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텅 빈 왕국

by 이호창

제6장: 텅 빈 왕국


고요해서 더욱 스산한 코트


시간이 조금 더 흐르니, 코트의 풍경은 더욱 스산해지더군.

경쟁자들이 사라진 코트는 더는 매력적인 장소가 아니었던지, 왕 노릇하는 패거리들마저 나오는 횟수가 뜸해졌어.


볕 좋은 주말 오후에도, 세 면의 코트 중 한두 면은 텅 비어 있기 일쑤였지.


공 튀는 소리가 멎은 코트에는, 이제 바람 소리와 먼 도시의 소음만이 귓가를 맴돌았다네.

그 고요함은 평화로운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죽어버린 뒤에 찾아오는 그런 적막함이었어.

아주 잘 가꾸어진 무덤, 내 눈에는 딱 그런 느낌이었지.



한 사내의 고뇌, 그리고 질문


그 적막한 코트를 꾸준히 지키는 사람은 이제 몇 남지 않았는데, 그중에는 물론 한정우 그 사내도 있었어.


그는 그날도, 저 패거리들이 실력이 모자란다고 경기에 끼워주지도 않는 김 영감하고 묵묵히 랠리를 하고 있더군.


김 영감의 공은 힘이 없어 짧거나, 방향이 틀어져 옆으로 새기 일쑤였지.

하지만 한정우는 군소리 한번 없이, 라인 한참 밖에 떨어진 공까지 달려가 어떻게든 살려내서 김 영감이 치기 좋은 곳으로 다시 넘겨주었어.

그에게 중요한 건 승패나 규칙이 아니라, 상대방이 한 번이라도 더 공을 칠 수 있게 해주는 배려였으니까.


그렇게 묵묵히 공을 받아 넘기는 그의 플레이에는, 전에는 없던 깊은 고뇌 같은 게 서려 있었지.

나는 똑똑히 봤다니까.

텅 빈 코트를 둘러보는 그의 눈빛에 담긴 그 깊은 실망감과, 이 부당하게 얻어진 평화에 대한 무언의 질문을 말이야.


그는 이 코트를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지금의 코트는 그가 사랑했던 그곳이 아니었거든.

그의 침묵은 상황에 동의한다는 뜻이 아니라, 꼭 폭발하기 직전의 화산처럼 분노를 꾹꾹 눌러 담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



겁먹은 첫걸음, 새로운 얼굴의 등장


바로 그날이었을 거야.

내가 여느 때처럼 벤치에 앉아 있고, 한정우가 김 영감의 서툰 공을 받아 넘겨주던 그 쓸쓸한 오후에 말이지.


새로운 얼굴들이 코트의 저 굳게 닫힌 철문 앞에 나타난 거야.

값싼 라켓을 어색하게 손에 든 젊은 부부하고, 누가 봐도 테니스가 처음인 듯한 어리숙한 대학생이었지.


그들은 마치 거대한 성채를 앞에 둔 순례자처럼, 안을 들여다보면서 들어올까 말까 한참을 망설이더군.

그들의 눈빛에는 설렘 반, 불안감 반이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었어.


한참을 망설이던 그 친구들은, 마침내 큰 용기를 내서 저편에 외롭게 떨어진 한 면짜리 코트로 겁먹은 첫걸음을 내디뎠어.


나는 흥미로운 연극의 시작을 직감하면서 위스키를 한 모금 넘겼지.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김 영감의 공을 받아 넘겨주려던 한정우의 움직임이 딱 멎었어.


그의 시선이, 김 영감 말고 다른 사람들을 향하고 있었던 거야.

오래된 벽을 바라보던 그의 눈빛에는 깊은 물음과 아련한 안쓰러움이 가득했네.


저들이 혹여 이 코트에서 설 자리를 잃고 외면당할까 봐.


한정우는 자신이 겪었던 에전의 서러움이 혹여 저들에게도 그림자처럼 드리워질까 봐.


이미 마음속으로 그들의 앞날을 어림짐작하고 있는 듯 보였네.


그의 눈은 그저 바라보는 것을 넘어, 타인의 작은 떨림마저 읽어내는 깊은 헤아림을 담고 있었어.


마치 차가운 비를 피할 작은 처마라도 찾아 헤매는 어린 길고양이들을 보는 마음 같았다고나 할까.


그의 침묵은 단순한 관찰이 아니라, 이미 저들을 위한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한 깊은 고민의 씨앗이 되고 있었어.

그 순간, 나는 알았지.


저 사내의 삶에, 그리고 이 코트의 흐름에, 아주 거대한 변화의 물결이 일렁일 것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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