리에 의해 확립된 두 극 사이에서 현현한다. 그러나 이것은 리듬의 추가 극단의 극들까지 흔들린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으니, 이는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실, 대부분의 경우에 극단의 극적 반대를 확립하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그 흔들림은 언제나 먼저 한쪽 극을 “향하고”, 그 다음에는 다른 쪽 극을 향한다.


우주의 모든 공기와 현상들 속에는 항상 작용과 반작용, 전진과 후퇴, 오름과 내림이 현현한다. 태양, 세계, 인간, 동물, 식물, 광물, 힘들, 에너지, 마음과 물질, 그렇다, 심지어 영까지도 이 원리를 현현한다. 이 원리는 세계의 창조와 파괴에서, 국가의 흥망성쇠에서, 모든 것의 생활사에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의 정신 상태에서 현현한다.


영의 현현, 즉 ‘전체’의 현현에서 시작하여, 언제나 쏟아냄과 끌어들임, 즉 브라만 교도들이 말하는 “브라흐만의 날숨과 들숨”이 있음을 주목하게 될 것이다. 우주들은 창조되고, 그들의 극단적인 낮은 물질성의 지점에 도달한 다음, 그들의 상승 흔들림을 시작한다. 태양들은 생겨나고, 그런 다음 그들의 힘의 정점에 도달하면, 퇴보의 과정이 시작되며, 영겁의 세월 후에 그들은 물질의 죽은 덩어리가 되어, 그들의 내적 에너지들을 다시 활동 속으로 시작시키는 또 다른 충동을 기다리며, 새로운 태양의 생명 주기가 시작된다. 그리고 모든 세계들도 그러하니, 그것들은 태어나고, 자라나며, 죽고, 단지 다시 태어날 뿐이다. 그리고 형태와 모양을 가진 모든 것들도 그러하니, 그것들은 작용에서 반작용으로, 탄생에서 죽음으로, 활동에서 비활동으로 흔들리고, 그런 다음 다시 돌아온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도 그러하니, 그것들은 태어나고, 자라나며, 죽고, 그런 다음 다시 태어난다. 모든 위대한 운동, 철학, 신조, 유행, 정부, 국가, 그리고 그 밖의 모든 것도 그러하니, 탄생, 성장, 성숙, 쇠퇴, 죽음, 그리고 새로운 탄생이다. 추의 흔들림은 언제나 명백하다.


밤은 낮을 따르고, 낮은 밤을 따른다. 추는 여름에서 겨울로 흔들리고, 그런 다음 다시 돌아온다. 미립자, 원자, 분자, 그리고 모든 물질의 덩어리들은 그들의 본성의 원 주위를 흔들린다. 절대적인 휴식이나 움직임의 중단과 같은 것은 없으며, 모든 움직임은 리듬에 참여한다. 이 원리는 보편적으로 적용된다. 그것은 생명의 수많은 차원들 중 어느 것의 어떤 질문이나 현상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것은 인간 활동의 모든 국면에 적용될 수 있다. 항상 한 극에서 다른 극으로의 리듬감 있는 흔들림이 있다. 보편적인 추는 언제나 움직임 속에 있다. 생명의 조수는 법칙에 따라 들어오고 나간다.


리듬의 원리는 현대 과학에 의해 잘 이해되고 있으며, 물질적인 것들에 적용될 때 보편적인 법칙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헤르메스주의자들은 그 원리를 훨씬 더 나아가게 하며, 그 현현과 영향력이 인간의 정신 활동에까지 미치고, 그것이 우리가 우리 자신 안에서 알아차리는 당혹스러운 기분, 감정, 그리고 다른 짜증 나고 혼란스러운 변화들의 연속을 설명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헤르메스주의자들은 이 원리의 작용들을 연구함으로써, 변성술에 의해 그 활동들 중 일부를 피하는 법을 배웠다.


헤르메스 스승들은 오래전에, 리듬의 원리가 불변하며 정신 현상에서 언제나 명백하지만, 정신 현상에 관한 한 그것의 현현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의식의 두 가지 일반적인 차원, 즉 낮은 차원과 높은 차원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으며, 이 사실을 이해함으로써 그들은 더 높은 차원으로 상승하여, 낮은 차원에서 현현하는 리듬감 있는 추의 흔들림을 피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추의 흔들림은 무의식적 차원에서 일어났고, 의식은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것을 그들은 중화의 법칙이라 부른다. 그 작용은 에고를 정신 활동의 무의식적 차원의 진동들 위로 끌어올리는 것으로 구성되며, 그리하여 추의 부정적인 흔들림이 의식 속에서 현현하지 않고, 따라서 그들은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것 위로 올라가서 그것이 당신 아래로 지나가게 하는 것과 유사하다. 헤르메스 스승, 또는 진보한 학생은, 자신이 원하는 극에 자신을 극성화시키고, 역행하는 흔들림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는” 것과 유사한 과정에 의해, 또는 당신이 선호한다면, 그것이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부인”함으로써, 자신의 극성화된 위치에 굳건히 서서, 정신적인 추가 무의식적 차원을 따라 다시 흔들리도록 허용한다. 어느 정도의 자기-숙달을 성취한 모든 개인들은, 다소 무의식적으로, 이것을 성취하며, 자신들의 기분과 부정적인 정신 상태가 자신들에게 영향을 미치도록 허용하지 않기를 거부함으로써, 중화의 법칙을 적용한다. 그러나 스승은, 이것을 훨씬 더 높은 숙련도로 끌어올리며, 그의 의지의 사용으로, 정신적인 기분과 감정의 추에 의해 앞뒤로 흔들리는 것을 허용하는 대중들이 믿기 거의 불가능한 정도의 평정과 정신적 견고함을 성취한다.


이것의 중요성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얼마나 기분, 감정, 그리고 정서의 피조물인지, 그리고 그들이 자신에 대해 얼마나 적은 숙달을 현현하는지를 깨닫는 어떤 생각하는 사람에게든 높이 평가될 것이다. 만일 당신이 멈추어 잠시 생각해 본다면, 당신은 이 리듬의 흔들림들이 당신의 삶에서 당신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는지를 깨달을 것이다. 즉, 열정의 시기가 변함없이 반대의 감정과 우울의 기분에 의해 뒤따라왔다는 것을. 마찬가지로, 당신의 용기의 기분과 시기들은 동등한 두려움의 기분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그러했으니, 감정의 조수는 언제나 그들과 함께 오르고 내렸지만, 그들은 그 정신 현상의 원인이나 이유를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이 원리의 작용들을 이해하는 것은 사람에게 이러한 리듬감 있는 감정의 흔들림들을 숙달하는 열쇠를 줄 것이며, 그로 하여금 자신을 더 잘 알고 이러한 유입과 유출에 의해 휩쓸려 가지 않도록 할 것이다. 의지는 이 원리의 의식적인 현현보다 우월하지만, 그 원리 자체는 결코 파괴될 수 없다. 우리는 그 효과를 피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원리는 작동한다. 비록 우리가 그것과 함께 휩쓸려 가는 것을 피할 수 있을지라도, 추는 언제나 흔들린다.


이 리듬의 원리의 작용에는 우리가 이 지점에서 말하고자 하는 다른 특징들이 있다. 그 작용 속으로 보상의 법칙으로 알려진 것이 들어온다. “보상하다(Compensate)”라는 단어의 정의나 의미 중 하나는, “균형을 맞추다”이며, 이는 헤르메스주의자들이 그 용어를 사용하는 의미이다. 『키발리온』이 “오른쪽으로 흔들린 만큼이 왼쪽으로 흔들린 만큼이다. 리듬은 보상한다”고 말할 때 참조하는 것은 바로 이 보상의 법칙이다.


보상의 법칙은, 한 방향으로의 흔들림이 반대 방향으로, 또는 반대 극으로의 흔들림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가 다른 하나의 균형을 맞추거나, 상쇄한다는 것이다. 물리적 차원에서 우리는 이 법칙의 많은 예들을 본다. 시계의 추는 오른쪽으로 일정한 거리를 흔들리고, 그런 다음 왼쪽으로 동등한 거리를 흔들린다. 계절들도 같은 방식으로 서로 균형을 맞춘다. 조수도 같은 법칙을 따른다. 그리고 같은 법칙이 리듬의 모든 현상들에서 현현한다. 한 방향으로 짧게 흔들리는 추는 다른 방향으로도 짧게 흔들릴 뿐이며, 오른쪽으로 길게 흔들리는 것은 변함없이 왼쪽으로 길게 흔들리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높이까지 위로 던져진 물체는 돌아올 때 통과해야 할 동등한 거리를 가진다. 발사체가 1마일 위로 보내지는 힘은, 발사체가 돌아오는 여정에서 지구로 돌아올 때 재현된다. 이 법칙은 물리적 차원에서 일정하며, 표준 권위자들을 참조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헤르메스주의자들은 그것을 훨씬 더 나아간다. 그들은 사람의 정신 상태가 같은 법칙에 종속된다고 가르친다. 예리하게 즐기는 사람은, 예리한 고통에 종속되며, 반면 거의 고통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거의 기쁨을 느낄 수 없다. 돼지는 정신적으로 거의 고통받지 않으며, 거의 즐기지 않는다. 그는 보상받는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예리하게 즐기지만, 그들의 신경 조직과 기질이 그들로 하여금 절묘한 등급의 고통을 겪게 하는 다른 동물들이 있다. 그리고 인간도 그러하다. 낮은 등급의 즐거움과, 동등하게 낮은 등급의 고통만을 허용하는 기질들이 있는 반면, 가장 강렬한 즐거움뿐만 아니라 가장 강렬한 고통 또한 허용하는 다른 기질들이 있다. 규칙은, 각 개인 안의 고통과 쾌락에 대한 능력이 균형을 이룬다는 것이다. 보상의 법칙은 여기서 완전한 작용을 하고 있다.


그러나 헤르메스주의자들은 이 문제에 있어 훨씬 더 나아간다. 그들은 사람이 어떤 등급의 쾌락을 즐길 수 있기 전에, 그가 비례적으로, 감정의 다른 극을 향해 그만큼 멀리 흔들렸어야만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들은, 이 문제에 있어 부정이 긍정에 선행한다고 주장한다. 즉, 어떤 등급의 쾌락을 경험함에 있어, 그가 상응하는 등급의 고통으로 그것에 대해 “값을 치러야” 할 것이라는 결론이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 쾌락은, 보상의 법칙에 따라, 현재의 삶에서든, 혹은 이전의 화신에서든, 이전에 경험했던 고통의 등급에 대한 리듬감 있는 흔들림이다. 이것은 고통의 문제에 새로운 빛을 던져준다.


헤르메스주의자들은 생명의 사슬을 연속적인 것으로 여기며, 개인의 한 생명의 일부를 형성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리듬감 있는 흔들림은 이런 식으로 이해되며, 반면 환생의 진리가 인정되지 않는 한 그것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헤르메스주의자들은 스승 또는 진보한 학생이, 상당한 정도로, 이전에 언급된 중화의 과정을 통해, 고통을 향한 흔들림을 피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에고의 더 높은 차원 위로 상승함으로써, 더 낮은 차원 위에 거주하는 자들에게 오는 경험의 많은 부분이 회피되고 탈출된다.


보상의 법칙은 남성과 여성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자신이 소유하거나 부족한 어떤 것에 대해 “값을 치른다”는 것이 주목될 것이다. 만일 그가 한 가지를 가지고 있다면, 그는 다른 하나가 부족하다. 균형이 잡힌다. 아무도 “자신의 동전을 가지면서 동시에 케이크 조각을 가질” 수는 없다. 모든 것에는 즐거운 면과 불쾌한 면이 있다. 사람이 얻는 것들은 항상 사람이 잃는 것들에 의해 값이 치러진다. 부자는 가난한 자가 부족한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는 반면, 가난한 자는 종종 부자의 손이 닿지 않는 것들을 소유하고 있다. 백만장자는 잔치를 벌일 성향과, 식탁의 모든 진미와 사치품을 확보할 부를 가지고 있을지 모르나, 그는 같은 것을 즐길 식욕이 부족하다. 그는 백만장자의 부와 성향이 부족하고, 그의 소박한 음식에서 백만장자가 심지어 그의 식욕이 상하지 않았거나 그의 소화가 망가지지 않았더라도 얻을 수 있었던 것보다 더 많은 즐거움을 얻는 노동자의 식욕과 소화를 부러워한다. 왜냐하면 필요, 습관, 그리고 성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삶을 통해 그러하다. 보상의 법칙은 언제나 작동하며, 균형을 맞추고 상쇄하려 노력하며, 항상 시간이 지나면 성공한다. 비록 리듬의 추의 귀환 흔들림에 여러 생이 요구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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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11-1. 지혜의 계보와 비교 철학


헤르메스 철학의 다섯 번째 원리, “모든 것은 흘러나간다, 들어왔다가. 모든 것은 자신의 주기를 가지며, 모든 것은 오르고 내린다. 추의 흔들림은 모든 것에 나타나며, 오른쪽으로 흔들린 만큼이 왼쪽으로 흔들린 만큼이다. 리듬은 보상한다”는,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현상의 기저에 있는 영원한 순환과 진동의 법칙을 드러내는 심오한 통찰입니다. 이 ‘리듬의 원리(The Principle of Rhythm)’는, 앞서 다룬 ‘극성의 원리’가 정적인 상태의 이원성을 설명했다면, 그 두 극 사이를 오가는 동적인 움직임 그 자체를 설명하는 법칙입니다. 『키발리온』에 따르면, 이 우주 안에서 정지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것은 마치 거대한 추(pendulum)처럼, 혹은 바다의 조수처럼, 상승과 하강, 전진과 후퇴, 창조와 파괴의 영원한 리듬을 반복합니다.


이러한 순환적 세계관은 결코 헤르메스주의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류의 가장 오래되고 보편적인 지혜 중 하나로서, 특히 동양 철학의 정수인 도가(道家)의 음양(陰陽) 사상 속에서 가장 정교하고도 아름다운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또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상과 인도의 힌두 철학 속에서도 이 위대한 리듬의 메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주해의 목표는, 『키발리온』의 리듬의 원리를 이 동서양의 위대한 지혜 전통들과 비교 분석함으로써, 그 보편적인 진실성과 심오한 의미를 다층적으로 탐구하는 것입니다.


음양(陰陽)의 춤: 도가(道家) 사상과의 공명


『키발리온』의 리듬의 원리와 가장 깊은 철학적 친연성을 보여주는 것은 바로 노자(老子)와 장자(莊子)로 대표되는 도가 사상의 핵심, 음양 이론입니다. 음(陰)과 양(陽)은 우주를 구성하는 두 가지 근원적인 힘으로, 각각 어둠과 빛, 수동성과 능동성, 여성성과 남성성, 수축과 팽창을 상징합니다. 『키발리온』의 ‘극성의 원리’가 바로 이 음양의 개념과 상응합니다.


그러나 도가 사상의 진정한 깊이는, 이 두 힘이 어떻게 ‘리듬의 원리’에 따라 영원한 춤을 추는지를 설명하는 데 있습니다. 『주역(周易)』의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 즉 “한 번 음하고 한 번 양하는 것을 일러 도(道)라 한다”는 구절은 이 원리를 완벽하게 요약합니다. 도(道), 즉 우주의 근본적인 길은, 음이나 양 어느 한쪽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이 둘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는 리듬감 있는 움직임 그 자체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키발리온』의 “추의 흔들림은 모든 것에 나타나며, 오른쪽으로 흔들린 만큼이 왼쪽으로 흔들린 만큼이다. 리듬은 보상한다”는 가르침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도가 사상 또한, 양(陽)의 기운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음(陰)의 기운이 생겨나고, 음의 기운이 극에 달하면 다시 양의 기운이 시작된다고 가르칩니다. 여름이 가장 더울 때 가을의 서늘함이 잉태되고, 겨울이 가장 추울 때 봄의 따스함이 싹트는 자연의 이치가 바로 이것입니다. 국가의 흥망성쇠, 개인의 성공과 실패, 그리고 우리 마음의 기쁨과 슬픔 또한 모두 이 거대한 음양의 리듬을 따릅니다.


도가의 현인(聖人)은 바로 이 리듬의 법칙을 체득한 사람입니다. 그는 성공(양)에 도취하여 교만해지지 않으며, 실패(음)에 빠져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는 모든 상승 뒤에는 반드시 하강이 있고, 모든 하강 뒤에는 반드시 새로운 상승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을 낮추고(음), 비우며(음), 부드러움을(음) 지킴으로써, 역설적으로 가장 강하고(양) 지속적인 힘을 얻습니다. 이것은 『키발리온』의 현자가 리듬의 부정적인 흔들림을 ‘중화의 법칙’을 통해 극복하고, 자신의 의식을 높은 차원에 고정시켜 평정을 유지하는 기술과 그 본질이 같습니다.


만물은 유전(流轉)한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불의 강


서양 철학의 역사 속에서도 이 리듬의 원리에 대한 깊은 통찰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는 유명한 말로, 이 세상에 고정된 실체란 없으며,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흐르는 과정 속에 있음을 설파했습니다. 그에게 우주의 근본적인 실체는 ‘불(Fire)’이었으며, 이 불은 “척도에 따라 타오르고, 척도에 따라 꺼지는” 영원한 순환의 과정 그 자체였습니다.


이는 『키발리온』이 “아무것도 머물러 있지 않다. 모든 것은 움직이며, 모든 것은 진동한다”고 말하는 ‘진동의 원리’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며, 그 진동이 만들어내는 주기적인 패턴이 바로 ‘리듬의 원리’입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또한 “위로 가는 길과 아래로 가는 길은 하나이며 같다”고 말하며, 상승과 하강이 분리된 두 개의 길이 아니라, 동일한 순환 과정의 두 가지 다른 국면임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이는 리듬의 추가 오른쪽으로 흔들리는 움직임과 왼쪽으로 흔들리는 움직임이 결국 하나의 동일한 운동인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끊임없는 흐름과 변화 속에 있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통찰은, 리듬의 원리가 지닌 역동적이고 과정적인 측면을 가장 잘 보여주는 서양 철학의 고전적인 예시입니다.


창조, 유지, 파괴의 순환: 힌두 철학의 삼신(三神)


인도의 힌두 철학은 우주의 순환적 리듬을 ‘브라흐마(Brahma)’, ‘비슈누(Vishnu)’, ‘시바(Shiva)’라는 세 신의 역할을 통해 신화적으로 묘사합니다. 브라흐마는 우주를 ‘창조’하는 신이며, 이는 리듬의 추가 한쪽 극단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하는 상승의 단계에 해당합니다. 비슈누는 창조된 우주를 ‘유지’하고 보존하는 신이며, 이는 추가 그 정점에서 잠시 머무르며 그 힘을 발휘하는 단계와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시바는 낡고 수명이 다한 우주를 ‘파괴’하여 새로운 창조를 위한 공간을 마련하는 신이며, 이는 추가 반대편 극단을 향해 움직이는 하강의 단계에 해당합니다.


이 세 신의 역할은 결코 끝나지 않습니다. 시바의 파괴는 곧 브라흐마의 새로운 창조를 위한 전제 조건이며, 이 창조-유지-파괴의 거대한 순환, 즉 ‘칼파(kalpa)’라는 우주적 시대의 리듬은 영원히 반복됩니다. 이것은 『키발리온』이 “세계의 창조와 파괴”, “국가의 흥망성쇠”, 그리고 “모든 것의 삶”에서 리듬의 원리가 현현한다고 말한 것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힌두 철학은 이 우주적 리듬을 ‘신의 놀이(Lila)’라고 부르며, 개인이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 모든 변화의 드라마를 신의 놀이로 관조하며, 그 어떤 결과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임을 가르칩니다. 이는 리듬의 흔들림에 휩쓸리지 않고 평정을 유지하려는 헤르메스주의자의 목표와 그 궁극적인 지향점이 같습니다.


이상에서 살펴 본, 『키발리온』의 ‘리듬의 원리’는 동서고금의 위대한 지혜들이 공통적으로 발견했던, 우주의 근본적인 작동 방식에 대한 보편적인 진리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삶이란 단 한 번의 오르막이나 내리막이 아니라, 상승과 하강,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가 영원히 반복되는 거대한 파도와 같음을 가르쳐줍니다. 이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파도의 작은 움직임에 일희일비하며 에너지를 소모하지만, 진정한 현자는 그 모든 파도가 결국 하나의 거대한 바다의 일부임을 압니다. 그는 다가오는 파도를 거부하지 않고, 떠나가는 파도에 미련을 두지 않으며, 모든 리듬의 움직임 속에서 춤추는 법을 배웁니다. 이 우주적 리듬과 하나가 되어 춤을 출 때, 비로소 우리는 모든 변화를 넘어선 영원한 평온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해설 11-2. 현대인을 위한 가르침


“모든 것은 들어왔다가, 흘러나간다. 모든 것은 오르고 내린다.” 헤르메스의 다섯 번째 원리인 ‘리듬의 원리’는, 우리의 삶이 결코 평탄한 직선 도로가 아니라, 끊임없는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는 거대한 파도와 같음을 가르쳐줍니다. 우리의 기분, 건강, 재정 상태, 인간관계, 나아가 사회와 역사의 흐름까지, 이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예외 없이 이 ‘추의 흔들림’ 법칙의 지배를 받습니다. 즐거움이 있으면 괴로움이 따르고, 성공의 정점이 있으면 쇠퇴의 시작이 있으며,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습니다.


이 법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 리듬의 파도에 속수무책으로 휩쓸려 다니는 조각배와 같습니다. 그는 파도가 정점에 이를 때(성공, 기쁨)는 환호하며 교만에 빠지고, 파도가 바닥으로 떨어질 때(실패, 슬픔)는 절망하며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립니다. 그의 삶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외부적인 조건의 흔들림에 따라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예측 불가능하고 고통스러운 여정이 됩니다. 그러나 『키발리온』은 우리에게, 이 피할 수 없는 리듬의 법칙을 무효화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사용’하고 그 효과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있음을 약속합니다. 그것이 바로 헤르메스주의자들이 ‘중화의 법칙(The Law of Neutralization)’이라 부르는, 가장 위대한 정신적 연금술의 기술입니다.


중화의 법칙: 추의 흔들림을 넘어서


‘중화의 법칙’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리듬의 추가 흔들리는 것을 멈추게 하는 기술이 아닙니다. 그것은 추가 계속해서 흔들리도록 내버려 두되, 나 자신은 그 추의 움직임에 함께 휩쓸려 가지 않고, 흔들림의 중심점, 즉 움직이지 않는 지점에 머무르는 기술입니다. 저자들은 이 과정을 “에고를 정신 활동의 무의식적 차원의 진동들 위로 끌어올리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비행기를 타고 폭풍우를 통과하는 경험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비행기가 낮은 고도(무의식적 차원)를 날고 있을 때, 그것은 난기류에 의해 격렬하게 흔들리며, 승객들은 공포와 불안에 떱니다. 그러나 숙련된 조종사는 고도를 높여, 폭풍우가 몰아치는 구름층 위(의식적 차원)로 올라갑니다. 그 순간, 비행기 아래에서는 여전히 번개가 치고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지만, 비행기 자체는 놀라울 정도로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에 도달합니다. 조종사는 폭풍우를 없앤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으로 ‘상승’함으로써 그것의 영향을 ‘중화’시킨 것입니다.


중화의 법칙 또한 이와 같습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감정과 기분은, 낮은 차원에서 작동하는 정신적 추의 흔들림에 의해 좌우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 우리의 ‘자아(Ego)’를 이 감정의 차원보다 더 높은 ‘정신적 차원’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그 흔들림에 영향을 받지 않게 됩니다. 슬픔이나 분노의 감정은 여전히 내면의 낮은 차원에서 일어나지만, 높은 차원에 있는 나의 ‘의식’은 그것을 그저 지나가는 구름처럼 평온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어떤 것 위로 올라가서 그것이 당신 아래로 지나가게 하는 것과 유사”한 과정입니다.


삶의 파도를 타는 기술: 현대적 적용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중화의 법칙’을 우리의 구체적인 삶 속에 적용하여, 리듬의 파도를 타는 현명한 서퍼가 될 수 있습니까?


감정의 리듬 다루기: 우리 대부분은 기쁨이나 열정과 같은 긍정적인 감정(추의 오른쪽 흔들림)은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고, 슬픔이나 우울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추의 왼쪽 흔들림)은 즉시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리듬의 원리는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오른쪽으로 흔들린 만큼이 왼쪽으로 흔들린 만큼이다.” 즉, 강렬한 기쁨을 경험한 후에는, 그에 상응하는 깊이의 슬픔이나 공허함이 찾아오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라는 것입니다.


이 법칙을 이해하는 현자는, 기쁨의 순간에 과도하게 흥분하여 자신을 잃지 않으며, 슬픔의 순간에도 이것이 영원하지 않으며 곧 반대 방향으로의 흔들림이 시작될 것임을 알기에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는 대신, 그것이 추의 자연스러운 흔들림임을 인정하고 관찰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를 사용하여, 그 감정에 완전히 빠져드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자신의 의식적 중심을 지킵니다. 그는 파도가 밀려올 때 맞서 싸우는 대신, 파도의 힘을 이용하여 보드 위에 서서 균형을 잡는 서퍼와 같습니다.


경제적 리듬 다루기: 우리의 재정 상태 또한 리듬의 법칙을 따릅니다. 경력의 정점을 찍는 시기가 있는가 하면, 예기치 않은 실직이나 사업의 실패로 바닥을 치는 시기도 있습니다. 이 원리를 모르는 사람은, 호황기에는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여 무리한 투자를 하거나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다가, 불황기가 닥치면 모든 것을 잃고 절망에 빠집니다.


그러나 리듬의 원리를 아는 현명한 투자자나 사업가는 다르게 행동합니다. 그는 호황의 시기에, 반드시 다가올 불황의 시기를 대비합니다. 그는 수익의 일부를 저축하고, 새로운 기술을 배우며, 자신의 사업 구조를 더욱 튼튼하게 만듭니다. 그는 성공에 도취되지 않고, 다가올 겨울을 준비하는 개미처럼 지혜롭게 행동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불황의 시기가 닥쳤을 때, 그는 준비 없이 겨울을 맞은 다른 이들이 쓰러져가는 동안, 오히려 그 위기를 새로운 기회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리듬의 법칙을 사용하여, 경제적 파도의 부정적인 영향을 ‘중화’시키는 기술입니다.


관계의 리듬 다루기: 모든 인간관계, 특히 연인이나 부부와 같은 친밀한 관계는 강렬한 리듬의 흔들림을 경험합니다. 열정적인 사랑과 합일감으로 가득 찬 밀물의 시기가 있는가 하면, 오해와 갈등, 그리고 권태로 인해 멀어지는 썰물의 시기도 있습니다. 많은 관계들이 바로 이 썰물의 시기를 견디지 못하고 파괴됩니다. 사람들은 관계의 초기에 느꼈던 강렬한 감정만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리듬의 추가 반대편으로 흔들리기 시작할 때, “사랑이 식었다”고 말하며 관계를 포기해 버립니다.


그러나 중화의 기술을 아는 사람은, 이 썰물의 시기가 관계의 끝이 아니라, 오히려 관계를 더 깊고 성숙한 차원으로 이끌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임을 이해합니다. 그는 이 시기에 상대방을 비난하거나 관계를 포기하는 대신, 자신의 의식을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립니다. 그는 뜨거운 열정이 가라앉은 자리에,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는 고요한 신뢰와, 상대방의 약점마저도 끌어안는 성숙한 연민을 채워 넣으려 노력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 두 사람은 유치한 연인들의 롤러코스터 같은 관계를 넘어, 서로의 영혼을 지지하는 평생의 동반자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보상의 법칙과 고통의 문제


『키발리온』은 리듬의 원리가 ‘보상의 법칙(The Law of Compensation)’이라는 또 다른 측면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오른쪽으로 흔들린 만큼이 왼쪽으로 흔들린 만큼이다.” 이는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에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따른다는 우주적 균형의 원리입니다. “예리하게 즐기는 사람은, 예리한 고통에 종속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헤르메스주의자들은 매우 중요한 비밀을 덧붙입니다.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즐거움은, 미래에 겪게 될 고통에 대한 ‘선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현재의 삶에서든, 혹은 이전의 화신에서든, 이전에 경험했던 고통의 등급에 대한 리듬감 있는 흔들림”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고통의 문제’에 대한 심오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은 무의미한 형벌이 아니라, 더 큰 기쁨과 성장을 위한 에너지의 축적 과정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깊이 웅크린 개구리가 가장 높이 뛸 수 있듯이, 가장 깊은 고통의 골짜기를 통과한 영혼만이 가장 높은 기쁨의 봉우리에 오를 자격을 얻게 됩니다.


그렇게 볼 때, 리듬의 원리는 우리에게 삶의 모든 부침(浮沈)을 두려움 없이 받아들이는 지혜를 가르쳐줍니다. 상승의 순간에는 겸손하게 다음 하강을 준비하고, 하강의 순간에는 희망을 가지고 다음 상승을 기다리는 것. 그리고 그 모든 흔들림의 과정 속에서도, 자신의 의식을 더 높은 차원에 고정시켜 내면의 평정을 잃지 않는 ‘중화의 기술’을 연마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운명의 파도를 타는 자유로운 영혼, 즉 헤르메스주의적 현자가 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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