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떠나지 않기로 한 선택, 겨울나무가 건네는말

by 박순동

[에세이] 떠나지 않기로 한 선택, 겨울나무가 건네는 말

박순동

작년 12월 중순, 찬바람에 겨울의 색이 한층 짙어지던 날, 나는 북한산 소귀천 계곡길을 걷고 있었다. 등산로 가장자리에는 얼어붙은 낙엽들이 남아 있었고, 발걸음이 옮겨질 때마다 서릿발 밟히는 서걱거림이 조용히 따라붙었다.


그 길목마다 겨울나무들이 스스로를 다 비워낸 얼굴로 서 있었다. 잎 하나 남기지 않은 채, 제 몸의 모든 것을 계절에 내어준 얼굴들이었다. 그 정직한 나목(裸木) 앞에 서자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다. 저 나무들은 지금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있는 것이 아니라, 비바람에 흔들리고 시린 추위를 온몸으로 받아내면서도 끝내 제 자리를 포기하지 않는 강인함으로, 그저 그 자리를 온전히 살아내고 있다는 생각이.


나무는 계절을 통과할 때마다 소중한 것들을 하나씩 잃어간다. 뜨거웠던 여름의 무성한 잎을 떨구고, 누군가에게 내어주던 그늘을 접으며, 바람을 막아내던 푸르던 몸짓마저 내려놓는다. 하지만 그 일련의 과정은 결코 소란스럽지 않다. 누구에게 하소연하거나 사라지는 것들의 이유를 묻지도 않는다. 마치 생의 모든 순리를 이미 알고 있는 노인처럼, 비워내야 할 시간이 왔음을 묵묵히 받아들일 뿐이다.


우리의 삶 역시 이와 닮아있다. 살아가며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건네주고, 빼앗기고, 또 속수무책으로 떠나보내는가. 영원할 것 같던 관계도, 찬란했던 기대도, 한때는 내 전부였던 뜨거운 마음도 예외는 아니다. 어떤 순간에는 나 자신에게서조차 무언가를 아프게 떼어내야만 다음 계절로 넘어갈 수 있다. 모든 것을 덜어내고 앙상해진 뒤에야 비로소, 우리는 도망칠 수 없는 시간의 맨 얼굴과 마주하게 된다.


겨울바람은 야속하게도 나무의 드러난 몸을 가만두지 않는다. 숨겨둔 아픈 곳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모질게 나무를 매질하며 지나간다. 사람의 마음도 그렇다. 잊힌 줄 알았던 상처와 묵은 기억들을 굳이 들추어내는 시린 날들이 있다. 그럴 때마다 속이 문드러져 내려도 우리는 쉽게 소리 내어 울지 못한다. 울음보다 앞서 견뎌내야 할 오늘의 생이 여전히 우리 앞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겨울나무를 볼 때마다 자꾸만 사람의 얼굴이 겹쳐 보인다. 세월에 휘어지고 긁히면서도 제 자리를 떠나지 않는 완강함, 침묵으로 계절을 통과하는 그 정적의 방식이 우리네 삶과 너무나 닮아 있어서다. 어쩌면 '견딘다'는 것은 대단한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비바람 속에서도 끝내 떠나지 않기로 한 지독한 '선택'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아프고 눈물겹더라도 제 자리를 지켜내는 일. 그 자리에 여전히 머물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미 한 생을 온전하게 살아낸 것 같은 날들이 있다. 겨울나무는 그 숭고한 진실을 굳이 말로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그저 서 있는 존재 자체로 우리에게 조용한 위로를 건넬 뿐이다.


하산하는 길, 걸음을 멈추고 다시 나무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여전히 차가운 허공 속에 서 있었다. 아무것도 피워내지 않았으나, 그 어느 때보다 분명히 살아 있는 몸짓으로. 비어 있기에 비로소 단단해진 그 침묵이, 하얀 잔상처럼 남아 오래도록 마음을 적셨다.


25. 12. 16. 순동. 겨울의 문턱을 넘어서던 북한산, 그곳에서 만난 겨울나무의 침묵을 기록하고 다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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