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촛불 하나의 결심

by 이호창

제8장: 촛불 하나의 결심


마침내 방관의 벽을 넘는 한 사내


이단아 한정우.

그 역시 이 모든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두 손으로 감싸 쥔 라켓의 손잡이가 하얗게 질려 있었지.


그는 젊은이들의 뒷모습과, 다시 시끄러워진 메인 코트를 번갈아 보았어.


그의 눈 속에서 오랫동안 이어지던 고뇌가, 마침내 단단한 결심으로 바뀌는 것을 나는 보았네.

마치 오랜 가뭄 끝에 마침내 방향을 찾은 강물처럼,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한 곳을 향했지.


그가 조용히 자신의 라켓을 가방에 넣는 모습은, 단순한 행동이 아니었어.

오랜 짐을 벗어던지듯 홀가분하면서도 결연한 기운이 그에게서 뿜어져 나왔다네.

한 시대의 방관자가, 마침내 무대 위로 걸어 올라가기로 결심한 순간이었지.


나는 그 순간, 늙은 심장이 오랜만에 쿵 하고 울리는 것을 느꼈네.


얼어붙었던 마음에 따뜻한 불씨가 지펴지는 듯했지.



"제가 도와드릴까요?", 그 나지막한 목소리


한정우는 왕 노릇하는 패거리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코트의 철문을 나섰네.


그리고는 아파트 화단 길을 터덜터덜 걷고 있는 젊은이들의 앞을 막아섰지.

그들은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어.

같은 공간에 있던 사람이니, 그 역시 자신들을 비웃었을 거라 생각했겠지.


아마 저들은 방금 겪은 차가운 시선과 무시 때문에, 세상의 모든 친절마저 의심하고 있었을 게야.


상처받은 마음은 쉬이 열리지 않는 법이지.


한정우는 그들의 눈을 피하지 않고, 나지막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네.


"저기, 잠시만요.

제가 조금 도와드릴까요?"


그의 목소리에는 어떤 동정이나 과시도 담겨있지 않았어.


그저, 길을 잃은 이에게 건네는 따뜻한 손길처럼 순수한 제안이었지.


마치 오랜 시간 메마른 땅에 떨어진 한 방울의 이슬 같았다고나 할까.


그 진심이 얼어붙었던 젊은이들의 마음을 녹이는 작은 불씨처럼 느껴졌다네.




낡은 벽을 마주하고 선 새로운 시작


그는 젊은이들을 그 무서운 중압감이 덮쳐오는 코트로 다시 이끌지는 않았네.


대신, 아파트 단지 뒤편,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낡은 연습용 시멘트 벽으로 그들을 데려갔어.


그곳은 이끼가 끼고 페인트가 벗겨져,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버려진 공간이었지.


한때는 버려진 꿈들의 잔해가 쌓여 있는 곳처럼 보였지만, 이제 그곳은 새로운 희망이 싹틀 땅이 되었네.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그 벽은, 이제 세상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숨 쉴 수 있는 그들만의 비밀스러운 정원이 된 셈이지.


한정우는 젊은 부부 중 아내에게 다가가, 라켓을 쥔 그녀의 두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쳐 잡았네.


"테니스는 공을 때리는 게 아닙니다.

다리로 일단 따라가서 공과 나의 거리를 맞춘 다음에, 상대에게 정성껏 다시 밀어주는 겁니다 ."


그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그 안에는 테니스에 대한, 그리고 삶을 대하는 방식에 대한 깊은 철학이 담겨 있었지.


그것은 기술을 넘어선 가르침이었다네.


그날 오후, 텅 빈 왕국에서 쫓겨난 세 사람은 낡은 벽을 마주하고, 그들만의 작은 공화국을 세우기 위한 첫 번째 랠리를 시작했어.


벽을 때리는 공 소리는 아직 서툴렀지만, 그 소리에는 새로운 시작의 맑은 기운이 깃들어 있었지.

나는 그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며, 아주 오랜만에 맛이 좋은 위스키를 마셨다네.

그 맛은 단순한 술맛이 아니었어.


묵묵히 제 갈 길을 가는 이들의 용기와, 세상의 차가운 시선에도 굴하지 않는 순수한 열정에 대한 나의 깊은 존경과 만족감이 섞인 맛이었지.


그날의 노을은 유난히 붉었고, 코트 너머 벽에서 들려오는 공 소리는 마치 새로운 시대의 희망가처럼 내 귓가에 울렸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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