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하늘 아래, 잿빛 지붕들이 어깨를 맞대고 한숨을 쉬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마을의 모든 것은 뽀얀 먼지를 뒤집어쓴 듯 빛깔을 잃었고, 사람들의 웃음소리는 아주 오래전 잊힌 옛이야기 같았지요. 그 마을에 사는 아이, 루리의 마음속에도 언제부턴가 차갑고 딱딱하게 굳어버린 작은 돌밭이 있었습니다. 웃으려 해도 입꼬리가 돌멩이에 걸린 듯 무거웠고, 신나게 달리려 해도 발걸음이 진흙처럼 땅에 달라붙는 것만 같았어요.
마을 어른들은 창밖을 보며 나지막이 말하곤 했습니다.
"우리 마음에도 언젠가 꽃이 필 날이 올까?"
그 목소리는 잿빛 안개처럼 힘없이 흩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잿빛 오후, 루리는 시장 구석에서 말린 약초를 파는 할머니의 좌판에 앉아 있었습니다. 향기마저 빛바랜 듯한 약초들 사이에서, 할머니는 꾸벅꾸벅 졸다 말고 루리에게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속삭여 주었습니다. 마을 너머, 늘 안개에 잠겨 있는 언덕 꼭대기에, 아무도 찾지 않는 아름다운 유리 정원이 있는데, 그곳에 사는 할아버지는 황량한 마음에 꽃을 피우는 신비한 정원사라는 것이었어요.
"마음의 정원이라고요?"
루리의 귀가 쫑긋 섰습니다. 할머니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지요.
"그렇단다. 그분은 흙이 아닌 마음에 씨앗을 심고, 물이 아닌 이야기로 꽃을 피우신다더구나."
그날 밤, 루리는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자기 마음속의 이 차갑고 황량한 돌밭에, 아주 작은 들꽃 한 송이라도 피울 수 있다면. 그 생각 하나가 작은 촛불처럼 루리의 마음을 밝혔습니다.
루리는 다음 날 동이 트기 전, 작은 주머니 하나를 들고 조용히 집을 나섰습니다. 안개 낀 언덕으로 가는 길은 잿빛 가시덤불이 막고 있었지만, 마음의 돌밭을 가꾸고 싶은 마음이 더 컸습니다. 작은 손에 상처가 나도 아랑곳하지 않고 덤불을 헤치고 나아가니, 정말로 햇살에 반짝이는 둥근 유리 정원 하나가 안개 속에서 보석처럼 고요히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유리 정원의 이끼 낀 문을 조심스럽게 열자, 향긋한 풀 내음과 햇살에 잘 마른 흙냄새가 루리를 포근하게 감쌌습니다. 역시, 유리 정원 안은 세상의 모든 빛깔을 모아놓은 듯한 곳이었습니다. 창가에는 무지갯빛 꽃들이 해를 향해 노래하고 있었고, 천장까지 닿을 듯한 책장에는 식물에 관한 낡은 책들이 빼곡했으며, 벽난로 위에서는 보석처럼 반짝이는 작은 씨앗들이 숨 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서, 은빛 머리카락을 길게 땋아 내린 할아버지가 작은 새싹에게 물을 주며 다정하게 속삭이고 있었습니다.
인기척을 느낀 할아버지가 돌아보았습니다. 그 눈빛은 갓 피어난 꽃잎처럼 부드럽고 다정했습니다.
"작은 손님이 여기까지 어인 일인고?"
루리는 용기를 내어 할아버지에게 다가가, 자기 마음속의 황량한 돌밭에 대해 모두 이야기했습니다.
"할아버지, 제 마음에도 꽃을 피워주실 수 있나요?"
할아버지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물론이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은 바로 마음의 정원을 가꾸는 것이란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씨앗들은 네가 직접 구해와야 해.
네 마음으로만 모을 수 있는 씨앗들이거든."
할아버지는 루리에게 예쁜 그림이 그려진 작은 씨앗 봉투 세 개를 건네주며 말했습니다.
"첫 번째 봉투에는 '새벽의 첫 햇살 씨앗 한 줌'을 담아오렴. 희망을 품은 씨앗이란다."
"두 번째 봉투에는 '진심이 담긴 눈물 씨앗 한 방울'을 담아오렴. 사랑을 적시는 씨앗이지."
"그리고 마지막 봉투에는 '용감한 웃음 씨앗 한 조각'을 담아오너라. 용기를 깨우는 씨앗이야."
루리는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것들을 어떻게 씨앗 봉투에 담을 수 있을까요? 하지만 루리는 할아버지의 따뜻한 눈을 믿어보기로 했습니다.
첫 번째 씨앗을 구하기 위해, 루리는 다음 날 아주 일찍 잠에서 깼습니다. 아직 마을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세상은 온통 푸르스름한 어둠에 잠겨 있었죠. 루리는 동쪽 하늘이 보이는 언덕으로 향했습니다. 그때, 언덕 아래에서 무거운 수레 바퀴가 진흙에 빠진 채 끙끙대는 할머니를 보았습니다. 루리는 망설이지 않고 달려가 작은 어깨로 있는 힘껏 수레를 밀어드렸습니다.
"아이고, 고맙구나, 아가야. 너처럼 작은 아이가 어디서 이런 힘이 났을까."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습니다. 한참을 함께 땀 흘려 수레를 밀어 올렸을 때, 마침 저 멀리 산등성이 너머로 눈부신 아침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어둠을 녹여버릴 듯한 따스하고 황금빛 햇살이 할머니의 미소 위로, 그리고 루리의 얼굴과 온몸으로 쏟아져 내렸습니다. 루리는 자기도 모르게 두 손을 내밀어 그 빛을 가득 담는 시늉을 했습니다. 피부가 아닌, 마음속 돌밭이 아주 조금 따뜻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두 번째 씨앗을 찾아 나선 날, 루리는 마을 숲길에서 작은 아기 새 한 마리가 둥지에서 떨어져 가늘게 울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어미 새로 보이는 새는 높은 나뭇가지 위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애타게 지저귀고 있었어요. 루리는 조심스럽게 아기 새를 두 손으로 감싸 안았습니다. 작은 심장이 겁에 질려 콩콩 뛰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괜찮아, 무서워하지 마. 내가 엄마에게 데려다줄게."
루리는 무서웠지만 아기 새를 위해 용기를 냈습니다. 조심조심 나무 위로 올라가, 아기 새를 포근한 둥지 안에 가만히 내려놓았습니다. 어미 새는 고맙다는 듯 루리의 어깨에 잠시 앉았다가 날아갔습니다. 그 순간, 다른 생명의 슬픔에 진심으로 마음 아파하고, 그를 도울 수 있었다는 깊은 안도감에 루리의 눈에서 또르르, 맑은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습니다. 그것은 슬퍼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마음과 마음이 이어진 따뜻한 눈물이었습니다. 루리는 그 눈물이 마음속 돌밭의 마른 흙을 촉촉하게 적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마지막 씨앗은 가장 어려웠습니다. '용감한 웃음 씨앗'이라니요. 그때, 골목길에서 몸집이 큰 아이들이 작은 아이를 놀리며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작은 아이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어요. 루리의 심장이 쿵쾅거리고 다리가 후들거렸습니다. 무서웠지만, 루리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루리는 작은 아이 앞으로 다가가 두 팔을 벌리고 섰습니다. 목소리는 양처럼 떨렸지만, 눈은 단호했습니다.
"그만해! 친구를 괴롭히면 못써!"
큰 아이들은 잠시 루리를 노려보더니, 시시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는 가버렸습니다. 작은 아이는 고개를 들어 루리에게 고맙다고 말했습니다. 두려움을 이겨냈다는 뿌듯함과 친구를 도왔다는 기쁨에, 루리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하하!" 하고 맑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 웃음소리는 메아리처럼 골목길에 울려 퍼졌고, 마음속 돌밭의 단단한 흙이 부드럽게 부서지는 소리처럼 들렸습니다.
세 가지 씨앗을 모두 모은 루리는 다시 유리 정원으로 달려갔습니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따뜻한 미소로 루리를 맞아주었습니다. 루리는 텅 빈 씨앗 봉투들을 내밀며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씨앗을 다 모았어요. 그런데 봉투에는 아무것도 담지 못했어요. 대신 제 마음속에 모두 심었어요."
루리는 햇살을 느꼈던 순간, 눈물을 흘렸던 순간, 용감하게 웃었던 순간의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벽난로 앞에 놓인 작은 화분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자, 이제 그 마음을 화분에 가만히 불어넣어 보렴."
루리가 눈을 감고 자신이 겪었던 따뜻한 마음, 애틋한 마음, 용감한 마음을 떠올리며 화분에 숨을 불어넣는 순간, 루리는 깜짝 놀랐습니다. 자신의 가슴속에서부터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와 화분을 가득 채우더니, 딱딱했던 마음의 돌밭이 부드러운 흙으로 변하고 그곳에서 아주 작은 파릇한 새싹이 퐁! 하고 돋아나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할아버지가 루리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습니다.
"보렴, 루리야. 마음의 정원을 가꾸는 진짜 비결은 무언가를 밖에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네 안에 이미 잠들어 있던 씨앗을 스스로 찾아내는 것이란다.
'새벽의 첫 햇살'은 희망의 빛을, '진심 어린 눈물'은 사랑의 물을, '용감한 웃음소리'는 용기의 노래를 의미하지.
그 세 가지가 모일 때, 어떤 황량한 마음의 밭이라도 스스로 아름다운 꽃을 피워낸단다."
루리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습니다. 늘 자신을 짓누르던 차갑고 딱딱한 돌밭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는 따스하고 희망찬 새싹이 돋아나 있었습니다. 발걸음은 깃털처럼 가벼웠고, 세상은 온통 저마다의 아름다운 빛깔로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유리 정원을 내려온 루리는 더 이상 잿빛 마을의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루리의 환한 미소는 회색빛 거리에 작은 등불을 켰고, 루리의 따뜻한 말 한마디는 이웃들의 마음에 작은 온기를 불어넣었습니다. 사람들은 루리를 보며 조금씩 웃기 시작했고, 신기하게도 마을은 아주 조금씩, 아주 천천히, 잃어버렸던 원래의 빛깔을 되찾기 시작했습니다.
루리는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마음의 정원사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 모두는 자신의 마음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으로 가꿀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