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의 꽃 배우에 도전하다!
1장 “파로호 MT, 새로운 도전의 서막”
‘나가자 디디에’는 여름방학 파로호 MT에서 탄생했다.
씨앗인들과 소주잔을 기울이며 나는 연출 M형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 가을 공연은 프랑스의 대표적인 극작가인 장 아누이 (Jean Anouilh)의 희곡 『도적들의 무도회』, 겉으로는 고상한 척하지만 타인의 감정과 기회를 교묘히 훔치는 상류층을 풍자하는 희곡으로, 도둑과 귀족, 연인들이 얽히며 벌어지는 소동을 그린다. 무엇보다 배우가 여럿 등장하고 대사 있는 배역도 제법 있었다. 그 점에 착안해서 배우에 도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나 역시 연출 M형의 마음을 훔치려는 듯, 뒷머리를 오른손으로 긁으며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형님, 저… 이번에 배우를 하고 싶습니다.”
늘 무대 뒤, 기획이나 음향만 맡아왔던 내가, 드디어 대사가 있는 배우를 하고 싶다고 청했다. 삼촌의 영향으로 연극반에 들어왔지만 ‘연극의 꽃’인 대사 있는 배우를 해보지 못했다. 배우가 해보고 싶었다. 대사가 조금이라도 있는 배우 말이다.
“형님, 저… 이번에 배우를 하고 싶습니다.”
연출 M형은 검정 안경을 치켜올리며 냉정하게 말했다.
“혁진아, 너는 배우 안 해봤잖아. 거기다 넌 회장이야. 니가 못한다고 뭐라 하기도 그렇고 위험부담이 커. 니가 배우를 하는 건 연출한테는 그 자체가 리스크야.”
맞는 말이었다. 그래도 한 번 먹은 마음이라 쉽게 물러서기는 싫었다.
“혼내셔도 됩니다. 욕하셔도 됩니다. 그냥…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무릎만 꿇지 않았을 뿐, 내 태도는 애원에 가까웠다.
“정말, 욕해도 괜찮겠어?... 좋아!”
연출 M형의 말과 함께 떨어진 나의 배역 두뽕부, 대사는 많지 않았지만 존재감 있는 양념 같은 인물이었다. 씨앗 입단 다섯 번째 공연, 마침내 대사를 가진 배우가 되었다. 파로호의 호숫가 바람처럼, 내 새로운 도전이 시작됐다.
2장 “다시, 다시, 다시”
캠퍼스에 단풍이 붉게 물든 어느 날, 대사 리딩이 한창이었다. 특별한 지적 없이 연습이 진행되어 나름 순항 중이라 생각했다. 웬걸, 날벼락이 떨어졌다.
“두뽕부, 어쩜 그리도 책을 잘 읽니? 국어 책 읽어? 내가 뭐랬어? 배우는 아니라고 했잖아? 내가 말을 안 한 게 잘해서 안 한 줄 알아? 기본이 전혀 안되어있어?”
순간 내가 공연의 수준을 떨어뜨리는 건 아닐까 두려움이 엄습했다. 나를 제외한 모든 배우들의 리딩과 몸짓은 자연스러웠다. 그저 부럽기만 했다. 연출 M형은 더 세게 몰아붙였다.
“‘나가자 디디에!’ 할 때 관객들이 웃는 건 바라지도 않아. 지금 넌 아예 캐릭터 자체가 없어.”
“저런 저기 레이디 하이프가 오는군.”
시원하게 밖으로 나와야 할 대사가 자신 없게 속에서만 맴돌았다.
“두뽕부, 대사가 안 들려”
“두뽕부, 하이프가 아니고 하아프냐?”
“다시. 다시. 다시.”
조연출의 지적은 연습이 더 진행될수록 직설적이었다.
입술이 바짝 말랐다.
내 차례의 대사가 끝나자마자 연출 M형에게 고개만 숙이고 곧장 연습실 문을 나섰다.
캠퍼스를 무작정 내달렸다.
답이 시급했다.
처음부터, 다시.
우선 두뽕부라는 캐릭터를 다시 파악해야 했다.
두뽕부는 사채업자로 돈을 벌었지만, 겁 많고 속물적인 금융가 아버지다. 그러나 아들 디디에를 향한 부성애는 그를 인간적으로 만들었다.
끝부분 대사 “나가자, 디디에”에는 도둑질을 앞둔 아버지의 긴장감과 동시에 아들을 지키려는 마음이 뒤섞인 순간을 아주 잘 보여준다.
이런 인물 분석을 토대로 나는 두뽕부의 대사만 따로 복사해 들고 다녔다. 버스 안, 지하철 안에서 연습했다.
‘마, 바, 사, 카, 파’
발음 기초를 위해 아나운서가 한다는 발성법을 따라 했다. 입을 최대한 크게 벌리고 소리 내어 발음했다. 복부에 크게 힘을 주며 긴 호흡으로 ‘아—’를 길게 내뱉었다.
이게 바로 복식 호흡이다. 입을 최대한 벌려 주변 근육을 풀어주듯, 입술·턱 벌리기 같은 얼굴 체조를 습관적으로 했다.
리딩, 무대 블로킹(무대에서 걷기)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나는 지속적으로 연기에 대한 변화를 주려고 했다.
어느 날, 새로운 시도를 했다.
“나—가자. 디—디—에.”
‘나’를 내뱉고 한 박자 쉬었다. 그리고 ‘가자’를 천천히, 겁에 질린 사람처럼 띄엄띄엄 뱉었다. ‘디디에’라는 이름은 마치 아들을 지키려는 두뽕부의 간절함을 담아 떨리듯 뱉었다.
연출 M형이 살짝 미소 짓는 듯했다. 그 짧은 표정이 내게는 합격 통지서 같았다. 최고참 S형 격려도 조용히 힘을 보탰다.
“혁진아, 점점 나아지고 있어.”
그 말에 나는 다시 용기를 냈다
몇 주간의 연습 끝에, 나는 두뽕부의 목소리를 조금씩 찾아갔다.
3장 “나가자, 디디에” — 주문이 되다
최고 선배 S형이 배우들을 무대로 불렀다. 둥그렇게 원을 그리며 함께 기도했다.
“형, 심장이 두근두근 뛰어요.”
“바로 그 맛에 배우 하는 거야. 안 떨리면 재미없어.”
분장실로 돌아온 나는 안절부절, 마치 좁은 우리 안의 강아지 같았다. 앉았다 일어났다, 괜히 소변통을 들썩이다가 다시 지퍼만 올렸다 내렸다. 기다림은 떨림과 초조였다. 난 3막부터 출연한다. 고로 무대에 등장하려면 1시간 정도의 기다림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인도 영화 '신상(神象)'의 주제곡 ‘키쇼르 쿠마르’의 경쾌한 음악이 무대에 울려 퍼지며 두뽕부자는 무대에 등장한다.
무대 가운데 이를 때 조명 전체가 켜지고 내 눈에 관객이 비로소 보였다.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꿰뚫었다. 순간 당황했지만, 나는 분주했다. 대사를 던지고 약속된 동선대로 움직이는 데 온 정신을 쏟았다.
멜빵바지에 가냘픈 복장을 한 아들 디디에가 앞장섰다. 그 뒤를 검은 셔츠에 검은 바지, 빨간 나비넥타이로 멋을 낸 두뽕부가 뒤따랐다. 머리에 두른 작은 손전등의 작은 불빛을 의지하며 둘은 큰 폭으로 한 발 한 발 내닫는다. 한 손으로는 벽을 훑으며, 어둠 속을 더듬어 나아갔다.
“나—가자. 디—디—에”
순간 객석에서 터져 나온 웃음. 시간이 멈춘 듯했다. 관객이 내 대사에 반응을 해서 웃었다. 친구와 대화를 할 때 내 이야기에 반응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대중들의 반응이었다.
첫날은 여유 없이 곧장 대사를 이어갔지만, 둘째 날부터는 한 박자 쉬었다. 관객의 호흡을 느끼며, 그들의 숨결이 내 대사를 더 부드럽게 만들었다.
“아, 디디에, 너 참 똑똑하구나 넌 네 늙은 애비를 살려줬어. 안 아다오.”
두뽕부가 온 힘을 다해 던지는 무대 위 마지막 대사. 디디에 역은 나의 동기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진짜 아들 같은 느낌이었다. 우렁찬 목소리를 외치며 디디에를 끌어안았다. 퇴장하는 두뽕부자에게 관객들은 박수를 보낸다. 무대가 진짜 세상이 되었다
이제 편안한 호흡으로 분장실로 향했다.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어. 물건을 훔치는 사람과… 감정을 훔치는 사람.”
무대 위 실제 대사를 음미하며 나만의 두뽕부 대사가 만들어졌다.
두뽕부처럼, 무대에서 '감정을 훔친' 기분이었다.
무대 위에서 느낀 것은 단순한 연기가 아니었다.
기획자가 무대를 설계한다면, 배우는 그 무대를 살아내는 사람이다.
도적들의 무도회는 ‘씨앗’ 최고의 흥행작이었다. 친한 동기 지성이가 맡은 기획은 팸플릿이 모자라 공연 중에 추가로 제작할 정도로 관객이 넘쳤다. 계단과 무대 앞까지 가득 찬 소극장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아일랜드』, 『카사블랑카여 다시 한번』. 『유리동물원』, 『느릅나무 밑의 욕망』, 같은 유명 대작이 아님에도 이런 바람을 일으킨 건 불가사의하다. 그러나 분명했다. 기획의 열정과 기도는 빛을 발한다
공연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채 집으로 돌아갔다. 이틀 동안 그 순간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웃음, 시선, 부성애. 이제 두려움 대신 가슴에 피어오른 건 작은 자신감이었다. 그 자신감으로, 다음 도전을 꿈꿀 수 있었다
그리고 월요일, 동아리룸에서 품평회가 열렸다. 연출 M형이 말했다. “두뽕부는 연습 기간 동안 끊임없이 변신하려 노력한 점이 인상적이었어. 처음엔 리스크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보니 잠재력이 가장 기대되는 배우야. 연습할 때 엄격함 뒤에 숨긴 건, 두뽕부처럼 성장하는 걸 보고 싶은 마음이었지.”
S형이 웃으며 덧붙였다.
“맞아, 혁진아. 나처럼 배우를 오래 해본 놈이 봐도 그 부성애는 진짜였어.”
이때 품평회에 참석한 씨앗인들이 나에게 모두 박수쳤다.
“기획 쪽에서 지성이 역할이 대단했어. 관객의 수, 팸플릿 수입도 놀랍고. 씨앗 최고의 흥행사야."
‘씨앗’의 흥행 기록을 갈아치운 기획 지성에게도 모든 씨앗인이 기립박수를 쳤다.
잠재력, 그 경험은 내 삶의 가장 큰 도전이자 전환점이었다. 그 후 새로운 도전에 나설 때마다 나는 늘 이 대사를 되뇌었다.
“나가자, 디디에.”
그 대사는 내 삶의 무대를 바꿨다. 겁 많은 두뽕부가 변한 것처럼.
‘나가자’라는 한마디로 비로소 도전과 용기를 내는 법을 배웠다. 지금 플레이런너(play+runner)라는 이름으로 글을 쓰는 것도, 어쩌면 그때의 ‘나가자, 디디에’에서 시작된 용기일지도 모른다.
연극은 흥행이자 무대 안에서 관객과 함께 호흡하는 생생한 경험이다.
나는 묻고 싶다. 당신을 무대 위로 불러낸 말은 무엇인가요? 그 말로 당신은 어떤 무대를 열었나요? 또 그 주문으로 어떤 도전이 시작됐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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