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왕국의 그늘

by 이호창

제4장: 왕국의 그늘


법의 이름으로 지워진 이름들


며칠 안 가서, 아파트 게시판이랑 엘리베이터 안에 웬 공고문이 하나 떡하니 붙었지.

'테니스장 이용 수칙 변경 안내'라고 말이야.


주요 내용은 '입주민 카드'를 가진 사람만 코트를 쓸 수 있다는 거였어.


그 종이 한쪽 구석에는 쥐똥만 한 글씨로 '공동주택관리법 어쩌고' 하는 문구가 적혀 있었는데, 이제 그놈들 음모가 법이라는 딴딴한 갑옷을 입게 된 셈이었지.


왕 노릇하는 패거리들은 이제 숨길 것도 없다는 듯 아주 당당해졌어.

코트 벤치에 앉아서 보란 듯이 그 법 조항에 대해 떠들어댔다니까.


테니스의 가장 기본인 풋폴트라는 규칙도도 안 지키는 양반들이, 자기들한테 유리한 법 조항은 달달 외우고 다니는 꼴이라니…

참 가관도 아니었어.


자기들이 무슨 정의의 수호자라도 된 것처럼 행세하기 시작하더라고.


그러다, 이삿짐을 다 옮긴 박 사장이 며칠 뒤에 운동하러 나타났는데, 아니나 다를까 관리사무소 직원이 정중하게 앞을 딱 막아서는 거야.

관리소 직원이 테니스장을 찾는 일은 거의 없는데, 어쩌면 그날 그렇게 테니스 장 앞에 딱 찾아왔는지 몰라.


"죄송합니다, 박 사장님. 얼마 전부터 규정이 바뀌어서요."


그제야 모든 걸 알게 된 박 사장이랑 그 패거리들이 분노에 차서 감씨한테 달려갔지.


"이게 대체 무슨 짓거리야!

수십 년 인연이 있는데, 법 조항 하나로 사람을 이렇게 내쫓아?"


그런데 감씨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받아치더군.


"박 사장, 서운한 건 알겠지만 공은 공이고 사는 사야.

인정은 인정이고, 원칙은 원칙이지.

당신 한 명 봐주기 시작하면, 이 아파트 규칙이 뭐가 되겠나?"


하고 말이야. 교묘하게 논점을 비트는 걸 보니, 아주 선수였어.


결국, '인연'을 외치는 목소리는 감정적인 떼쓰기처럼 되어버렸고, '원칙'을 외치는 목소리가 이성적인 주장처럼 포장돼 버렸지.



승자의 공허함


그렇게 그들의 싸움은 싱겁게 끝나버렸다네.


대부분의 주민들은 늙은이들 세력 다툼에 아무 관심이 없었거든.

누가 쫓겨나든 말든 자기 집값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그 무관심, 그 침묵이 결국 왕 노릇하는 패거리들한테 승리를 안겨준 셈이지.


그날 이후로 박 사장이랑 그 패거리들은 코트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췄어.

꼭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들처럼 말이야.


왕 노릇하는 패거리들은 마침내 코트의 완벽한 주인이 되었고, 그들의 왕국에는 완전한 평화가 찾아왔지.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그 사람들 고함치는 소리에서 예전 같은 기쁨이 느껴지지가 않더라고.

원래 승리의 함성이라는 건, 상대를 굴복시켰을 때 가장 크게 울리는 법이거든.


이제 그들에게는 굴복시킬 상대가 남아있지 않았던 거야.


그러니 맨날 서로의 사소한 실수를 트집 잡거나, 누가 더 비싼 장비를 샀는지 같은 시시한 이야기들로 시간을 보냈지.


미워할 상대가 사라지니, 그들을 묶어주던 결속력도 모래알처럼 흩어지고 있었어. 그


들이 얻은 평화는, 결국 지루함과 권태의 다른 이름이었을 뿐이야.



온기 없는 평화


그 일이 있고 나서, 코트의 낡은 철문은 전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갖게 됐어.


예전에는 그냥 느슨한 울타리였다면, 이제는 안과 밖을 가르는 엄격한 국경선이 되어버린 거지.


드나들 때마다 입주민 카드를 보여야 했는데, 나 같은 늙은이야 상관없었지만, 그 작은 플라스틱 조각을 꺼내 보이는 행위가 매번 씁쓸하더라고.


이 문은 이제 누군가를 환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배척하기 위해 서 있었으니까.


가장 서글펐던 건 말이야, 떠난 사람들 흔적이 너무 빨리 지워졌다는 사실이었어.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저 벤치에서 막걸리를 마시던 박 사장의 너털웃음이며, 그 동료들의 기합 소리가, 꼭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깨끗하게 사라져 버렸지.



사람 기억이라는 게 그렇게 간사하고, 관계라는 게 또 그렇게 허망한 거였어.


나는 가끔 그 양반들이 서 있던 자리를 멍하니 보면서, 보온병에 담아온 술을 홀짝였지.


사람 온기가 사라진 자리는, 생각보다 훨씬 더 춥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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