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의 질주
“먼저 가.”
내가 용기 내어 말을 걸었다. 남산 달리기 출발선에서 선우와 나란히 뛰기 시작했다. 처음 500미터쯤은 선우가 내 보조에 맞춰줬다. 빠르게 뛰는 것도 힘들지만, 억지로 속도를 늦추는 건 더 고된 법이다. 그 배려가 고마우면서도, 아들 눈치가 보였다. 그러다 선우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단숨에 시야 밖으로 멀어져 갔다. 그 뒷모습은 힘찼고, 멋있었다.
나는 숨을 고르기 위해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 순간 깨달았다. 아들과 나의 호흡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을.
달림이들에게 성지나 다름없는 남산 순환길은 왕복 7km로 거리도 제법이고 오르막이 몇 차례 반복되니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코스다.
“아빠는 그런데 왜 다른 사람들보다 이렇게 늦게 뛰어?”
선우가 초등학생일 때 마라톤 대회 주로에서 나를 기다리다 건넨 말이었다. 그 선우가 이제는 성인이 되어 아빠의 취미인 달리기를 함께 하고 있다. 나보다 키도 크고 군살도 없어 꽤나 잘 뛴다. 세월은 어느새 우리 둘의 위치를 바꿔놓았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수십 년 전, 나도 아버지의 등 뒤에서 남산을 오르며 자랐다. 초등학교 방학이면 어김없이 아버지, 어머니를 따라 아침 일찍 남산을 올랐다. 아버지는 언제나 내 앞에서 길을 잡아주듯 앞서 오르셨고 나는 그 등을 놓치지 않기 위해 헉헉거리며 뒤를 따라갔다. 남산 정상 근처에 다다르면 아버지가 손을 내밀어 뒤따라온 막내아들에게 주는 선물은 매점 근처에서 파는 계란 후라이와 요구르트였다. 막내아들에게 주는 보상 같은 선물이었다. 지금도 그 추억을 떠올릴 만큼 그 맛이 기가 막혔다. 그 재미에 이른 아침에도 눈을 비비고 부모님을 따라오던 곳이 남산이었다. 나에게 남산은 아버지의 등을 따라가던 시간의 언덕이었다.
또한 선우가 초등학생이던 시절, 남산은 우리 가족이 참 많이 왔던 곳이다. 나는 남산순환길을 뛰었고 선우와 선경이는 엄마와 놀았다. 겨울이면 이곳은 천연 썰매장으로 변신했다. 한 바퀴를 돌고 호흡을 가다듬은 뒤, 눈 쌓인 비탈에서 마대자루를 깔고 선우를 태워 밀어주곤 했다. 그러면 아이들은 마치 어린이대공원의 청룡열차처럼 바람을 가르며 내려갔다. 나는 천연 썰매를 힘껏 밀어주느라 호흡은 거칠어지고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데, 선우의 웃음소리는 더 크게 퍼져 나갔다. 썰매 위에서는 내 거친 호흡과 선우의 기쁨의 호흡이 마치 반비례하는 그래프처럼 교차했다. 우리 부자에게는 남산은 이런 추억들로 가득한 한 시절의 놀이터였다. 그런 남산을 다시 선우와 함께 뛰기 위해 오니 새삼 낯설 만큼 새로웠다.
선우는 군대 복학 후 학교 마라톤 동아리에 들어가 활동하고 있다. 나의 대학 시절은 생일을 챙기는 문화가 없던 때였는데 선우 생일에 각양각색의 선물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니 동아리 생활을 아주 잘 즐기고 열심히 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왔다. 연극반이 연출, 연기, 기획으로 존재감을 드러낸다면, 마라톤 동아리에서는 단연 기록이 가장 큰 입증일 것이다. 그 기록을 위해 선우가 얼마나 자신을 밀어붙이는지는 눈으로 보지 않아도 짐작이 갔다.
나는 한 바퀴만을 목표로 했다. 하지만 '가을의 전설'을 꿈꾸는 선우는 내가 한 바퀴를 도는 동안 이미 두 바퀴를 뛰고 나에게로 달려왔다. 그 속도와 열정을 보니 ‘나도 저랬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청출어람이란 말이 딱 맞다. 어느새 역할이 뒤바뀌었다는 걸 선우와 달릴 때마다 실감한다. 내가 달리기를 시작한 것은 선우가 다섯 살 되던 해였다.
그때부터 우리 가족은 함께 마라톤 대회에 나갔다. 일곱 살 무렵에 선우와 선경이는 5km 마라톤 대회를 신청해서 걷게 했다. 아빠를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지루할까 봐 낸 작은 아이디어였는데 어느새 우리 가족만의 전통이 되었다. 지방 마라톤 대회가 있을 때면 전날 숙소를 예약하고 가족이 함께 묵었다. 장점이 하나 있었다. 다음날이 마라톤 대회다 보니 그 좋아하는 술을 내가 멀리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가족은 더 좋아했다. 특히 내가 풀코스에 도전하는 날이면 그 마음은 더 컸다. 풀코스 30km 지점은 이른바 ‘마의 구간’이라 불릴 만큼 체력과 정신이 동시에 무너지는 지점이다. 그 지점에서 가족을 만나는 순간이 나에게는 최고의 영양제이자 보충제였고 그 응원으로 나는 끝까지 달려 완주할 수 있었다.
선우는 남산에서 조랑말처럼 껑충껑충 뛴다. 어릴 때는 내가 속도를 정하고, 그 뒤를 따라 선우가 따라왔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아들의 숨이 더 깊고 더 빠르게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이제는 내가 그 속도를 뒤에서 보며 따라가는 때가 된 것이다. 그런데도 신기하게 주법은 나를 닮아 팔자다. 아들의 그 힘찬 뒷모습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어쩜 나의 ‘가을의 전설’은 여기까지 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끝은 아니다. 지금부터는 또 다른 재미, 새로운 방식의 즐거움이 시작될 테니까.
언젠가 팔자 주법의 선우가 풀코스에 도전하게 된다면 이번에는 내가 주로에 서서 손을 흔들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모든 변화를 깨닫게 해 준 곳, 남산이 알려준 부자의 호흡이었다.
2018.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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