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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막 : 유리동물원

무대 밖의 꿈-: 『유리동물원』의 기획 이야기

by 플레이런너

1장 "거절이라는 웜업, 설득이라는 연기"

테네시 윌리엄스의 대표적인 희곡『유리동물원, 나를 무대 밖의 배우이자 기획자로 세운 첫 작품이었다.

4학년인 연출형은 취업을 준비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꿈인 연출에 대한 열망을 떨칠 수 없었다. 우리는 그의 인맥으로 화곡동 ‘생활 연구실’을 연습실로 얻었다.

겨울방학 끝자락, 수원 거리를 닳도록 걸었다. 광고를 따내기 위해 수원 거리를 누비며 받은 건 사실, 냉랭한 거절뿐이었다.

“요즘 장사 안 돼요.”

“학생, 미안한데 힘들어서요.”

“좀 고민해 볼게요”

문전박대를 당할 때마다 마음이 쪼그라들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학교 앞은 그나마 인사라도 받아주었지만 수원 시내의 상가들은 잡상인 취급하기 일쑤였다.

냉대 섞인 말들에 발걸음이 천근만근 무거워지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H형의 왁자지껄한 격려가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H형 지난 공연의 기획, 이번에는 내 기획을 거드는 기획보를 맡았다.

그때까지 부모님이 주시는 돈으로 생활하던 내가 남의 돈을 얻는다는 것이 이렇게도 힘든 일이라는 것을 비로소 처음 알았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난 이 연극에 기획자이면서 연극반 '씨앗' 회장이니까’

연이은 거절에 지쳐 남문 대로변을 걷던 중, 새로 단 간판이 눈에 띄었다. 막 신장개업한 '시사영어학원', 모든 게 신선해 보였다. 난 사실 새로 문을 연 업소를 참 좋아했다. 그곳 사장님들은 미래에 대한 부푼 기대감으로 표정들이 무척 밝았기 때문이었다. 그 기대감에 나도 희망을 걸며 3층 학원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저는 문화대학교 연극반, 씨앗의 회장을 맡은 김혁진이라고 합니다. 저희가 3월에 신입생 환영회로 공연을 합니다. 유리동물원이라는 아주 유명한 작품입니다. 홍보 포스터는 학교와 그 일대, 남문, 역 앞 근처에 티켓과 함께 뿌려질 겁니다. 저희는 수원에서 가장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연극반입니다. 관객은 만석이 되게 할 자신 있습니다. 원장님, 이번 광고가 학원 브랜드의 ‘얼굴’이 되게 하겠습니다. 물론 우리 연극반 학생들부터 이 학원 다니게 할 거고요. 저희의 광고주가 되어 주세요!”

거절당할까 두려웠지만, 마음을 다해 설득했다.

“학생, 우린, 이제 막 차려서 여유가 없어요?”

깔끔한 양복 차림의 검정색 안경을 낀 사십 대 초반쯤 된 원장님이 내 얘기에 웃으면서 답변했다.

대답을 했다는 것 자체가 관심의 표현으로 보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희망을 보았고, 이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막 차리셨으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홍보비 많이 드셨죠?”

“음...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지요”

“이왕 돈 들어가는 거 포스터로 광고를 제대로 한 번 해보시면 어떨까요? 전략적으로 대대적인 홍보를 해드리겠습니다. 제가 수원시 곳곳에 도배하겠습니다.”

“그게 효과가 있을까요?”

“예 자신합니다. 최소한 광고비 이상의 효과를 낼 수 있도록 연극반 네트워크부터 움직이겠습니다. 취업 준비하는 선배들이 꽤 많습니다.”

“그래? 그럼 얼마나 들까요?”

“포스터 하단 광고비 보통 15만 원 하는데 10만 원이면 어떠시겠어요?”

원장님은 잠시 안경다리를 만지작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영수증과 함께 3만 원이 건너왔다.

'해냈다.'

바로 화곡동 연습실로 달려가 소식을 전하자, 모두가 박수를 쳤다.

광고비 10만 원. 대학 등록금 40만 원의 시절이었다. 얼마나 큰 금액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혁진아, 이쯤 되면 너는 기획의 신이다!"

형들의 박수였다. 그날 나는 알았다. 무대 위의 박수와 무대 밖의 박수는 다르지만, 울림은 같았다.

그때까지 나에게 최고의 기쁜 소식은 대학 합격이었다. 그러나 그건 오로지 나만의 기쁨일 뿐이었다. 하지만 오늘 일은 모두가 즐거움을 누렸다. 내가 그 일을 해낸 당사자라는 것이 뿌듯하고 흐뭇했다. 공동체라는 것이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과 기획의 힘을 경험했다.

학교 앞에 새로 문을 연 레스토랑 ‘마노니에 상파뉴’는 목표이자 약속이었다. 수십 번 들락날락했고, 결국 8만 원에 지면 광고를 받았다. 공연 쫑파티를 그곳에서 했다. 말로 한 약속을, 계산서로 지켰다. 기획은 말이 아니라 이행으로 증명된다. 그날의 계산서는, 우리가 낸 굳은 약속의 영수증이었다.


2장 "금지된 꿈을 펼치다"

광고의 벽을 넘으니, 이번엔 ‘대본 검열’이라는 장벽이 기다리고 있었다. 계속 공연 승인이 불발이어서 어느 날 학생회관 2층에 있는 학생처에 찾아갔다. 학생처장이 대본을 요란하게 위아래로 내 앞에서 흔들었다. 그의 손에 들린 대본이 거칠게 흔들릴 때마다 내 심장도 함께 흔들렸다. 대본에 표시된 붉은 동그라미를 가리키며 말했다.

“학생! 꿈, 희망, 현실, 이상... 이런 단어들이 지금 시대에 맞나?”

대본의 붉은 동그라미는 마치 내 시험 성적표에 찍힌 낙인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그 말투에서, 두 달 전 속초의 밤이 되살아났다. 누나의 추천으로 속초 해수욕장 해변가 민박집에서 공연 준비 워크숍을 열었다. 그날 밤, 우리는 대본을 읽으며 연습에 몰두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경찰이 들이닥쳤다.

“여기 남녀가 한 방에 혼숙을 하고, 시끄럽게 떠든다고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신고한 주민은 다름 아닌 민박집주인이었다. 경찰은 우리 손에서 대본을 거칠게 낚아챘다. 그리고는 큰 소리로 대본 속 문장들을 읽어 내려갔다.

“대본에 죄다 꿈? 희망? 현실? 이상 같은 말만 가득하구먼. 학생, 이것들이 밥 먹여주나?"

학생처장의 모습에서 불과 두 달 전 속초 워크숍 상황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 순간, 내 안에서는 오히려 더 단단한 무언가가 솟아났다.

‘우리에게도 유리동물원의 아만다와 로라의 꿈처럼 공연을 올리겠다는 희망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보여주겠어.’

공연 승인이 미루어지고 있는 것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책상 서랍을 꽉 닫으며 ‘조용히 있는 게 중요해’라고 낮은 목소리를 짙게 깔면서 말했다. 쿵, 하고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이해할 수 없었다.

내 눈앞의 이 사람은 우리가 땀 흘려 준비한 무대를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한마디로 재단했다

‘그래, 공연은 무조건 올린다. 이들에게 보여주겠다.’고 다짐했다

어떻게 하면 그들의 승인 없이 우리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까?

어떤 방법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유리동물원'을 알릴 수 있을까?

그래서 학생처 도장 없이 홍보할 방법을 고민했다.

동아리 방을 가려고 천천히 걷고 있는데 학교 게시판이 눈에 들어왔다. 학생처의 도장이 찍힌 수많은 공고문과 홍보물, 이 모든 규칙과 권위의 상징이 포스터 직인 하나에 달려 있었다.

갑자기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나는 학생처의 직인 없이도 통하는 홍보를 궁리했다. 가장 본질적인 메시지만 전달하자고 생각했다. 책상 위에 도화지를 펼쳤다.

오로지 ‘유리동물원’ 다섯 글자만 A4 용지 절반 크기에 매직으로 썼다. 수 백 장을 만들어서 밤마다 학교 곳곳에 붙였다. 테이프가 찢기는 소리, 매직 냄새, 가로등 불 빛. 며칠 뒤, 복도와 화장실에서 속삭임이 번졌다.

“아니, 이게 뭐야?

"유리동물원? 대체 뭐길래 이렇게 여기저기 난리야?"

드디어 반응이 오는구나. 로라가 유리동물원에 갇힌 것과 달리, 나는 기획의 제약 속에서도 꿈이 이루어진 듯 했다.




3장 "규칙은 깨고 호기심은 키우다"

‘씨앗’ 공연은 전통적으로 평일 3회였다. 난 그 틀을 깨고 토요일 공연을 제안했다. 그러나 선배들은 고개를 저었다.

“역사는 하루 아침에 안 바뀐다. 개혁은 꾸준히”

나를 상당히 아끼는 S형의 조언이었다. 선배들을 한 명 한 명 찾아가 토요일 공연의 이유를 설명했다.

"형, 저 토요일에 공연하고 싶습니다. 선배님들께서 걱정하시는 거 압니다. 토요일엔 학교가 텅 빈다, 관객이 없을 거라는 말씀 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기획, 객석 300석 중 절반은 채울 수 있겠니? 현실을 생각해. 토요일은 수업이 없어”

"그렇지. 괜히 전통을 깨려다가 망치면 어쩌려고. 금요일 밤 쫑파티가 얼마나 좋은데.”

“거기다 학교에서 토요일을 달가워할 리도 없잖아."

선배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답했다

”맞습니다. 평일은 재학생·신입생 중심으로, 토요일은 지역주민과 씨앗인 집중 공연으로 기획하겠습니다. 우만동·매탄동 아파트, 인근 두 고교 연극부, 광고주 초청을 묶어 객석을 채우겠습니다. 1기 선배님도 ‘주말이면 참석이 평일보다 쉽다’고 하셨습니다. 그날을 ‘씨앗인의 밤’으로 구성해서 쫑파티를 해보겠습니다.”

“음… 주민 관객, 씨앗인의 밤이라… 일리가 있네.”

내 말이 끝나자 S형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홍보가 관건이었다.

그래서 토요일을 염두에 둔 홍보를 했다. 학교 근처의 고등학교 두 곳, 우만동, 매탄동 아파트에 포스터와 티켓을 뿌렸다.

또한 연극 홍보를 위해 1학년 교양 수업 시간 바로 직전에 교수님께 양해 구하고 1–2분 정도 공연 안내를 했다. 강의실 앞 문을 열기 전 심장이 쿵쾅거렸다. 1학년 학생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이 모두 나를 쳐다보는 듯했다. 내게 집중하는 후배들을 보며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여러분, 입학을 축하드립니다. 첫걸음에 어울리는 작품, '유리동물원'으로 시작하세요”

이렇게 홍보하고 강의실에 나왔다.

“선배님, 그 연극, 교양 수업과 관련이 있는 것인가요?"

나를 따라 나온 어떤 학생의 질문이었다.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호기심은 이미 깨어나 있었다.

4장 "함께 짓는 무대"

기획자로서 인맥을 최대한 살렸다. 사진 촬영은 협회 편집기자로 일하던 누나가 맡았다. 어깨에 큰 카메라를 멘 채 현장을 누볐다. 누나가 찍은 사진이 팸플릿 전면을 장식했다.

포스터 디자인은 J 미대를 졸업한 누나 친구에게 부탁했다. 『유리동물원』은 톰의 기억으로 펼쳐지는 ‘기억 연극’이다. 로라의 유리동물이 깨지는 장면—우리는 그 ‘균열의 순간’을 포스터에 표현했다.

기획의 변이라는 팜플렛에 한 지면을 차지할 나의 글은 그 당시 이미 작가로 불릴 만큼 뛰어난 필력을 갖고 있는 친구에게 대필을 청탁했다. 당시 나는 글을 거의 써 본 적이 없었다.

”13인이 아닌 모두가 도로를 달립니다. 길은 막혔어도 또, 뚫렸어도 적당합니다. 무섭다는 아이들 모두가 무서운 아이일지 모릅니다"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는 글이었다. 다만 13인은 이번 공연의 배우와 스텝의 총합이었다. 13인의 씨앗인이 공연을 위해 힘차게 달려가는 듯했다.

의상은 S여대 의상학과 4학년과 협업했다. 연출의 인물 분석을 토대로 치수를 재고, 수제 양장처럼 제작했다. 로라의 연약함을 살리려 아주 얇은 쉬폰을 골라 블루 드레스로 완성했다. 그 선택은 이후 ‘씨앗’의 직접 제작하는 전통의 출발이 되었다.

드디어 첫날 공연. 극장에 불이 꺼지고, 무대에 불이 켜졌을 때 나는 만석인 객석 맨 뒷자리에 서 있었다.

톰이 등장하는 순간 내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모든 것이 나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에 벅차올랐다. 그것만은 분명했다. 배우가 아니어도, 스태프의 심장도 함께 뛰었다. 나는 깨달았다. 나는 이 연극의 기획자였다.


5장 "기획이라는 열차를 타고"

개인적으로 『유리동물원』은 '씨앗'의 수많은 공연 중 작품 완성도 면에서 매우 뛰어난 작품이었다고 생각했다. 훗날 씨앗인들이 명작을 이야기할 때마다 늘 맨 앞줄에 서 있었다.

러닝타임은 2시간 40분이었다. 연출형의 신념과 집요함, 배우들의 열연이 맞물려 시간의 길이를 잊게 했다. 로라는 유리처럼 가냘팠다. 연출형은 그 이미지를 위해 식단까지 설계할 만큼 철저했다. 한마디로 패기와 자신감이 넘치는 연출형이었다.

3회 전 회차 만석을 기록했다. 많은 고민과 걱정을 했던 토요일 공연은 기숙사 학생과 인근 주민으로 가득 찼다

나의 기획 역사의 신화를 만들어 준 유리동물원의 열차는 이렇게 출발했다.

그날, 배우는 무대 위에서 연기를 했고, 나는 무대 밖에서 살아 있는 연기를 했다. 그것이 나의 첫 무대였다.

나는 알았다.

연극이란 기획이라는 무대 밖 창조적인 행위 예술을 통해 우리의 의도와 메시지를 전달하는 예술이었다. 이 경험은 내가 비즈니스에서도 협업과 창의로 장벽을 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날 이후, 무대 밖이 나의 무대가 되었다. 기획은 아직도 막이 내리지 않은, 내 인생의 가장 긴 공연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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