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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대회에서 바람을 피웠다며?

by 플레이런너


의정부 한북마라톤대회 하프 코스에 참여했다.

달리기 동호회 선배가 툭 던지는 한마디에 아침부터 기분이 안 좋았다.

“풀코스(김영진의 닉네임), 중마 교실(중앙일보 마라톤교실) 참여했다는 몸 맞아? 나가고도 몸이 이래?”

이 말은 작년 서울마라톤 울트라 뛰러 갔다가 들은 “자원봉사하러 오셨어요?”라는 말만큼 충격적이다.

내 몸을 고개 숙여 쳐다본다.

‘많이 좋아졌는데...’

개의치 않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아내와 함께 출발선에 섰다.

울트라(아내의 닉네임)와 하프 반환점까지 함께 뛰기로 했다.

반환점까지는 함께 달렸다. 아무리 부부라도, 결국 각자의 호흡과 각자의 길이 있는 법이다. 이번이 세 번째 하프 도전인 울트라. 한 번은 처음부터 나와 같이 뛰었고 또 한 번은 반환점까지만 같이 뛰었다.

반환점을 돌 때까지 수많은 런클인(런너스클럽 마라톤 동호인)들을 만났다. 거의 후미에서 뛰고 있는 우리 부부는 “힘!”하고 외쳐주는 숱한 동호인들의 구호를 받으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 응원 덕에 거북이 스텝이지만 멈추지 않고 뛸 수 있었다.

우리는 반환점에서 헤어졌다.


‘울트라는 괜찮겠지? 완주는 하겠지? 같이 뛸까?’

이런저런 생각들이 순간 바람처럼 스쳤다. 하지만 어느새 바람들을 재끼며 나는 계속 달리고 있었다.

내 스피드와 주법으로 꾸준하게 달렸다. 몸도 가볍고 잘 뛰어진다. 마라톤 교실에 참여해서 받았던 고강도 훈련을 테스트해보고 싶은 마음도 꽤 간절했다.

정말 감독님 말대로 내 몸이 철인 체질로 변해가고 있는지, 이번에는 스스로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평소와는 달리 즐겁고 편안하게 하프를 완주했다. 연습 덕분이었다

결승선을 넘는 순간, 잘 뛰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우 흥분되고 벅찬 기쁨을 안고 런클 동호인들이 모여 있는 쪽으로 갔다.

나를 반가움과 격려로 맞이하던 그들이 가벼운 말로 묻는다.

“울트라는요?”

당연한 듯한 그 물음에 나는 살짝 ‘어?’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보는 사람들마다 또 물어본다.

이젠 물음이 가볍게 들리지 않는다.


잠시 후 샤워장에서 런너스클럽 회장님을 만났다.

“풀코스 어쩜 인간이 그러냐? 울트라를 버리고 혼자 뛰어, 그렇다고 기록이 좋냐, 입선을 하냐, 부부가 같이 뛰어야지?”

다 맞는 소리다. 변명하기 어째 옹색하다.

의정부에서 부대찌개로 아주 유명한 뒤풀이 식당에서 또다시 나에게 화살이 쏟아진다.

“마론님에게 울트라 맡기고 혼자 뛰었다면서요?”

부대찌개 냄새보다 더 진하게 스며드는 건 사람들의 농담이었다.

그 소리에 안주 없이 맥주만 뒤풀이 식당에서 마셨다.

이런 이유는 우리 부부의 닉네임 유래 때문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늘 묻는다.

“풀코스라는 닉네임이면… 당연히 풀코스를 잘 뛰나 보죠?”

나는 그럴 때마다 살짝 웃는다.

내가 뛰는 것은 풀코스가 아니다.

뒤풀이다.

술자리가 1차, 2차, 3차… 그 끝이 보이지 않을 때, 누군가가 말했다.

“야, 이 정도면 풀코스다. 그냥 풀코스로 불러라.”

그렇게 닉네임이 붙었다.

훈장도, 기록도 아닌, 잔의 개수로 얻은 닉네임이었다.

아내의 ‘울트라’도 사정은 비슷했다.

런클 선배가 내 옆을 힐끔 보며 말했다.

“풀코스 옆에 내조하려면 최소 울트라는 돼야지.”

아내는 달리기가 아니라 나와 보조 맞추는 능력 때문에 울트라가 되었다.

그러니까 우리 부부의 닉네임은 훈련, 체력, 근지구력… 그런 것들과는 전혀 무관하다.

그저 뒤풀이에서 태어나 뒤풀이에서 완성된,

마라톤과는 어쩐지 먼—그러나 우리에겐 기막히게 잘 맞는 이름들이다.


뒤풀이 끝나고 집에 와서 곯아떨어졌는데…

“풀코스 바람피웠다면서?” 울트라가 내게 느닷없이 묻는다.

“그건 또 뭔 소리여”

“마라톤 함께 뛰신 분들이 달리기 하다 말고 바람피웠다고 얘기하던데”

(절규하듯)“아니야, 아니야”

그 순간 잠에서 깼다.

울트라는 곤히 자고 있었고,

나는 꿈에서조차 반환점에 홀로 서 있었다.

깨어났지만, 그 말들은 여전히 내 귀에서 가볍게 바람처럼 울렸다.


2007. 03.25


#마라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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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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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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