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위선자들의 왕국

by 이호창

제2장: 위선자들의 왕국

파리채 발리와 풋폴트

그 양반들이 세운 저 위선자들의 왕국 말이야, 딱 두 개의 기둥이 버티고 있었어.


하나가 그 '파리채 발리'라는 거였고, 다른 하나는 '풋폴트'였지,


뭐. 묵직하게 스트로크를 치면서 랠리를 길게 이어가야 그게 진짜 실력인데, 그 양반들한테는 그게 없었거든.

그러니 맨날 실력 들통날까 봐 무작정 네트 앞으로 달려들었던 거야.


거기서 자기들 딴에는 비기라고 쓰는 기술이 나오는데, 그게 참 우스웠지.

라켓을 딱 세워서 공을 제대로 맞히는 게 아니라, 그냥 손목 힘으로 후려쳐서 파리 잡듯이 공을 눌러버리는 거였어.

모양새는 참 흉했지만, 우리 같은 초심자들 상대하기에는 제법 잘 먹혔다니까.


그런데 그 꼴사나운 파리채 발리를 쓰려면, 남들보다 한 발이라도 더 빨리 네트에 붙어야만 했거든.

바로 그때, 두 번째 기둥인 풋폴트가 슬그머니 등장하는 거지.


서브를 넣을 때 보면 말이야, 그 사람들 발은 어김없이 베이스라인을 넘어 코트 안쪽 깊숙이 미리 짓밟고 있었다고.


남의 공이 1밀리미터만 나가도 불같이 아웃을 외쳐대는 양반들이, 정작 자기 발이 한 걸음을 넘어 두 걸음 가까이 선을 넘는 것엔 그렇게 너그러울 수가 없었어.


결국 그 사람들 테니스는 사는 거랑 똑같았던 셈이야.

기본을 지키면서 정직하게 노력할 생각은 안 하고, 맨날 편법이나 꼼수로 빨리 이겨 먹을 생각만 했으니까.


그게 그 패거리들이 살아남는 방식이었고, 또 그렇게 코트를 쥐고 흔들었던 거지.

그러니 내가 그놈들 세상을 '위선자들의 왕국'이라고 부르는 게, 뭐 틀린 말이라도 되겠어?



서영감의 통 큰 베풂, 그리고 탐욕스러운 그림자


잠깐 재밌는 이야기 한 가지만 들려줘야겠네.

내가 좀 있는 사람이라네.

회사 사장이고, 땅이랑, 임대 수입, 등 다 합치면 200억 즘 되려나...

크... 크...



자랑은 아니지만, 그간 동네 고깃집을 내 단골집으로 삼고 테니스 회원들한테 고기를 자주 사 줬지.

지금은 그 빈도 수가 좀 낮아지긴 했지만 말일세.


여하튼 다들 내가 사는 소고기를 좋아했지.

나이 먹고 남한테 베푸는 재미가 또 쏠쏠하거든.


그건 그렇고, 테니스 회는 월례대회란 게 있어.

한 달에 한 번씩 자체적으로 즐거운 경기를 벌이는 잔치날이라고나 할까...


월례 대회 때면 동네 가게들에서 찬조도 많이 들어왔어.


그 중 어느 고깃집 사장이 내가 그동안 고기를 많이 팔아줬다면서, 월례 대회 때 쓰라고 막창 한 상자를 통 크게 내줬지.


그날따라 날씨도 좋아서, 대회 끝나고 다 같이 막창 구워 먹을 생각에 내가 다 신이 났다네.


근데 말이야.

월례 대회가 열리는 토요일 아침, 코트에 가보니 세상에, 막창이 하나도 없는 거야!

어젯밤까지만 해도 찬조 물품 목록에 떡하니 있던 막창이 감쪽같이 사라진 거지.


다들 어리둥절해서

"이게 어찌 된 일이냐"고 수군거렸어.


나도 황당했지.

기껏 큼 맘 먹고 찬조한 동네 고깃집 사장 체면이 뭐가 되겠나.


알고 보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어. 거 참

월례 대회는 토요일인데, 금요일 저녁에 감씨 패거리들이 코트에 몰래 모여 막창을 지들끼리 다 구워 먹은 거야.

술판까지 벌이면서 말이지.

코트 구석에 막창 굽다 남은 흔적이랑 빈 술병들이 널려 있었어.


당시에 총무였던 한정우가 이 사실을 알고 감씨에게 큰 소리로 항의했지.


"회원들 다 같이 먹을 막창을 왜 미리 드셨습니까?

이건 너무한 것 아닙니까?"


한정우 목소리엔 분명 화가 실려 있었어.


그랬더니 감씨가 보란 듯이 콧방귀를 뀌더군.


"이봐, 젊은 양반.

이건 우리 동호회의 오래된 관례야!

대회가 금요일 저녁부터 시작되는 거나 다름없지.

괜히 어린 놈이 나서서 분위기 흐리지 마."


관례라니?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였어.

지들끼리 몰래 훔쳐 먹은 게 무슨 관례야.


내 고깃집 사장한테도 미안하고, 무엇보다 이런 불합리한 걸 두고 볼 수가 없었어.

하지만 나야 뭐...

다른 사람들에게 싫은 소리 내는 걸 원체 꺼리는 편이라서...


한정우는 그렇지 않았지.


그는 회원들에게 모두 공평하게 돌아가도록, 다음부터는 절대 그런 일이 없었으면 한다고 당당하게 제안했어.

하지만 패거리들은 들은 척도 안 했지.


그들의 뻔뻔함은 날이 갈수록 두꺼워지고 있었다네.



감씨의 탐욕, 한정우의 강직함


그다음 달 월례 대회는 어땠는지 아는가?


이번에는 소머리 국밥을 준비하려고 한정우가 나섰어.


금요일 오후부터 코트 한구석에 불을 피우고 커다란 드럼통 안에다 소머리를 푹 삶기 시작했지.

밤새도록 정성껏 끓여서, 다음 날 아침 회원들이 다 같이 뜨끈한 국밥을 맛볼 생각이었을 게야.

구수한 냄새가 코트 전체에 퍼져나갔어.


근데 저녁 무렵이 되자, 감씨 일행이 막걸리 몇 병을 사 들고 코트에 다시 나타난 거야.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다짜고짜 끓고 있는 소머리 솥으로 다가가더군.

그리고는 능글맞게 웃으며 솥뚜껑을 열고 맛있다는 소혓바닥, 즉 우설을 썰어 먹으려고 하지 않겠나.

코끝에선 구수한 냄새가 진동하는데, 그들의 탐욕스러운 눈빛이라니.


한정우가 참지 않았어.


그는 벌떡 일어나 감씨 일행 앞을 가로막았지.

그의 눈빛에는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네.


"왜 회원 모두가 먹을 것을 자기들끼리 몰래 금요일 날 와서 미리 드십니까?

이러지 마십시오!"


그는 분명하게 따졌어.


그랬더니 감씨가 발끈하는 거야.


"어린 놈이 어른들 관례를 무시하는 거야, 뭐야!"

하며 한정우에게 덤벼들지 않겠나.


막말을 퍼붓고, 심지어 주먹질까지 하려고 했어.

나는 숨을 들이켰지.

자칫하면 큰 싸움이 날 판이었어.


하지만 한정우는 달랐네.

그는 정교한 무에타이 클린치 자세로 감씨의 목덜미를 정확히 붙잡고 제압했어.

그냥 붙잡고만 있는 거지 어떤 폭력도 없었네


감씨가 옴짝달싹 못 하는 사이, 한정우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지.


"모두의 것은 모두가 함께 나누는 겁니다.

누구도 독점할 수 없습니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었고, 그의 몸은 굳건한 바위 같았다네.


감씨 일행은 결국 싸들고 왔던 막걸리 병들을 챙겨 들고 욕설을 퍼부으며 다른 곳으로 사라졌어.

그들의 얼굴에는 분노와 함께 수치심이 뒤섞여 있었지.


한정우는 다음 날, 회원들이 모두 함께 나눌 수 있도록 밤새 소머리를 지켜냈어.


그 과정에서 실랑이가 있었지만, 한정우의 강직함과 용기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지.


나는 그날, 한정우가 단순한 테니스 '이단아'를 넘어, 이 코트의 낡은 관습과 부조리에 맞설 진짜 '선구자'가 될 것임을 예감했다네.


그의 작은 싸움은, 코트의 오랜 역사를 바꿀 큰 물결의 시작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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