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낡은 코트의 오후

by 이호창


제1장: 낡은 코트의 오후



내가 앉아 있는 벤치, 그리고 세 개의 코트


이 낡은 벤치가 내 지정석이 된 지도 꽤 오래되었지.

해가 동쪽 아파트 지붕에서 솟아 서쪽 능선 너머로 질 때까지,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여기서 보낸다네.

손에는 어김없이, 따끈한 차(茶) 대신 스코틀랜드산 위스키를 담은 낡은 보온병이 들려 있지.

사람들은 늙은이가 대낮부터 술이냐고 혀를 차지만, 이건 취하려는 게 아니야.

저 코트 위에서 벌어지는 온갖 인간 군상의 맨얼굴을 지켜보려면, 이 정도의 온기는 있어야 늙은 속이 시리지 않거든.


내 앞에는 수성(壽城) 아파트의 테니스 코트 세 면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네.

세월의 때가 묻은 녹슨 철제 펜스가 사방을 두르고, 바랜 초록색 페인트 위로 '안전'이니 '수칙'이니 하는 글자들이 희미하지.


코트는 구조가 기묘해.


두 면은 사이좋게 나란히 붙어있지만, 나머지 한 면은 마치 따돌림이라도 당한 것처럼 저만치 홀로 떨어져 있지.


그래서 늘 저 두 면의 코트는 시끄럽고, 이 한 면의 코트는 대부분 고요하다네.


나는 이곳을 '수성 극장'이라 부른다네.


저 두 면짜리 코트가 화려한 조명이 쏟아지는 본무대라면, 저 외로운 한 면짜리 코트는 스포트라이트가 닿지 않는 무대 뒤편과도 같았지.


오후의 햇살이 길어질 무렵이면, 코트에서는 경쾌한 공 소리와 함께 욕망과 과시, 질투와 동경의 소리들이 뒤섞여 울려 퍼지곤 했다네.


대부분은 어제와 오늘이 다르지 않은 시시한 연극이었지만, 그해 여름부터 나는 실로 흥미로운 한 편의 긴 이야기를 목격했다네.


이 낡은 기록은 바로 그 이야기일세.



승리만을 탐하는 자들의 함성


보나마나, 저 시끄러운 본무대는 오늘도 코트의 주인 행세를 하는 그 패거리들이 차지하고 있겠지.

나이 지긋한 사내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문가용 장비로 휘감았지만, 정작 몸놀림은 폼이 나질 않는 그 능구렁이들 말일세.


그들은 자신들의 공이 라인에 아슬아슬하게 걸치면 천지가 개벽한 듯 '나이스'를 외치고, 상대의 좋은 공에는 입을 꾹 다무는 족속들이라네.


1밀리미터의 오심도 용납 못 한다는 듯이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다가도, 정작 서브를 넣는 자신의 발이 선을 한 참 넘어 밥먹듯이 풋폴트 반칙을 하는 데는 한없이 너그러웠지.


그들의 테니스에는 긴 호흡의 아름다움이란 없었어.

기본기 없는 스트로크를 만회하려는 듯, 그들은 늘 네트 앞으로 바퀴벌레처럼 몰려들었지.

그리고는 파리를 잡듯,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라켓을 휘둘러 공을 끊어냈어.


그들에게 중요한 건 과정의 품격이 아니었네.

오직 승리, 그리고 '내가 오늘 너를 이겼다'는 유치한 서열 확인뿐이었지.

그래서 저 본무대에서 들려오는 함성은, 운동이 주는 순수한 즐거움의 외침이 아니었어.


그것은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받으려는 자들의 필사적인 소음, 공허한 승리만을 탐하는 자들의 메아리에 가까웠다네.


근데 이 패거리들 사이에도 실질적인 우두머리가 있었으니, 바로 '여왕' 노릇을 하는 어떤 아줌마였어.

'국화부' 딱지를 달았다고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양반이었지.

풋폴트는 제일 심하면서, 자기 입맛대로 사람들을 골라가며 게임을 했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은 아예 끼워주지도 않더라고.


자기가 한 게임을 다 하고도 지면,

"아이고, 오늘 컨디션이 영 아니네. 복수전이야!" 라면서

또 지들끼리만 연속으로 게임을 하는 거야.


공 치는 순서도 안 지키고 말이야.

뻔뻔하기가 이를 데 없었지.


어느 날이었어.

김 영감님이라는 사람이 왔지.

테니스를 오래 치긴 했는데, 실력은 영 늘지 않아서 패거리들이 늘 무시하던 양반이었지.

그 영감님이 코트에 나가 한참을 기다리는 거야.

패거리들끼리만 몇 게임을 연달아 치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했겠어.


결국 김 영감님이 용기를 냈지.

한 게임 치려고 그 패거리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코트에 들어서려 하는데, 그 여왕 노릇 하는 국화부 아줌마가 딱 한 소리 하더군.


"김씨가 여기 낄 실력이세요? 저기 개나리하고나 치세요."


'개나리'라니...

그거 웃기는 소리 아니겠어?


여자 동호인들 실력에 따라 '국화부', 그 아래 '개나리부'로 나뉘는데, 국화는 지들끼리 '여왕'이라 부르고 개나리는 은근히 '하녀' 취급을 했거든.


근데 사실 국화나 개나리나, 내 늙은 눈엔 큰 차이도 없었어.


지들끼리 급 나누고 으스대는 게 우스웠지.


두 손으로 랠리를 짓는 기묘한 이단아


하지만 이따금, 내 술맛을 돋우는 다른 종류의 테니스를 볼 수 있는 날도 있었지.


바로 한정우라는 사내가 저 외로운 한 면짜리 코트에 모습을 드러낼 때였어.


그는 공을 때려 부수는 게 아니라, 마치 길 잃은 새를 두 손으로 받아 안아 조심스럽게 돌려보내는 몸짓으로 랠리를 시작했네.


포핸드마저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치는 기묘한 자세였어.

더 기이한 것은, 그는 결코 경기를 빨리 끝내려 하지 않았다는 점이야.

상대의 허를 찔러 점수를 따낼 수 있는 순간에도, 그의 라켓에서 나간 공은 어김없이 상대가 다음 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내어주었지.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의 경기는 늘 비겼다네.


그는 승패라는 조악한 결론 대신, 파트너와 함께 긴 호흡으로 랠리를 짓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듯 보였어.

경기를 하는 네 명 모두 충분히 즐기고 난 뒤, 아슬아슬하게 동점을 만들어, 승패를 가르지 않고 경기를 마치는 것이 그의 방식이었지.


우리 테니스 장은 시간 절약을 위해 5:5가 되면 타이브렉을 하지 않고 무승부로 처리했거든.


그래서 왕 노릇하는 능구렁이 패거리들은 그를 '이단아'라고 불렀지.

승리라는 유일신을 섬기는 그들의 교리에서, 한정우의 테니스는 신성모독과도 같았을 테니까.


하지만 내 눈에는, 오히려 저들이야말로 테니스라는 신의 이름을 팔아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사이비 교주들로 보였네만.


저 패거리들이 보이지 않는 선까지 넘나들며 큰소리 지르며 우기고, 상대에게 달려들면서까지 승리를 구걸할 때, 그는 단 한 번의 라인 시비도 없이 먼저 라인 콜을 하는 사람을 항상 존중해 줬어.

아웃이던 인이던 상대의 콜을 항상 웃으며 인정해 줬단 말이지.

거... 참...


나는 그 기묘하고 고지식한 이단아에게서, 승리가 전부가 되어버린 이 코트의 다른 미래를 보았을지도 모르겠네.


그리고 나의 예감은, 그리 오래지 않아 현실이 되기 시작했지.


김영감이 국화부 아줌씨에게 살짝 무시를 당하던 그 날이었어.

이단아 한정우는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네.


그 국화부 아줌마의 오만함과 김 영감에 대한 무시를 말이야.


그리고는 돌연 그 국화부 아줌마에게 단식 게임을 제안했어.


"국화부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단식으로 한번 겨뤄 봅시다.저기 한 면 코트가 비어 있으니 가서 한 게임 하시죠"


그의 목소리엔 묘한 긴장감이 실려 있었지.


국화부 아줌마는 예상치 못한 도전에 잠시 당황했지만, 곧 비웃으며 라켓을 들었어.


"어디 초보가 국화부한테 덤비나?" 하는 표정이었지.


근데 세상에나!

게임이 시작되자마자, 이건 뭐 게임 자체가 안 되는 거야.

한정우의 두 손 테니스는 겉보기엔 부드러워 보여도, 그 속에 날카로운 지혜가 숨어 있었거든.


그는 국화부 아줌마의 약점인 풋폴트와 파리채 발리를 역이용하며, 코트를 넓게 쓰게 하고 강한 스트로크로 밀어붙였지.


국화부 아줌마는 쩔쩔매며 연신 실수를 해댔어.


한정우는 점수 차이를 벌리며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어.


그걸 지켜보던 패거리들 사이엔 순간 정적이 흘렀지.


패거리들은 당황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봤고, 국화부 아줌마는 얼굴이 벌게져서 라켓을 거의 내던지다시피 했네.


한정우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어.


국화부 아줌마를 이기고 난 뒤, 그는 곧바로 저편에서 주눅 들어 구경하던 '개나리부' 여자분에게 다가가 단식 게임을 제안했지.


그 개나리부 아주머니는 놀란 표정으로 한정우를 바라봤어.


"저... 저는 국화가 아닌데요..."

하며 망설이더군.


한정우는 빙긋 웃으며

"상관없습니다. 테니스는 누가 더 잘 치느냐가 아니라, 누가 더 즐겁게 치느냐가 중요합니다" 라고 말했네.


근데 세상에나, 게임이 시작되자 나는 깜짝 놀랐다네.


의외로 그 개나리부 아주머니가 단식을 더 잘 치는 거야!

어설픈 것 같지만 단단한 자세로 코트를 누비며 침착하게 랠리를 이어갔지.


한정우가 최선을 다해도 간신히 타이브레이크까지 갈 정도였어.


그의 두 손 테니스가 가진 모든 기술을 다 쏟아부어야 할 정도였다네.


승패를 떠나, 코트 위에서 펼쳐지는 두 사람의 랠리는 그야말로 야릇한 긴장감이 감돌았지.


하지만 사람들은 그 개나리 여자분을 제대로 인정할 생각은 안 하는 거야.


"그래도 국화가 최고지, 개나리는 개나리야"

라며 지들끼리 수군거렸지.


무조건 '국화'가 최고라고 떠받들었어.


내 생각에 사실 '국화'라는 게 별게 아니야.

남들 가정에서 살림할 때 라켓 가방 메고 전국을 유람하며 대회 많이 참가하다 보면 웬만해선 국화 딱지를 다는 거거든.


그걸 큰 자랑이라고 어깨 올리고 다니니 원.


그렇게 말하면 전국 국화들이 다 나를 뭐라 할 테지만, 내 생각은 그래.

국화가 벼슬이 아니라네.

겸손하게 많은 초보자들이랑 어울리며 함께 즐겁게 공을 치면 그게 진짜 '인정받는 국화'인 거고, 어깨 올리고 다니면서 남들 무시하면 그건 그냥 '개국화' 되는 거야.


한정우는 그날, 코트의 진짜 실력과 가치가 무엇인지, 말없이 온몸으로 보여줬다네.


그의 작은 도전이, 코트의 오랜 위계질서를 흔들기 시작한 순간이었지.


그리고 그의 행보는, 이 위선자들의 왕국에 균열을 내는 시작이 되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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