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늙은 이야기꾼의 변(辯)

by 이호창

프롤로그: 늙은 이야기꾼의 변(辯)


오늘도 나는 이 낡은 벤치에 앉아 있다네.

요즘 우리 아파트 코트는 참 보기 좋아.

주말이면 세 면의 코트가 전부 찰 만큼 사람도 많고, 무엇보다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거든.


저쪽에서는 실력 좋은 양반들이 땀나게 공을 치고, 이쪽에서는 아이들이 엄마, 아빠 손을 잡고 와서 깔깔대며 테니스를 배우고 있으니 말이야.

모두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져서, 꼭 한 폭의 그림 같다고나 할까.

오늘도 나는 보온병에 담아온 술을 홀짝이며 그 풍경을 보고 있었는데, 아주 흐뭇한 장면을 하나 봤지.


몇 해 전만 해도 라켓 잡는 법도 모르던 그 어리숙한 대학생이, 이제는 제법 의젓하게 처음 라켓을 든 젊은 아가씨의 자세를 잡아주고 있더군.


"테니스는 공을 세게만 치는 게 아니에요. 두 손으로, 마음을 담아서 쭉 밀어주는 거예요."


그 말을 듣는데,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어.

몇 년 전, 자기가 바로 그 자리에서 들었던 말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그대로 돌려주고 있었으니 말이야.

저 말은 사실, 코트의 이단아라 불렸던 한정우라는 사내가 했던 말이었거든


요즘 이 코트에 처음 와보는 사람들은 아마 믿지 못할 게야.


이 평화로운 풍경이, 사실은 한바탕 소리 없는 전쟁을 치르고 난 뒤에야 겨우 얻어낸 것이라는 걸 말이야.


성벽을 쌓고 남을 밀어내려던 자들이 있었고, 그 닫힌 문을 온몸으로 열어젖히려던 바보 같은 사내도 있었지.


사람들은 지금의 결과만 보고 모든 게 원래 그랬던 것처럼 여기지만,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거든.


이 코트의 흙먼지 속에 어떤 이야기들이 묻혀 있는지.


그래서 이 기록을 남겨볼까 하는 거야.


내 늙은 기억이 더 흐려지기 전에, 그리고 이 위스키가 다 떨어지기 전에, 그 징하고도 재밌었던 양반들 이야기를 한번 풀어볼까 하네.


모든 것의 중심에는, 내가 아는 가장 기묘하고 고지식한 이단아, 한정우 그 사내가 있었지.


자, 그럼 어디부터 시작해야 하려나.


그래, 내가 늘 앉아있던 이 벤치와 세 개의 코트,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게 맞겠구먼.



테니스.png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