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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막 싸움터의 기획보

무대 뒤의 전쟁

by 플레이런너

싸움터의 피크닉

1984년, 전두환 정권하의 대학 가는 마치 중세의 암흑기처럼 전운이 감돌았다

캠퍼스는 늘 긴장 속에 있었고, 교문 앞엔 백골단이, 강의실 안엔 감시의 눈길이 스며들었다. 학생들과 정권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그 시대, 연극반은 단순한 예술 동아리가 아니었다. 표현의 마지막 보루였고, 가장 날카로운 풍자의 무기였다.

봄 공연 『옛날옛적에 훠어이 훠이』에 이은 가을 공연, 연출을 맡은 경만 형이 제안한 작품은 페르난도 아라발 작 『싸움터의 피크닉』이었다. 제목은 다소 해학적이지만, 그 안엔 짙은 비극과 풍자, 공포가 숨어 있었다. 그는 ‘이 작품으로 우리 시대를 있는 그대로 알리자’며 후배들을 독려했다. 이 공연이 특이했던 것은 연출 기획을 제외하고 새내기인 ‘씨앗’ 9기만이 참여해서 올린 연극이라는 점이었다.

우아하게 팔짱을 끼며 전쟁터에 아들을 면회하기 위해 입장하는 부부의 첫 등장부터 웃음을 자아낸다.

"아니, 전쟁이라고? 밥을 안 먹으면 쓰나! 자포야, 어서 이 치즈 샌드위치 먹어봐. 엄마가 새벽부터 정성껏 준비했다."

“엄마, 아빠, 여기는 총소리가 요란한데, 왜 우리만 소풍 온 것 같아”

아들의 입에 샌드위치를 밀어 넣는다.

“적이면 어때요? 우리 아들과 동갑이네요.”

무대에서 펼쳐지는 장면들이 관객을 폭소로 몰아넣었지만 왠지 마음 한켠이 불편했다. 전쟁터에 소풍을 오는 부모, 그리고 함께 음식을 나누는 적군 포로 병사. 결국 "전쟁은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광기"라는 뼈아픈 진실을 고발한다. 부조리와 희극의 탈을 쓴 이 희곡은 단순한 연극이 아니었다. 그것은 광기의 시대에, 이성이 얼마나 어이없이 무너질 수 있는지를 고발하는 작고도 강력한 선언이었다.

나는 이 공연에서 ‘기획보’를 맡았다. 기획을 맡은 ‘씨앗’ 회장 형의 뒤를 따라다니며 보조를 하는 일이다. 이 경험은 나를 ‘기획’이라는 단어와 처음으로 가까워지게 한 계기가 되었다.


기획이란, 연극에서 무엇일까?

나는 배웠다. 연출은 가정으로 치면 어머니이고 기획은 ‘아버지’ 같은 존재다. 예산을 짜고, 돈을 만들고, 홍보를 하고, 연극이 한 치의 어긋남 없이 무대 위에서 펼쳐지도록 지원하는 것이 기획이었다.

나는 기획보 외에도 지난 공연의 음향 덕분에 음향보도 맡았고, 배우와 스태프 간 소통과 조율을 담당하는 '진행'도 겸했다. 회장 형은 나에게 '진행의 역할은 연출 및 기획의 의도를 각 스태프에 정확히 전달하고 문제를 조율하는 것'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연습할 때 배우와 스태프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역할이 가장 컸다. 예산이 넉넉할 땐 학생 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했다. 돈은 들지만 깔끔하고 편했다. 기획이 돈을 아주 적게 투하할 때는 분장실에서 라면, 짜파게티를 직접 끓여 먹거나, 김밥으로 때웠다. 이런 연유로 나에게 ‘진행’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배우와 스태프의 영양공급이었다.


무대 뒤에 멀티플레이어, 보이지 않는 전쟁

이번 공연은 기획 팀이 무대감독의 임무까지 겸했다. 무대가 비교적 간단했기 때문이다. 나는 무대에 필요한 철조망과 베니어합판을 학교 앞 공사장에서 새벽 시간에 몰래 집어왔다. 들키면 큰일이라는 생각보다, 이걸로 무대가 채워질 거라는 기대감에 심장이 더 뛰었다. 새벽공기가 싸늘했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완전 백 미터 달리기 하 듯 학교로 뛰어갔다. 새로운 재료를 훔쳐오는 것이 아니라 한쪽에 쌓여있는 재활용을 주로 분별해서 갖고 왔다. 철조망이 손을 스쳤지만 나는 차가운 가을 새벽을 헤치고 달렸다

“혁진아, 이것으로 무대를 만든다고 상상해 봐!”

기획형이 뛰면서 외치는 그 말은 내가 ‘분명 나쁜 짓인데’ 하는 생각을 합리화할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었다. 이렇게 예산이 부족하면 공사장에서 자재를 구해오고, 정품의 화장품을 배우에게 사용하게 하고 싶지만 예산 때문에 수원 남문 시장의 좌판대의 무명 화장품을 살 수밖에 없었다. 이 화장품 사용으로 말미암아 피부 알러지가 생겼다는 배우들도 제법 있을 정도였다.

“혁진아, 내 얼굴이 왜 이렇게 되었는 줄 아니?”
얼마 전 만난 동기에 의하면 그때 사용한 화장품으로 인해 지금까지도 피부 트러블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이라면 정말 강력한 화장품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포스터를 수원 남문, 학교 앞 상가에 직접 붙기도 했다. 이렇게 보면 기획보는 거창하게 말하면 지금의 회사 경영지원실 같기도 하고 운동부에서 막내의 치다꺼리와 비슷했다. 기획의 업무는 '조율’에 있다. 라면을 먹고 싶은 단원에게 짜파게티로 설득하고 짜파게티를 먹고 싶은 단원에게 라면으로 마무리 짓는 것이다.

리허설 당일, 포스터를 붙이고 소극장에 늦게 도착했다. 연출형이 나를 반갑게 찾는다.

“혁진아, 내일부터 공연이다. 기획은 다 되었다. 오늘부터 위생병 2를 하자”

전격적인 캐스팅 제안이었다. 대사는 없다. 내가 등장하면 연극은 막을 내린다. 평소 술 잘 사주고 좋아했던 연출 형의 말 한마디는 절대적 권위처럼 느껴졌다. 거기다 동기가 거의 없는 연출 형은 이번 공연에서 몹시 외롭게 연출을 맡고 있었다. 그런 사정을 잘 알고 있고 연습이 늦게 끝날 때는 연출 형의 달동네 자취방까지 이용한 처지에서 다른 생각은 있을 수 없었다.

‘이제 배우이다!’

야전침대 뒤쪽을 손에 꽉 쥐고 위생병 2로 무대에 뛰어든다. 연극이 진행되는 내내 무대 뒤에서 장시간 기다렸다. 공연이 거의 끝나는 순간 등장한다. 분장실에서 대기 시간이 길어서 내 몸은 몹시 긴장이 되었다. 음악은 에디트 피아프의 샹송 ‘장밋빛인생’이 흐른다. 묘하게 이 음악이 전쟁터에서 어울린다 싶을 때 샹송이 갑자기 멈추고 비행기 소음과 함께 비상 사이렌이 반복적으로 울린다.

“나가자”

동기 위생병 1에 신호가 떨어졌다.

이때 위생병 1, 2가 간이침대를 들고 무대로 뛰어간다. 스포트라이트 조명이 위생병 1, 2에게 집중된다. 포탄 소리가 잇달아 터지면서 배우들은 모두 쓰러진다. 응급조치를 취하러 갔던 위생병 1, 위생병 2는 그 모습에 충격을 받으며 몸은 뻣뻣하게 굳는다. 숨도 못 쉴 것 같은 초긴장 상태에서 순간적으로 위생병 1,2에게 둥근 조명이 밝히며 꺼진다. 무대는 막을 내린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연극 ‘싸움터의 피크닉’에서는 과연 전쟁은 누구에게 이득인가 하고 관객에 묻는다.

기획 형이 홍보에 힘쓴 덕에 공연은 가을 축제 프로그램으로 편입되었고, 그 덕에 관객이 문전성시를 이뤘다. 공연이 끝난 후, 관객들은 기립 박수로 찬사를 보냈고, 분위기는 대종상 시상식처럼 뜨거웠다. 기획보인 나까지 꽃다발을 건네받아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무대 위와 밖, 두 개의 싸움터

무대 위 단 몇 초의 조명이, 인생의 예상 밖 장면으로 이어졌다. 무대 위 등장으로 소개팅 제안을 받았다는 것. 내 동기를 통해 연락이 닿았고, 그녀를 수원 남문 일대에서 최고로 유명한 ’ 남문다방‘에서 만났다.

DJ실에서 DJ가 특유의 느끼한 목소리로 마이크를 들었다.

“어텐션 플리즈! 김혁진 님, 7번 테이블에서 ‘꽃보다 아름다운 분’이 당신을 찾고 계십니다. 그녀의 눈빛은 초코라테보다 달콤하고, 목소리는 샹송보다 감미롭습니다. 새로운 연인의 탄생을 축하드립니다. 처음 만남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시작되길 바라며, 스티브 원더 "Isn't She Lovely “ 지금 흐릅니다.

오늘 밤, 이 노래처럼 빛나는 추억을 만드시길 바랍니다!"

이 만남은 내게 괜스레 우쭐한 기분을 안겨주었다.

그녀는 말했다.
"사실 공연 때 꽃다발을 두 개 샀지. 하나는 친구에게, 그리고 또 하나는 어딘가를 쓸 용도가 있을지 모르겠다는 마음에”

결국 그 꽃다발 중 하나가 나의 손에 안긴 것이다.

연극이라는 것이 누군가를 무대 위에 서게 할 뿐 아니라 무대 밖에서도 만나게 해주는 마법 같았다.

그녀와 얼마간 만남을 가졌는데 항상 계산은 직장을 다니는 그녀가 해야 했다.

그리고 어느 날 그녀는 편지 한 통과 엽서를 보내왔다.

직접 만든 나뭇잎 엽서 위에, 정성스럽게 눌러쓴 고백이 있었다.

“혁진아, 우리 진지하게 만나볼래?”

그 한 줄이, 장문의 편지 가운데 가장 빛나는 문장이었다.

하지만 나는… 끝내 답장을 보내지 못했다.

그녀는 참으로 괜찮은 여인이었지만, 나는 연극반 생활과 연애를 함께 잘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끝까지 답장을 하지 않았다. 나와 연락이 안 되자 그녀는 우리 집에 전화를 했다. 우리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 아드님은 연극반과 결혼했다고 합니다. 행복하게 잘 살라고 전해주세요. 저는 그 무대 밖에서 저만의 커튼콜을 올릴 겁니다. 아드님이 그 모습을 보며 후회하게 만들겠습니다”

그녀와의 만남은 무대 밖의 삶을 꿈꾸게 했지만, 연극반의 치열한 싸움터가 나를 더 강하게 붙잡았다


싸움터에서 얻은 삶의 기획력

대학 시절 연극반은 내 삶의 전부이자 첫사랑이었고, 무대와 기획, 공연 준비 과정은 그 어떤 데이트보다 즐거웠다. 이 경험을 통해 나는 삶의 다양한 '싸움터'를 헤쳐나갈 지혜를 어렴풋이 얻을 수 있었다.

특히 이번 공연에서 기획보, 음향보, 진행, 단역 배우까지—나는 멀티플레이어였다. 이 모든 경험의 기반엔 ’ 기획‘이라는 직책이 조용히, 그러나 단단히 깔려 있었다. 지금의 나는, 그 시절의 멀티플레이어였던 자신을 회사 안에서 다시 기획자로 마주쳤다. 대학 연극반의 경험이 내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훗날 또 다른 연극에서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이 싸움터는 나를 회사에서 기획자로 이끌었고, 무대 밖의 전략을 배우게 했다. 회사에서 S사 신제품 프로젝트를 기획하며, 나는 연극반 시절처럼 한정된 자원 속에서도 직원들의 열정을 끌어내고, 예상치 못한 위기를 조율하며 기획사를 운영하고 있다.

그 시절, 나는 무대를 세우고, 무대 밖의 삶을 꿰맸다. 그 치열한 조율의 시간들이 오늘의 나를 기획하게 했다. 연극이란 조율의 미학이다.

챗지피티가 만든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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