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회, 그리고 非常한 祝宴
"내년도 회장은 당연히 革進(혁진)이가 해야지. “
선배와 동기들이 술자리에서 한 마디씩 했다.
”넌 잘할 거야!"
소주잔 위를 넘나들며 가볍게 던진 말들이었지만, 어쩐지 그 말이 자꾸 귀에 맴돌았다.
오늘이 바로 연극반 '씨앗‘ 회장을 뽑는 총회가 있는 날이다. 회장 형이 사회를 보고 있다.
“우선 내년도 연극반 씨앗을 이끌 회장을 추천받겠습니다.”
“상혁이를 추천합니다”
총회 시간이 점차 흘러도 후보는 동기 상혁이 하나뿐이었다. 선배 한 명이 손을 든다.
“현 회장을 추천합니다. 일 년 더하세요”
결국 아무도 나를 추천하지 않았다.
술김에 한 말이었나? 아니면 다들 눈치 보면서 상혁이를 밀어준 건가?
하여간, 술자리의 분위기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동기 상혁이가 회장이 되는 건 시간문제로 보였다. 사실상 단독 후보였다.
현 회장은 군대 간다고 바로 사퇴했다. 시간이 점차 흘러도 내 이름을 추천하는 씨앗인은 없었다. 술자리에서 선배들이 던졌던 “혁진이가 해야지”라는 말은 그럼 뭐였을까? 상혁이의 이름만 오르내리는 총회에서, 갑자기 나는 점점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정말 회장을 할 자격이 있는 걸까? 그때 회장 형이 갑자기 내 이름을 불렀다.
“혁진이를 추천합니다.”
그 한마디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희망과 부담의 기대가 뒤엉킨 묘한 떨림이었다. 마감 직전에 추천받아 어엿한 후보가 될 수 있었다. 이제 일대일의 승부였다.
“다음은, 회장 후보자의 내년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시간입니다. 순서는 가나다 순입니다. 혁진 후보님 먼저 부탁합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이 내가 말한 전부였다.
평소 말솜씨가 좋았던 상혁이는 나와 달리 동아리 예산 증액, 신입 회원 질적 증가, 동아리방 쾌적한 환경 조성, 씨앗인 축제 등을 공약하며 상당히 그럴듯하게 연설했다. 상혁이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씨앗인을 사로잡았다. 나는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묘하게 주눅이 들었다.
“책상에 나눠 준 용지에 투표 부탁합니다. 지지 후보 이름을 적어주세요. 자기 이름을 적으면 절대 안 됩니다”
회장 형의 유머에 잠시 웃음이 나왔다.
개표 결과는 의외였다. 후보로 뜸을 들인 것이 무색할 정도로 싱겁게 내가 당선됐다.
어리둥절한 축하 소란 속에서, 회장 형이 잔을 들고 말했다.
“신임 회장님! 내가 추천 안 했으면 너, 회장 못 됐어. 알지?”
장난처럼 웃으며 던진 말이었지만, 그 말에는 묘하게 진심이 실려 있었다.
“웃자고 하는 얘기 같아도, 이 말은 꼭 해주고 싶었어. 네가 아니면 안 된다고, 다들 그렇게 생각했어. 나는 그냥 그 마음을 대표해서 말했을 뿐이야.”
그 말은 겉으론 나를 치켜세우는 듯했지만, 그 말속에는 어딘가 모르게 생색이 담겨 있었다.
마치 이제부터는 나에게 넘겨진 깃발처럼, 웃음 뒤에 조용히 건네는 바톤 같았다.
선배 누나가 덕담을 건넸다.
"씨앗 회장은 하기 나름이지만, 대통령 이상으로 바쁜 자리야. 연극반은 회장 역할에 달려 있어." 그 순간, 상혁이를 추천했던 선배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혁진아, 내가 좀 눈치가 없었나 봐. 다들 너를 밀고 있었는데, 내가 상혁이를 추천해 버렸네. 미안하다. 축하해! 앞으로 잘 이끌 거라 믿어.”
이 말속에는 사실 동기들이 나를 밀었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믿고 그동안 달려왔던 것이다. 막중한 부담에 마음이 아득해졌다. '모두의 뜻'이었다니.
이어서 회장 축하연 파티가 기숙사 식당에서 열렸다. 기숙사 식당은 기숙사 내에 있는 식당이 아니라, 주인장이 기숙사 직원이라 붙은 이름이었다. 가성비 단연 최고의 연극반 단골 식당이었다. 거기서 성대한 회장 당선 축하 파티가 열렸다. 시작과 함께 상혁이가 내쪽으로 와서 손을 내민다.
"혁진이는 잘할 거야!"
"곧 연극반의 르네상스가 열리겠네."
"이제 나도 회장과 가깝게 지내야겠다."
기분 좋은 말의 잔치로 축하 잔은 계속 부딪쳤다.
내 아버지의 아들답게, 잔이 오면 마셨고 또 마셨다.
어느새 스무 잔이 넘었고,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취기가 서서히 피어올랐다.
축하연의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회장 형이 갑자기 나를 불렀다.
“씨앗의 전통은 현 회장이 차기 회장에게 술을 거나하게 사는 것이 역사적 전통이다. 두 명은 증인으로 함께 가자, 그냥 따라와. 형 믿지? (나를 보며) 혁진아, 오늘 밤은 좀 극적으로 축하해 줄게, 그냥 즐겨. 근데 딱 하나만 기억해. 회장은 망설이면 안 돼. 무대 위든, 술자리든, 뭐든”
대로변에서 호기롭게 건넨 그 다운 이야기였다. 회장 형 동기 한 명과 내 동기까지 총 네 명이었다. 2차는 학교 앞 큰 대로변에 있는 술집이었다. 누군가 치밀하게 연출한 세트장 같은 공간이었다.
남자 종업원이 깍듯하게 안내한 방은 샹들리에에 찬란한 조명으로 꾸며져 있었다. 남자 넷이 앉자마자 그 화려한 분위기가 확연히 느껴졌다. 특히 나머지 세 명은 어리둥절해서 어쩔 줄 몰랐다. 회장 형은 남자 종업원에게 망설임 없이 주문을 했다.
"1차에서 술 많이 먹었어요. 축하 자리입니다. 예쁜 아가씨로 부탁합니다. 특히 오늘의 주인공에게."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들지도 못했다. 잠시 후, 아가씨 네 명이 방으로 들어왔다.
회장 형이 알아서 정리를 해주었다. 내 옆에도 아가씨가 앉았다.
며칠 전, 동작동 J대학교에 다니는 친구는 내게 룸살롱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펼쳤다. 참 재미있게 들었는데, 지금 내가 직접 그 상황을 겪고 있다. 내 옆에 앉은 아가씨가 다리를 꼬며 내게 말을 건넨다.
아가씨: (회장 형을 가리키며) 저쪽 오빠가 오빠 회장 됐다고 하던데, 무슨 회장이야?
나: (목소리가 떨리며) 연극반… 음, 연극반은 재밌는데, 이제 회장이니까 좀 부담돼요. 다들 기대가 크고…
아가씨: (웃으며) 오빠, 진짜 순진해 보인다. 회장이면 사람들 앞에서 당당해야지. 여기 와서도 이렇게 쑥스러워하면 어떡해?
나: (당황하며 웃으며) 하하, 그런가요? 무대 위에선 대본이 있어서 괜찮은데, 여기선… 대본이 없어서 좀 어색하네요.
아가씨: (고개를 끄덕이며) 근데 오빠, 연극반 회장이면 무대 위에서 사람들 시선 받는 거 익숙하지 않아? 여기서도 똑같아. 그냥 좀 더 화려한 무대일 뿐이야. 나중에 공연 있으면 꼭 초대해 줘!
나: (당황하며) 아… 네, 그럴게요.
나는 내 옆에 앉은 아가씨와 마치 미팅을 하는 것처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짙은 화장품에서 풍기는 냄새는 왠지 모르게 나를 자극했다. 화장품 냄새 너머로 분명 여자라는 생생한 감각이 전해졌지만, 그 묘한 불편함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손을 잡고도 싶었고, 드라마에서 보던 스킨십이라도 시도해 보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저 쑥스러운 듯 머리만 긁적일 뿐이었다. 슬쩍 보니 회장 형은 이미 이 무대의 주인공 같았다. 하지만 나와 다른 두 명은 어색함에 몸 둘 바를 몰랐다. 분명 축하연의 연장 선상에 있는 축제 같은 분위기였지만, 나는 그 한가운데서도 묘하게 이방인처럼 느껴졌다. 이런 자리가 대학생들 사이에 종종 있다는 '전설'은 들었지만, 실제로 경험하는 것은 낯설고 어색한 충격이었다.
내 순진한 세계와는 너무도 다른 이 공간에서, 나는 알 수 없는 혼란과 함께 새로운 세상의 단면을 어렴풋이 마주하고 있었다
아가씨와 대화가 조금 편해질 때쯤, 회장 형이 나가자고 했다.
아가씨 네 명이 방에서 나갔다.
“혁진아, 내 옆에 앉았던 아가씨가 최고 미인이었어. 말 안 해도 알지?" 회장 형의 너스레였다.
내 옆에 앉았던 여인의 모습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그런데 막상 조금 전 그 아가씨의 얼굴이 좀처럼 그려지지 않았다.
취기인가? 처음 주문을 받은 남자 종업원이 다시 들어왔다. 회장 형은 자신 있게 특유의 거칠고 능글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돈은 없어요. 대신 책가방을 맡기겠습니다. 책가방 없이 학교 다닐 순 없으니 금방 갚겠다는 뜻입니다."
회장 형이 책가방을 내밀며 호탕하게 웃는 모습을 보니, 나는 순간 얼떨떨했다.
이게 단순한 객기일까, 아니면 회장직의 무게를 짊어지게 하는 일종의 의식일까? 이 자리가 정말 축하 자리인 걸까?
모든 것이 환호와 농담, 그럴듯한 웃음으로 포장된 연극 같았다. 나는 그 안에서 한 줄의 대본 없이 리더로서의 첫 연기를 시작한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내가 앞으로 감당해야 할 책임의 첫 장면이었는지도 모른다.
회장 형이 책가방을 맡기는 모습은 단순한 호기로움이 아니었다.
“혁진아, 당황했니?"
위기 속에서도 기지를 발휘하는, ‘어떻게든 해내겠다’는 선언이었고, 회장의 무게감을 상징하는 의식이었다.
나도 훗날 후배에게 똑같은 방법으로 선물을 해주어야 하는 걸까? 하여간 회장의 임무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어쩌면 연극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끝없는 리허설이고 리더란, 그 리허설을 먼저 시작해 보는 사람이아닐까?
#회장
#연극반
#선거
#리더
#리허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