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배수로를 파는 이단아

by 이호창

제5장: 배수로를 파는 이단아


몇 해 전, 그해 초여름의 기억


그해 장마는 유독 일찍 찾아온다는 예보가 있었지.


하늘엔 잿빛 구름이 자주 꼈고, 살갗에 끈적하게 달라붙는 공기에서는 곧 쏟아질 장마의 묵직한 흙냄새가 났어.

나는 텅 빈 코트를 바라보며, 문득 몇 해 전 그날의 일을 떠올렸다네.


아직 박 사장 패거리도, 왕 노릇하는 패거리도 모두 코트 위에서 으르렁대며 세력 다툼을 하던, 시끄럽지만 그래도 사람 냄새는 나던 그 시절의 이야기 말이야.


그때도 꼭 지금처럼 장마를 앞둔 초여름이었지.


그날 오후, 한정우는 테니스 복장이 아니라, 낡았지만 깨끗하게 빤 작업복을 입고 코트에 나타났어.


그의 손에는 라켓 대신, 손때 묻은 삽 한 자루가 들려 있었지.

그리고 뜬금없이 코트 옆에 세워 둔 삐걱거리는 낡은 리어카가를 끌고 테니스 메인 코트 문으로 들어오고 있었어.


그는 코트 양쪽에서 서로를 잡아먹을 듯 경기에 열중하던 두 패거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코트 가장자리의 배수로로 향했지.

그리고는 무거운 쇠뚜껑을 낑낑 거리며 들어 올렸어.


모두의 무관심과 하나의 호통


뚜껑이 열리는 순간, 3년간 묵은 시커먼 오물의 악취가 코트 전체로 퍼져나갔어.


양쪽 코트에서 경기를 하던 사람들이 모두 코를 막고 인상을 썼지.


한정우는 말없이 삽으로 그 썩은 흙을 퍼 올리기 시작했어.

그건 마치,


'당신들이 싸우고 있는 이 땅의 밑바닥이 이렇게 썩어가고 있으니, 함께 치우자'


라고 온몸으로 외치는 것 같았네.


하지만 그의 들리지 않는 외침을 알아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박 사장 패거리들은 자기들 경기에 방해된다는 듯 혀를 차며 자리를 피했고, 왕 노릇하는 패거리들은 더했지.


우두머리인 감씨가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와 고함을 치더군.


"이봐, 이단아 양반!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냄새나고 정신 사나워서 어디 공 치겠나?

당신 눈에는 우리가 테니스 치는 게 안 보여?

당장 그거 덮고 안 꺼져?"


그에게는 코트가 침수되는 것보다, 자기 눈앞의 경기를 방해받는 게 더 중요한 문제였던 게야.



잊혀진 영웅의 기록


한정우는 그 모욕적인 호통에도 대꾸하지 않았네.

그저 묵묵히 자신의 일을 계속했을 뿐이야.

그날부터 열흘이 넘도록, 그는 매일같이 나와 홀로 배수로를 파냈지.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언젠가 아랫마을 테니스장 영감들하고 막걸리 한잔하다가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나더군.


거기도 장마 전에 배수로를 한번 크게 치웠다는데, 회장이 회원들한테 연락을 돌리니,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삽 들고 모여들었다지.


심지어는 동네 사람도 아닌 회원들까지 차 타고 한 시간씩 걸려서 와서는,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더라고.

그렇게 다 같이 웃고 떠들면서 땀을 쏟으니, 두 시간도 채 안 돼서 일이 끝나버렸다고 하더군.


그런데 여긴 어땠어.

코트의 주인이라 자처하는 자들은 팔짱만 낀 채 구경만 하고 있고, 저 고지식한 이단아 혼자서 열흘이 넘도록 땡볕 아래서 땀을 쏟고 있었으니 말이야.


나는 벤치에 앉아, 땀이 비 오듯 쏟아져 눈도 제대로 못 뜨는 그가, 그 시커먼 흙을 리어카에 담아 나르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았네.

어림잡아도 리어카로 백 번은 족히 날랐을 엄청난 양이었지.


나는 몇 년전에 얻은 허리 디스크로 삽질할 상태가 아니었기에 그냥 그가 좋아하는 캔 맥주 몇 병을 사 준게 다였지만 말이야.


며칠 뒤, 마침내 깨끗하게 청소된 배수로 위로 장맛비가 시원하게 흘러내렸어.


코트는 물 한 방울 고이지 않고 뽀송했지만, 그 누구 하나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건네지 않았네.


그저 남들에게 관심 받으려고, '별난 짓 하는 이단아'라는 낙인만 더욱 깊어졌을 뿐이었지.


나는 텅 빈 지금의 코트를 보며, 몇 해 전 그 일을 다시 떠올린다네.


지금 저 왕 노릇하는 자들이 뽀송한 코트에서 편하게 공을 칠 수 있는 게 다 누구 덕인지, 그들은 알기나 할까.


아마 평생 모르겠지. 알거나 모르거나 내 상관할 바는 아니다만 ...


그때나 지금이나, 저 코트를 진짜 사랑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던 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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