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기둥으로 세울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1장 봄을 잇는 기획
'유리동물원'의 흥행으로 ‘씨앗’은 안팎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교내 학보의 우호적인 칼럼과 근처 고등학교 연극부 M 선생의 신문 호평이 잇따르자, '씨앗' 동아리원들의 마음은 한껏 들떴다. 전교생 4천 명 중 3회 공연에 천 명 가까이 관람했고, 배우들은 캠퍼스에서 '저 사람 유리동물원 배우래'로 불리며 주목받았다. 이런 분위기를 차기 공연에서도 이어가야 한다는 것이 ‘씨앗’ 내의 여론이었다.
다행히 차기 공연 연출을 하고 싶어 하는 씨앗인들이 곳곳에서 생겨났다. 그중에서도 특히 J형이 적극적이었다. ‘씨앗’ 역대 배우 중 남우주연상을 놓고 늘 1, 2위를 다툴 정도로 연기가 탁월한 선배였다. 어떤 선배는 J형의 연기를 '대학가 연기 이상'이라고 평할 정도였다. 그는 회의 전 나에게 씨앗인들의 연기 성장과 배움을 위해 지금까지와 다른 방식의 연출을 하고 싶다고 알렸다. 실력 있는 선배가 맡아준다니 든든했다. 고되더라도 다시 기획을 맡아 지금의 ‘씨앗’ 분위기를 더 끌어올리겠다고 다짐했다.
캠퍼스 벚꽃이 활짝 핀 봄날, 연출을 선정하는 총회가 동아리룸에서 열렸다. 사회자로서 나는 J형에게 먼저 발언권을 부여했다.
"내가 후배들의 연극 성장과 발전을 위해 연출을 맡겠다. 작품은 지금 고민하고 있다. 연극 연습은 일요일 제외한 일주일에 여섯 번, 이번 연극은 연출이 끌어가는 연극이 아닌 조연출과 참여하는 배우들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연극이다.
J형의 말에 모두들 거의 기립박수와 같은 성원을 보냈다. 기존과 다른 방식일 거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J형은 말은 계속 이어졌다.
"이런 새로운 시스템에서는 연출은 없어도 큰 지장이 없다. 난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연습에 참석할 예정이다."
J형의 마무리 발언은 내게 크나큰 충격이었다.
연출 없는 연극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연기력이 뛰어난 선배에게 감히 내가? 하는 망설임도 있었다. 게다가 J형은 인간적으로도 내게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의 말에 반박하려던 순간, 지난 공연에서 내게 건넸던 말이 떠올랐다.
“혁진아, 무대 밖의 연기는 네가 최고였어.”
J형, 그 말이 전 공연의 찬사에 취한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정말 '연극은 배우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확고한 철학에서 나온 것인지, 나는 쉽사리 판단할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유가 무엇이든, 주 1회만 참석하는 연출은 ‘씨앗’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위험한 모험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만큼은 그 흐름을 막아야 했다.
2장 기둥을 둘러싼 논쟁
그 순간, 오래전 읽은 소설 “대지의 기둥”이 떠올랐다.
중세의 장인들이 몇십 년에 걸쳐 돌을 다듬고 기둥을 세워 올리던 대성당 이야기였다. 각 기둥은 서로의 무게를 나누어 받으며 건물을 지탱했고, 단 하나라도 빠지면 웅장한 구조 전체가 무너질 수 있었다.
나는 그 장면 속 장인을 떠올렸다. 땀으로 젖은 손바닥, 무거운 돌을 얹으며 그가 중얼거렸던 말.
“기둥이 서 있지 않으면, 성당은 신의 집이 아니라 무너진 꿈이 된다.”
씨앗의 무대도 그와 같았다. 연출은 이 무대의 기둥이었다. 그 한 기둥이 빠지면 모든 배우와 스태프, 그리고 우리가 함께 쌓아 올린 시간까지도 무너진다. 그를 좋아했기에 내 목소리는 더욱 떨렸고, 마음은 한없이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힘주어 천천히 말했다.
“아무리 의도가 좋아도, 연출이 없는 연극은 있을 수 없습니다, 형!”
J형은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의 진한 눈빛은 더욱 날카로워졌고,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연극은 내가 제일 경험이 많아. 잘 안다고! 이런 방식이 진정한 성장을 위한 길이야!"
"형의 뜻은 알겠지만, 그건 너무 위험합니다. 씨앗의 체계가 무너질 수도 있어요. 연극은 혼자 만드는 게 아닙니다!"
이때까지 대다수의 씨앗인들은 조용히 있었다. 두 가지 의견으로 나누지도 않았다. J형과 타협하기를 바라는 침묵으로 느꼈다.
J형은 연극 대사를 읊듯, 특유의 중후한 목소리를 풀어냈다.
“셰익스피어 시대엔 연출이 없었지. 배우들이 작품을 직접 끌고 갔어. 브레히트도 권위적인 연출 대신 협업을 중시했어.”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무심코 내뱉었다.
“이론으론 가능할지도 모르죠.”
J형은 미간을 찡그렸다가, 곧 미소로 덮었다.
“그게 이론이 아니라 시대적 흐름이야. 아직 그걸 모른단 말인가?”
나는 더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실험극을 하자는 말씀이신가요?”
J형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을 이어갔다.
“배우들이 대사와 동작을 직접 고치고, 제안하며 작품을 만드는 거야. 조연출이 틀만 잡아주면 돼. 나는 주 1회 점검하고, 시행착오는 있겠지만. 미국의 실험극단 리빙 시어터처럼 그 혼란 속에서 배우들은 길을 찾을 거야. 결국 무대는 그들의 손에서 완성되지.”
설명이 매끄럽고 자신감에 차 있었다. 나는 숨을 고르며 맞섰다.
“형, 그건 훈련된 배우들이나 가능한 일이잖아요. 우린 아직 학생이고, 시간도 부족하고요.”
J형은 잠시 시선을 떨구더니 이내 다시 고개를 들었다.
“혼란이 생길 수 있다는 건 알아. 하지만 분명한 건, 연극은 배우가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한다는 거야. 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야. 연극을 대하는 예술관, 그리고 세계관의 차이일 뿐이지.”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때 S형이 나를 바라보며 짧게 말했다.
“그 얘기는 지금 우리에겐 너무 어려운데? 회장이 말한 대로, 매일 함께하는 연출이 필요해.”
회의실 공기가 서서히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J형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의 주먹이 테이블 아래에서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그는 앉아 있던 의자를 거칠게 박차고 일어섰다.
"안 해!"
짧게 내뱉은 그의 말은 회의실의 공기를 단숨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J형은 우리를 향해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쾅!’
순간 회의실의 공기는 무대 조명처럼 꺼졌다. 누군가의 손끝에서 떨어진 펜이 바닥을 구르며 딸깍 소리를 냈다.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회의실 안에는 J형의 발자국 소리가 계속 울리는 듯했다. 누군가는 볼펜을 돌렸고, 누군가는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회의가 재개되었을 때, 몇몇 씨앗인들이 내게 고개를 끄덕이거나 격려의 눈빛을 보냈다.
P형이 조용히 말했다.
“J형 말대로 하면 정말 배우들이 더 창의적으로 변할지도 몰라. 그런데 연출 없이 배우들끼리 하려면 시간도 더 걸리고, 서로 싸울 수도 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J형의 비전은 매력적이지만, 우리에겐 아직 그걸 감당할 경험이 부족했다.
여성인 동기 K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J형 말대로 하면 재밌을 것 같긴 한데, 우리끼리 하다 보면 대본도 못 정할까 봐 걱정돼.” 그녀의 말에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에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든든한 지지였다. J형과의 대립 이후, 한동안 그와의 거리감은 피할 수 없겠지만, 역설적으로 나를 응원해 주는 씨앗인들이 다수 늘어났다는 사실은 부담감이나 외로움보다 큰 힘이 되었다. 나는 이들을 위해 더 '씨앗'에 미쳐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이토록 첨예하게 대립했던 J형과 훗날 그의 연출작에서 배우로 만나 다시 가까워지리라는 것을.
J형의 대안을 찾기 위해 많은 선배, 동기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두들 학기 중의 연극이라고 거절했다. S형과 매일 새로운 연출을 정하는 문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둘의 합집합 인물이 발견되었다. 상당한 설득 끝에 주로 복학생이 하던 연출을 현재 3학년에 재학 중인 H형에게 맡겼다. H형은 J형의 주장처럼 연출을 최소화한 무대를 몸소 시험해 보겠다며 나섰다. 소박하게 말을 줄이는 연출을 하겠다고 첫날 선포했다. 다른 점은 매일 연습에 참여해서 함께 만들고 의견을 나누겠다고. H형의 방식은 실험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새로웠다. 무엇보다 배우들의 목소리를 여러 결로 끌어냈다. 작품은 S형이 추천한, 이강백의 『알』이었다. 알은 부당한 권력의 탄생과 유지, 민중의 무지와 부화뇌동을 풍자하는 희곡이다.
드디어 공연 연습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기대했던 처음 목적과는 달리 연습이 깊어질수록 연출은 말이 많아졌다. 공연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알』이 던진 질문처럼 연출의 권위와 배우의 자율 사이의 장력도 함께 팽팽해졌다.
3장 ‘알’ 속의 균열
“퍽, 퍽, 퍽”
갑자기 터져 나온 빳다 소리에 연습장이 얼어붙었다. 엎드린 배우들의 어깨가 떨렸고, 한 배우는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참았다. H형은 땀이 맺힌 손을 무릎에 얹은 채, 소극장이 울리 정도의 큰 목소리로 말했다.
“정신 무장이 필요해. 긴장을 최대한 끌어올려야 한다고”
연출 없는 연극을 주장한 J형이 낙마하고 연출을 맡은 H형의 돌변은 기획인 나로서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H형은 연습 내내 감정이 고조되어 있었다. 배우들의 작은 실수에도 목소리를 높이며 지적했다. 동기인 배우가 잠시 말끝을 흐리거나 눈길을 피하는 순간마다, 그의 자리는 점점 ‘선배’가 아니라 ‘권위자’의 자리가 되어갔다.
연출을 갑작스럽게 맡게 되어서 연출에 대한 준비 부족도 한몫을 한 듯했다.
이런 원인 때문에 연출과 배우 사이에 조정과 균형이 필요했다. 배우들은 처음엔 H형의 채벌에 당황해했다. 나의 부탁으로 연출과 동기이자 ‘알’에서 박물관장 배역을 맡은 D형이 연출과 배우 사이를 오가며 중재 역할을 맡았다. 그는 대화와 행동으로 함께 갈등을 풀어나갔다.
‘알’에서 박물관장은 ‘알’이라는 허구의 상징을 이용해 공포와 이상을 조작하며 권력을 잡는다. ‘알’의 권력 조작과 H형의 연출은 묘하게 닮아 있었다. 나는 기획으로서 연출과 배우의 균형을 고민했다.
결국 배우들의 공연에 대한 헌신과 기획자인 나의 말을 믿고 따라주는 씨앗인들 덕분에 갈등은 봉합되었다. 박물관장 역 D형의 제안으로 연습은 다시 활기를 띠었다.
덜컹거리며 봄 공연을 향하던 씨앗의 열차는 다시 새롭게 박차를 가하였다.
학술제 공연에서 알의 마지막 장면, 박물관장의 거짓이 드러나는 순간은 관객들의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배우들은 H형의 권위적 연출 속에서도 자신들의 목소리를 무대에 녹여냈다.
연출 교체의 혼란은 공연 연습보다 더 무거운 짐이었지만, 우리는 그제야 깨달았다. 무대를 세우는 기둥은 누구 하나의 권위가 아니라, 모두의 손길이었다. 연극은 누군가의 의지를 꺾는 일이 아니라, 서로의 뜻을 맞대어 기둥처럼 세워 올리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