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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병원 가는 길 – 팬티가 날 구했다

by 플레이런너

일요일 아침, 아산병원까지 뛰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여느 때처럼 살곶이에서 출발했다. 청계천 복원 공사 때문에 성수대교로 넘어가는 작은 다리가 끊겨 있다. 그래서 살곶이에서 옥수역을 지나 동호대교로 이어지는 코스를 택했다. 그 길 끝에는 아산병원이 있다. 내가 그쪽으로 달리는 까닭은 하나다. 병원에 엄마가 있기 때문이다.

엄마를 만나는, 조금은 특별한 나만의 이동 방식이다. 평일에 부족했던 움직임을 주말 거리주로 채운다. 그 길이는 13km 정도. 짧지 않지만 내겐 익숙한 거리다.

달리기는 시작이 늘 가장 힘들다.

하지만 조금 지나면 몸도 마음도 제자리를 찾는다.

몸이 풀릴 때쯤 배가 아파왔다.

설사가 나올 것 같다. 갑작스러운 배변 신호만이 나를 몰아붙였다. 전날 술도 안 먹었는데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 이 근처엔 화장실이 없다. 성수대교를 지나야 겨우 간이 화장실이 나온다. 옥수역과 중간 지점, 지금의 나에게는 그 거리가 아득했다. 돌아갈 수도 없었다. 뛰다 걷다를 반복하며 그곳을 향해 나아갔다.

‘조금만 더.’

스스로를 달래며 한 걸음씩 옮겼다. 문득 어릴 적 어머니가 알려준 예방법이 떠올랐다. 왼손 엄지와 집게손가락 사이 합곡혈을 지그시 눌렀다.

효과라기보다, 마음을 잠시 다른 데로 돌리는 데 도움이 되는 듯했다. 그렇게 다시 뛰어갔다. 하지만 속도는 낼 수 없었다.

엉덩이 뒤쪽이 강하게 당겨와, 한 걸음 옮기는 것조차 힘겨웠다.

여러 가지 몸부림 끝에, 마침내 화장실에 닿았다.

문을 여는 순간, 바지는 이미 내려가 있었다.

시간을 줄여야 한다는 강박 덕분인지, 미리 준비해 둔 몸짓이 제 역할을 했다.

한 손으로 지퍼를 천천히, 그야말로 숨죽이며 내렸다.

서두르면 터질 것 같아 더 느리게 움직였다.

바지의 후크도 풀었다. 그다음 내친김에 벨트까지 엉성하게 풀었다.

그래도 바지는 쉽게 내려가지 않았다. 벨트를 두 번째 구멍에 걸어둔 것이 뜻밖의 버팀목이 됐다

그 덕분에 문을 여는 순간, 바지는 거의 자동으로 흘러내렸다. 이십 분 정도 나를 괴롭히던 종양들이 시원하게 내려갔다. 폭발음이 연달아 터져 나와 나조차도 놀랐다.

이제 바지만 올리면 모든 게 끝난다.

“아뿔사”

급한 일은 해결했는데 내가 들어간 재래식 화장실엔 휴지가 없었다.

주머니 속 도구들을 하나씩 점검했다.

우선 만약을 대비하기 위해 가지고 온 천 원짜리 지폐 두 장이 있다.

지폐의 면적도 턱없이 작아 보였지만, 무엇보다 사용자 관점에서의 만족감이 심히 의심스러웠다.

그 뻣뻣함이 마치 내게는 십만 원짜리와 같은 거만함으로 보였다. 게다가 지폐 앞면을 쳐다보니 눈썹 굵은 퇴계 선생님이 불쑥 튀어나오신다.

“네 이놈! 성현 얼굴에 감히 어찌 이런 행위를 하려고 하느냐!”

“선생님, 지금 제가 워낙 급하다 보니 예법보다 생리법이 더 우선입니다”

선생님의 서릿발 같은 호통이 들려, 내 몸에 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돈의 가치는 열 배지만 면적은 비슷한 세종대왕님을 모셔볼까?

역시였다. 대왕님도 사용을 허락하실 기세는 아니었다.

다음은 또 뭐가 있을까?

손에 끼고 있던 마라톤 장갑이 눈에 들어왔다.

이 장갑의 장점은 탁월한 흡수력에 있다.

땀을 닦으면 금세 마르는 장갑. 하지만 그 용도로 쓰인다면?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삼만 원이나 주고 산 고가의 장갑을 보니, 마치 장갑 자체가 내게 항의하는 듯했다.

“이 삼만 원짜리 기능성 장비를 감히 이런 용도에...!”

이건 뒤처리의 문제가 아니라, 달리기의 상징에 대한 모독이었다.

형태와 동작을 떠올려보니, 도저히 그림이 나오지 않았다.

이 장갑은 많아야 열 번 감당할 텐데, 한 번만 제대로 후비면… 그다음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

그다음 문제는, 바로 뒤처리였다. 중지에 묻은 흔적을 다른 손가락에 번지지 않게, 그 손가락만으로 계속 닦는 게 가능할까?

머릿속에서는 이미 ‘다음!’을 외치고 있었다.

또 다른 후보는 내가 가져온 차 열쇠였다.

앞부분은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얕게 파여 있었다. 이 모양이라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 앞부분으로 조금씩 긁어볼까?

엉덩이의 아픔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아픔의 길이는 짧고 명확했으면 하는 바람을 실어보았다. 그러나 이 역시 만만한 상대가 아닌 듯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긁어낸 것들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였다

아마도 그 화장실을 전위적인 예술작품으로 도배할 가능성이 커 보였다. 혹시 전위 예술가로 오해를 받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꼬리를 물자, 절망감에 머리를 푹 숙였다. 여기는 가운데가 시원하게 뚫린 재래식 화장실이었다.

그 가운데로 내 팬티가 걸쳐서 보였다.

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최고급 ‘B’ 브랜드 팬티였다. 나에게는 무척이나 보기 드문 고급 팬티였다.

그다음부터는 생각이 아니라 행동이었다.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서 왼쪽 운동화 끈을 오른손을 이용해 풀었다. 아주 살며시 왼쪽 발을 운동화에서 꺼냈다.

살짝 틀어진 왼발이 운동화 위에 자리를 잡았다.

몸을 중간쯤 일으킨 상태에서 오른쪽도 똑같이 실시했다. 왼쪽의 학습효과로 비교적 수월하게 진행이 되었다.

몸을 중간까지 일으킨 채 오른쪽도 동일하게 했다. 왼쪽에서 이미 감을 잡은 덕에 훨씬 수월했다. 이제 몸을 상체부터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몸의 균형이 스트레칭하듯 아슬아슬하게 지탱했다.


이렇게 해서 바지를 벗을 수 있었다. 가운데 뚫린 구멍으로 운동화나 바지가 들어가면 말짱 도루묵이다. 그래서 나의 동작은 느릴 수밖에 없었다. 같은 방식으로 팬티를 벗었다.

바지와 팬티를 한꺼번에 작업할 수 없었던 이유는 너무 성급하게 서두르다가 잔 편이 흐를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마치 슬로비디오가 작동하듯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그것 역시 잔 편을 예방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오른손으로 팬티를 아래로 내렸다. 헐렁해진 틈으로 오른발로 쭉 밀어버렸다.

그 순간, 내 몸은 다시 쭈그린 자세로 재빨리 돌아갔다. 몸이 내려오자마자 손에 팬티가 잡혔다.

팬티는 크리넥스보다 훨씬 두꺼웠다. 마치 이중으로 겹친 휴지 같았다.

가운데는 조금 더 두꺼웠다.

가장 촉감이 좋은 바깥쪽 얇은 부분으로 먼저 훑었다.

그리고 반대 끝까지 세심하게 마무리했다.

한 번 접었다. 그대로 다시 한번 반복했다. 그리고 접힌 부분으로 파우더를 두드리듯 가볍게 톡톡 쳤다.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럴 틈도 없었다.

그럴 마음의 여유도 없었고 이제는 덥고 갑갑한 통에서 빨리 나오고 싶었다.

팬티가 사라진 빈자리로 초봄 바람이 스며들었다.

실내와 달리 바깥 바람은 20도의 따뜻함조차 잊게 할 만큼 유난히 몸도, 마음도, 팬티도 한층 가벼워졌다.

성현의 얼굴, 삼만 원짜리 장갑, 반짝이는 열쇠… 다 제쳐두고 결국 선택한 건 팬티였다. 위기의 순간, 마지막까지 나를 지켜준 방어선. 진짜 러너는 어디서든 길을 찾는다는 걸 그 작은 천 조각이 증명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달렸다.


2005년 3월 27일(일요일) 10:00


#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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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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