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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막: 저기 꽃이 떨어지는군

무대 위의 사라진 시간

by 플레이런너
2막 저기 꽃이 덜어지는군.png 챗GPT 삽화


그날의 무대는 침묵으로 시작되었다. 햇살이 강의실 창 너머로 스며들던 봄날 오후, 우리는 대망의 첫 공연을 시작했다. 최인훈 작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의 첫 무대, 무대 뒤는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했고, 나는 음향실 안에서 김토벤 형과 함께 손에 땀이 차는 걸 느꼈다.

김토벤 형은 땀을 닦으며 ‘괜찮아, 연습대로, 타이밍만 맞추면 돼’라고 속삭였지만, 그 말은 내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팝 앨범을 듣고 DJ 연습을 하던 내게, 연극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였다. 초등학교 때 보이스카우트처럼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무언가를 함께 만들어낸다는 사실이 무척 설렜다. 열정적인 신입생으로서, 나는 시그널 음악이 담긴 카세트테이프를 준비하고, 조명 사인에 맞춰 타이밍을 계산하며 내 역할에 몰두했다.

첫 장면이 시작되고, 조명이 켜지자 문소리가 울리고 배우들의 첫 대사가 강당을 가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갔다. 공연은 중반을 넘어 막바지로 향해 가고 있었다. 3막이 끝나고 무대에 조명이 켜졌다. 1초, 2초… 한 30초쯤 흘렀을까? 무대에 알 수 없는 정적이 흘렀다. 기다리던 객석에서는 옅은 술렁임이 시작되었다. 웅성거림은 이내 작은 파문처럼 번져나갔다. 1분이 지나자 그 파문은 거대한 물결이 되어 객석 전체를 뒤흔들었다.

"뭐야?",

"뭐지?" 하는 속삭임들이 귓가를 스쳤다.

그때였다. 조명이 이내 어두워지면서 암전. 정적은 다시 찾아왔지만, 아까와는 다른, 숨 막히는 침묵이었다. 곧이어 무대가 다시 밝아졌다. 하지만 무대는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연출 형은 객석 맨 뒷줄에서 몸을 일으켰지만, 엉망이 된 연극의 흐름을 멈출 수는 없었다. 급하게 조명이 다시 꺼지고 5막으로 이어지면서, 연극은 누더기처럼 급하게 마무리되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무대에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사고였다. 환한 조명 아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등장해야 할 주인공 남자 배우 A는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4막의 한 장면 전체가 마치 유령처럼 조용히 사라진 것이다. 공연은 어떻게든 끝났고, 허탈함 속에서 커튼콜도 마무리되었다. 우리가 밤낮없이 준비했던 무대는 결코 완성되지 못한 채 막을 내렸다.

연출형은 무대 앞으로 모든 연극반원을 불러 모았다. 분장도 지우지 못한 배우들, 그리고 조명과 음향 장비를 정리하던 스태프들까지, 우리는 하나둘 조용히 무대 앞 객석에 앉았다. 연출형은 침묵을 깼다.

"오늘 모두 수고 많았어."

그의 목소리는 의외로 낮고 담담했지만, 누구도 안도의 숨을 내쉬지 못했다. 그는 조용히 A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 오늘 왜 안 나왔니?" 그 순간, A의 어깨가 움찔했다.

"죄송합니다. 정신이 멍해서 무대 뒤에서 타이밍을 놓쳤습니다 “라며 목소리를 떨었다.

죄송하다는 말을 내뱉는 그의 입술은 바싹 말라붙었고, 온몸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연출형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한 박자 뒤, 그의 목소리는 더욱 낮고 선명해졌다.

"너는 오늘, 장면 하나를 없앤 거야. 그냥 한 장면이 아니라, 이 극의 중심을 놓친 거라고."

사람들의 시선이 A에게 쏠렸지만, 누구도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텅 빈 무대 위, 어쩔 줄 몰라 헤매는 조명처럼 모두의 시선만이 바쁘게 움직였다.

"연극은 혼자 하는 게 아냐. 무대 위 배우만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야. 음향, 조명, 무대, 진행, 전부가 유기적으로 맞물릴 때 살아나는 예술이야. 그런데 그걸, 네가 끊어낸 거야."

연출형의 말은 야단이라기보다는 차가운 선고에 가까웠다.

"남자 주인공, 원래 네가 두 번, 후배가 한 번이었지. 바꾸자. 후배가 두 번, 네가 한 번으로."

그 말은 A의 출연이 오늘로써 끝이라는 얘기와 다름없었다. A는 고개를 들지 못했고, 후배 몇 명은 슬며시 눈을 돌렸다.

그리고 연출형의 시선이 나에게 날카롭게 향했다. 그의 눈빛에는 무대가 무너진 아쉬움과 다잡으려는 다급함이 섞여 있었다.

"마을 사람들, 춤을 못 춰도 동작을 자신 있게 해. 엉거주춤하지 말고."

갑자기 매를 맞는 듯한 기분이었다. 사실 나는 3막까지 음향을 담당하다가, 4막부터는 마을 사람 역할로 무대에 올랐다. 음향실에서는 타이밍만 맞추면 됐지만, 무대 위에서는 내 몸짓 하나하나가 관객의 눈에 고스란히 노출된다. 어디를 쳐다봐야 할지도 모를 정도로 긴장이 되었다. 음향실에서 심장이 뛰며 시작된 열정이, 이제 무대 위에서 두려움으로 바뀌고 있었다.

‘저기 꽃이 떨어지네’라는 대사에서 꽃이 그 아름다움의 정점에서 무상함의 운명을 암시하듯, 나의 엉성한 춤은 혹 관객에게 실망을 줄까 두려웠다. 나는 어색한 몸짓으로 춤을 추었다.

"앞으로 공연이 남아 있어. 그때까지 긴장하자."

연출형은 그렇게 말한 뒤, 돌아서서 나갔다. 조용히, 조명이 꺼진 듯한 정적이 무대 앞을 감쌌다. 연극은 대사가 아니라, 지켜야 할 시간이었다. 우리는 텍스트가 아니라 약속 위에 서 있었고, 그 약속은 무대 위의 대사보다 더 무거운 언어였다.

다음 날 공연 준비를 위해 소극장에 공연 시간 몇 시간 전에 도착했다. 동기들이 이미 무대 한쪽에서 몸을 풀고 있었다. 우리 동기들이 전부 마을 사람들이었다.

“야, 너 아직도 그 동작 헷갈리냐?” 한 동기가 웃으며 내 어깨를 툭 쳤다.

“아직도? 넌 진짜 몸치구나!”

“오늘이 공연날인데?”

다들 장난스럽게 구박하면서도, 틀리면 같이 다시 맞춰주고, 박자가 어긋나면 서로 눈을 마주치며 웃으면서 어설픈 내 춤 동작을 함께 만들어 갔다. 동기들의 리듬에 맞춰 발을 내디딜 때마다, 내 안의 어색함과 두려움과 싸우는 또 다른 무대가 펼쳐지고 있었다.

“이렇게 매일 춤추다 보면, 우리 진짜 마을 사람이 되는 거 아냐?”

누군가 농담을 던지면, 모두 피식 웃으며 다시 동작을 반복했다. 엉성한 몸짓이지만, 함께 견디는 이 시간이 동기사랑처럼 든든하게 느껴졌다.

회사 업무는 반복이다. 연극 또한 단순한 반복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그 단조로움을 끈기 있게 견뎌내는 것이 연극의 본질임을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동기의 미소와 관객석의 박자 박수가 얽히며, 무대가 내 편이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덕분에 두 번째 공연 날 내 춤은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열차는 그렇게, 첫 작품 음향과 마을 사람이라는 경험을 남기고 다음 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한편, 선배 A가 동아리를 옮겼다는 소문이 돌았고, 나는 그의 부재가 궁금했지만 아무도 길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 선배 A는 동아리방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고, 나는 여전히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지금 돌이켜보면 연극은 협업의 예술인데 배우 또는 스태프 중에 누구 한 사람이라도 이 장면 때 A에게 무대 등장의 신호를 주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연극 포스터에는 공연 시간이 적혀 있다. 관객이 없다고 해서 공연을 늦출 수도, 준비가 덜 됐다고 공연을 미룰 수도 없다. 그 시간에 맞춰 무대에 오르는 것, 그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약속이다. 이렇게 보면 연극이란 보이지 않는 사람과의 약속이며 새로운 것을 실천해 보는 도전이다.


#최인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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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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