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울트라마라톤 63km 초보 달림이의 눈물 나는 도전기
“자원봉사 하러 오셨군요?”
11월 19일, 새벽 세시 삼십 분. 서울 울트라마라톤이 열리는 날이다. 올림픽 공원에 도착하자 나와 좀 안면이 있던 마라톤 동료가 내게 던진 첫마디였다.
키 180cm, 몸무게 84kg, 풍만해 배, 외형으로 봐서는 누가 봐도 자원봉사자인데 놀랍게도 마라토너라니.. 거기다 풀코스도 아닌 울트라를 뛴다니 누가 믿겠는가? 나 자신도 솔직히 그런 시선을 부정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난 마라톤이 끝난 후 들어오는 기록 문자 메시지를 지우지 못한다. 친구들과 술자리가 있을 때면 가끔 나를 두고 벌어지는 실랑이에 증거물로 쓰고자 함이 이유 중 하나다.
“김영진이 마라톤을 한다”는데 만원 걸겠다.
“김영진과 마라톤은 절대 아니다”에 술값 걸겠다.
그러는 와중 나는 거침없이 문자를 들이민다. 하지만 한수 더 뜨는 반응에 아연실색하고 말 밖에...
“그 문자 네가 보낸 거지, 맞지? , 어허, 몸이 아닌데. 안 속지! 마라톤 몸이 아닌데...”
부정의 마라톤, 그게 내 마라톤 행로이다. 마라톤 동호회에 명함을 내밀 처지는 더욱이 안되었다. 내가 골인할 때쯤이 대회가 끝나감을 알리는 시각과 일치이니 기록은 보지 않아도 누구든 짐작할 수 있다.
새벽 5시, 올림픽공원 평화의 문에서 드디어 출발했다. 대회 관계자 외에는 산책 나온 사람도 만날 수 없는 이른 시각이었다. 이 시간에 뛴다는 것만으로도 절반의 성공은 아닐까 하며 위로했다. 지금까지의 마라톤 대회에서 난 중반부까지는 거의 후미에 있다. 오늘 같은 울트라 대회에서는 더욱 뒤로 처지게 마련이다. 맨 뒤 자리는 추월을 당할 수 없는 마음 편한 위치이기도 하다. 그렇게 편하게 뛰다가 혹 체력이 된다면 몇 사람 정도 추월할 수도 있는 법이다. 오늘의 주법 역시 마찬가지다.
3km쯤 산책 기분으로 뛰었다. 아산병원이 보였다. 병원을 보자 늘 내 가슴 한쪽에 맺혀 있던 무언가가 솟구쳤다. 그러면서 정신은 바짝 긴장이 되고 한 보 한 보가 보다 더 신중해졌다.
2004년 10월 31일로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몇 주 전에 퇴원한 어머니의 상태가 안 좋아 아산병원 응급실에 입원을 했다. 당뇨 합병증으로 고생을 하고 있던 어머니, 그 어머니와 함께 살던 내가 전적으로 간호를 한다는 것이 이제는 조금 벅차왔다. 집에서 돌보다가 뭔가라도 잘못되면 어쩌나 하는 그런 심리 상태였다. 그래서 어머니의 상태가 조금만 이상해도 병원을 찾아가던 시절이었다. 그러면서 깨달은 사실 중에 하나는 병원은 잠시 생명을 연장해 주는 기관과 같은 곳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어찌 되었건 그날 어머니는 입원하고 다시는 퇴원을 하시지 못했다. 그 기간이 육 개월 정도 이어졌다.
어머니가 입원한 그날은 다름 아닌 서울 울트라마라톤 대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친구에게 같이 뛰자고 울트라 신청을 강권한 것이 몇 달 전의 일이었다. 그러나 난 어머니 간호라는 핑계 아닌 핑계로 신청을 미루었다. 결국은 서울마라톤을 클릭하지 못했다.
나로 인해서 신청을 한 그 친구가 양재동에서 풀코스도 아닌 울트라를 뛴다. 그 모습을 그래도 보고 싶었다.
어머니의 입원 수속을 마치고 아내에게 사실대로 얘기하고 병원 교대를 했다. 양재 시민의 숲으로 갔다. 100km를 달리는 친구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보답은 그래도 동반주 몇 킬로라고 해서 같이 신청 못한 미안함을 덜어보자는 계산이었다. 골인 지점부터 난 반대로 천천히 뛰어갔다. 양재천이 거의 끝나가는 지점에서 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친구는 반가운 표정을 짓기도 엄청 버거워 보였다. 이미 눈은 술 취한 사람처럼 풀려있고 반대로 정신은 날카롭기만 했다. 그런 친구를 달래 가며 동반주 7km를 뛰었다. 그때의 기분은 마치 내가 울트라를 완주한 기분이었다. 계속 뛰면서도 어머니에 대한 생각을 떨 치수가 없었다. 그때 내 생각에는 어머니의 병원 생활은 반복과 계속되는 현상이고 친구의 울트라 완주는 어쩜 평생 한 번뿐인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도 하여간 마음 한구석에는 뭔가 아쉬움이 남았다. 자리를 비웠다는 것 말이다.
이년 전 일이 지금 마치 영화처럼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지금 난 어머니가 몇 년 동안 계셨던 아산병원 그 길을 뛰어가고 있다. 병원 가는 일 때문에 달리기 결석이 많았다. 그때 내가 세운 전략은 병원에 갔다가 집에 오는 길은 뛰어온다는 구상이었다. 아산병원 옆 주로를 시작해서 잠실대교를 건넌다. 잠실대교를 건너서 고수부지 강북 주로를 뛴다. 응봉동과 성수대교를 이어주는 조그마한 다리가 있다. 이 다리를 건너 살곶이까지 와서 남은 약간의 거리를 택시를 타고 갔다. 이 당시만 해도 살곶이에서 청계천까지 연결이 되지 않았다. 거리는 약 11km 정도였고 도착 시간은 보통 새벽 01:30 정도였다.
그때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난 울트라에 다시 도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나 자신과의 약속을 무엇보다 지키고 싶었다. 아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출전을 강행했다. 나름대로는 아내에게 그럴듯하게 설득시켰다.
“철저하게 준비하겠다. 술 덜먹겠다. 그럼 자동으로 술자리 많이 없어진다. 그러면 살도 빠진다. 얼마나 좋은가?”
이렇게 말했던 내가 30km 지점에 이르자 한숨이 나온다. 아직 반도체 안되었구나. 나의 의지를 팍 꺾어 놓는 것 같은 저 표지판. 성질 같아서는 저놈(=표지판)을 마구 부수고 싶다. 내가 왜 이런 짓을 하고 있을까? 무슨 얼어 죽을 약속, 울트라는 아무래도 보통의 인간이 할 운동은 아니라고 어금니를 깨물며 혼자 중얼거렸다. 이런 생각들로 내 마음이 산란하니 몸은 더욱 움츠려 들었다.
이상과 현실의 차이는 두 가지 이론만큼이나 꽤나 차이가 있다. 머리로 뛰니 몸은 전혀 말을 듣지 않는다. 머리가 뛰라고 하면 몸은 떡하니 버티고 있다. 말 좀 들어라 해도 내 몸이 아니어서 듣지를 않는다.
동호대교쯤에서 내 옆에서 누군가가 붙는다. 반갑다. 나와 보조를 맞추는 주자도 있구나? 영동대교가 보이는 지점에서 나와 함께 뛴 주자와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그때까지 대화 한마디 없이 뛰기만 했다. 말을 서로가 건넬 분위기도 아니었다. 그때서야 알았는데 이 마라톤맨은 울트라 주자가 아니라 그날 탄천에서 열린 사카 마라톤 하프 주자였다. 내 옆에서 뛴 이유는 ‘2:30 페이스에 맡는 것 같아 저 사람을 붙들어야겠다.’고 마음먹으며 바짝 뛰어왔다 한다. 탄천 갈림길에서 방향을 달리하며 비로소 내가 울트라 달리기 임을 안 그가 한마디 보탠다.
“까마득한 거리예요. 그래도 여기까지 뛰셨네요. 전 상상도 못 해요. 대단하세요. 꼭 완주하세요!"
그 말에 단순하게 감동받아 막판 안간힘을 내본다. 런너는 참으로 단순한 인간임을 새삼 느낀다. 그러나 그것은 힘이 아니었다. 체력도 아니었다. 그냥 정신 나간 혼이 뛰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정신력이라는 거창한 단어와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냥 몸은 자동으로 오른발과 왼발이 엇갈리며 나갈 뿐이었다. 그렇게 뛰었다.
다시금 아산병원이 보인다. 아산병원 주위를 결과적으로 삼 회쯤 돈 것이 된다. 어머니 생각이 난다. 뛰면서 힘들 때마다 말했다.
“어머니, 완주하겠습니다!
3km 남은 지점에 아내가 나를 보며 달려온다. 어찌나 반가운지 모르겠다. 부부가 대판 싸우다가도 이런 이벤트가 있다면 그냥 풀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로는 장애막으로 막혀 있어 들어올 수 없지만 연신 주로 밖에서 엄마와 아들, 딸이 함께 뛴다. 카메라를 눌러대면서 말이다. 옆에서 벌어지고 있는 저 배경으로 인해 방전된 배터리가 충전된 듯 골인 지점을 향해 미친놈 널뛰듯이 뛰었다. 내가 언제 또 이렇게 뛴 적이 있겠는가? 그야말로 젖 먹던 힘까지 쏟아대며 뛰었다.
드디어 골인 지점이 보인다. 요즈음 영화배우들이 영화제 시상식 전에 밟는 빨간 카펫이 그래로 눈에 들어온다. 드디어 양팔을 번쩍 들으며 골인했다. 골인하고 난 뒤 잠시 후 한 걸음도 옮길 수가 없었다. 그렇게 주저앉은 나에게 아들이 엉성하게 포장하고 치장한 봉투를 건넨다.
완주증
이 사람은 풀코스도 아닌 63km라는 대단한 기록을 세우며 뛰었음
고로 이 상장을 주어 칭찬합니다.
서울 동명초등학교에 다니는 선우가 줍니다.
2006년 11월 19일 김선우 잘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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