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성벽 뒤의 모의

by 이호창

제3장: 성벽 뒤의 모의


그들과 으르렁대던 또 다른 무리, '박 사장 그룹'


물론, 그 위선자들 세상이 조용할 리가 없지.


한 산에 호랑이가 두 마리 살 수는 없는 법이잖아?


이번 얘기는 꼭 그짝이었지.


코트에는 그 사람들 말고 으르렁대는 패거리가 하나 더 있었거든.


박 사장이라고 불리는 사람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무리였는데, 이 사람들 테니스는 또 파리채 패거리하고는 결이 좀 달랐다네.

화려하게 공격하기보다는, 아주 질기게 수비를 해서 상대방 진을 빼놓는 그런 스타일이었지.


그래서 이 두 패거리가 딱 마주치면, 경기가 아주 지루해지고 시끄러워지기 일쑤였어.


한쪽은 파리채 휘두르면서 네트로 달려들고, 다른 한쪽은 죽어라 공을 받아 넘기면서 서로 실수하기만 기다리고 있었으니 말이야.


만나기만 하면 서로 실력 없다고 깎아내리고, 코트 매너가 어떠니 저떠니 꼬투리 잡고, 심지어는 라커룸에서 어깨를 툭 부딪치면서 기 싸움하는 게 일상이었다니까.


꼭 어린애들 싸움 같았는데, 정작 자기들은 나라의 운명이라도 짊어진 것처럼 아주 비장했다 이 말이지.


하지만 내 눈에는 뭐, 그놈이 그놈이었어.


다들 코트를 자기네 사유물처럼 생각하고, 자기들끼리 서열 놀이하는 데 다른 사람이 끼어드는 꼴을 못 봤거든.


방법만 좀 달랐지, 코트를 독차지하려는 욕심은 둘 다 똑같았단 말이야.


그러던 차에, 한쪽 호랑이가 제 발로 산을 떠날 일이 생겼으니, 남은 호랑이가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았겠지?


그게 바로, 이 지저분한 연극의 2막이 오르는 신호탄이었던 거야.


얼음처럼 차가운 긴장감


박 사장이 곧 이사 간다는 소문이 코트에 쫙 퍼진 게, 아마 그해 늦여름 매미가 처량하게 울어댈 때쯤이었을 거야.


참 신기하게도, 그날 이후로 두 패거리 사이에 으르렁대던 게 싹 사라졌어.


마주쳐도 더는 시비를 걸지 않고, 오히려 엷은 미소까지 지어 보이면서 고개를 까딱하고 지나가더군.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걸 보고 이제 화해했나 보다 착각했을지도 몰라.

하지만 내 늙은 눈에는 그게 훨씬 더 섬뜩한 신호로 보였다니까.


원래 사자라는 놈이 말이야, 먹잇감 숨통을 끊기 바로 전에는 아무 소리도 안 내는 법이거든.


박 사장 패거리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


맨날 잡아먹을 듯이 굴던 놈들이 갑자기 친절해지니, 도대체 무슨 꿍꿍이속인지 몰라서 불안해하는 게 눈에 다 보였어.


반면에 왕 노릇하던 그자들 눈빛에는, 뭔가 못된 계략을 꾸미는 사람들한테만 보이는 그 음흉한 자신감이 번들거리고 있었네.


코트 위에는 아주 팽팽한 정적이 흘렀지.


꼭 폭풍이 오기 전 고요함 같았다고나 할까.


나는 보온병에 담아온 위스키를 한 모금 더 넘겼어.


곧 피비린내 나는 싸움 대신에, 얼음장보다 더 차가운 숙청이 시작될 게 뻔했으니까 말이야.



박 사장이 떠난다는 소문


그 소문이 코트에 쫙 퍼진 게, 아마 그해 늦여름 매미가 처량하게 울어댈 때쯤이었을 거야.


박 사장 그 양반 입에서 직접 나온 이야기였으니, 빼도 박도 못하는 사실이었지.


새로 이사 가는 집이 얼마나 넓고 좋은지, 어찌나 자랑을 해대던지…

듣는 내가 다 민망할 정도였다니까.


아마 수십 년이나 정들었던 이 코트를 떠나는 게 아쉬워서, 일부러 더 허세를 부렸던 거겠지.

그 밑에 있던 패거리들은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고, 코트 분위기도 영 어수선했어.


그때 왕 노릇하는 패거리의 우두머리인 감씨가 슬그머니 다가와서 박 사장 어깨를 툭 치데.


"아이고, 박 사장. 아쉽게 됐네. 이젠 얼굴 보기 힘들어지겠구만"


하고 말이야.


그 말에 진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니까.

내 늙은 눈에는 똑똑히 보였거든.

아쉬워하는 게 아니라, 마침내 굴러온 기회를 보고 회심의 미소를 짓는 저 여우의 교활한 눈빛을 말이야.



여우처럼 눈을 빛내는 그 패거리


며칠 뒤였나, 내가 아파트 상가 자판기 앞에서 그 패거리들이 모여 있는 걸 봤지.

담배 연기 자욱한 구석에서 저희들끼리 수군거리는데, 딱 보니 각이 나오더군.

아니나 다를까, 감씨가 낮은 목소리로 슬쩍 운을 떼더라고.


"이제 박 사장도 외부인인데, 계속 우리 코트에 나오게 둬도 되는 건가?"


하고 말이야.


그 한마디에, 다른 패거리들 눈빛이 기다렸다는 듯이 번쩍이는 걸 내가 봤어.


"원칙대로 해야지. 주민 시설은 주민이 쓰는 게 맞잖아".


"맞아, 맞아. 박 사장 하나 봐주다 보면, 나중엔 개나 소나 다 와서 자리 차지하려고 할걸".


그놈의 '원칙' 소리가 그렇게 역겹게 들릴 수가 없었어.


평생 아파트 주민들 권익 같은 건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자들이었거든.

그들에게 중요한 건 딱 하나, 자기들 세상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것 뿐이었지.


그리고 마침내, 눈엣가시 같던 마지막 경쟁자를 합법적으로 쓸어버릴 명분이 생긴 거였고 말이야.




관리사무소에서 벌어진 조용한 밀담


그 양반들, 무슨 시위대처럼 우르르 몰려가지도 않았어.


오히려 '아파트를 지극히 걱정하는 선량한 주민'의 얼굴을 하고 관리사무소에 찾아갔지.


젊은 관리과장을 앞에 딱 앉혀놓고는, 아주 점잖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을거야.


"과장님, 저희가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니고, 아파트를 너무 사랑하는 마음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외부인 출입 문제는 워낙 민감한 사안이니까, 원칙과 형평성에 맞게 처리해주셔야지요".


"이게 어디 박 사장 개인에 대한 이야기입니까? 우리 아파트 전체의 규칙에 대한 이야기지요".


강하게 요구하지는 않은 것 같아.

그저 제안하고, 걱정하고, 관리과장이 제 손으로 '올바른' 결정을 내리도록 길을 터주는 척했을테지.


젊은 과장은 얼굴에 난처한 기색을 떠올렸다 숨겼다 하면서, 아주 진땀을 뺐을 거야.

가장 골치 아픈 문제를 가장 점잖은 방법으로 들고 와서 압박하는데, 입김 센 그 양반들 앞에서 젊은 사람이 뭘 어쩔 수 있었겠어.


내가 그 자리에 있지는 않았지만, 안 봐도 비디오지. 그게 바로 가장 조용한 압박이고, 가장 효과적인 협박이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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