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숨을 고르는 순간 : 봄의 서막, 산 아래에서
계절이 숨을 고르는 순간 : 봄의 서막, 산 아래에서
박순동
산에 오르던 아침, 공기는 여전히 겨울의 결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손등을 스치는 바람은 날카로웠고,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폐부 깊숙이 맑으면서도 서늘한 공기의 입자가 전해졌다. 그러나 발밑의 산길은 이미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등산로에는 쌓였던 눈이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겨울을 덮고 있던 시간의 덮개가 걷힌 자리마다, 마른 낙엽과 속살을 드러낸 흙이 조용히 계절의 바닥을 보여주고 있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낙엽 소리가 정적을 깨웠고, 양지에 닿은 흙에서는 희미한 지열(地熱)이 온기로 피어올랐다.
계곡 곁에 다다르자 겨울의 완강한 흔적이 목격되었다. 물가의 그늘진 바위에는 얇은 얼음이 아직 붙어 있었으나, 그 투명한 외피 아래로 물은 멈추지 않고 흐르고 있었다.
얼음이 지나간 계절을 붙들고 있다면, 물은 이미 당도할 시간을 향해 속도를 내고 있었다. 나는 한동안 과거와 미래가 교차하는 그 풍경 앞에 멈춰 섰다.
빛이 오래 머무는 자리마다 젖은 흙이 어둡게 숨을 쉬고 있었고, 돌 틈의 이끼는 조금 더 선명한 초록으로 자신의 생존을 증명하고 있었다. 가지 끝에서도 눈에 띄지 않는 미세한 변이가 감지되었다. 아직 잎을 틔우지는 않았으나, 무언가 거대한 생동을 준비하고 있다는 은밀한 기척이었다.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러나 등을 향해 쏟아지는 햇살은 분명 겨울의 그것이 아니었다. 상충하는 두 감각 사이에 서 있으니, 지금을 굳이 특정 계절로 명명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봄이라 단정하기엔 이르고, 겨울이라 치부하기엔 이미 질서가 느슨해진 시간. 아마도 지금은 계절이 다음 도약을 위해 잠시 숨을 고르는 찰나일 것이다.
하산하는 길, 나는 의식적으로 햇빛이 오래 머무는 쪽을 택해 걸었다. 흙이 먼저 마르는 자리, 물살이 먼저 반짝이는 곳, 그리고 생명의 기척이 가장 먼저 당도하는 길목을 따라서.
산 아래에 다다르며 나는 문득 깨달았다. 겨울이 완전히 끝났기 때문이 아니라, 겨울이 종언(終焉)을 고하고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자각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나의 발은 여전히 동토(冬土)를 딛고 서 있지만, 세상 어딘가에서는 이미 다른 계절의 서막이 오르고 있었다.
오늘 산에서 목도한 것은 완성된 변화가 아니라, 변화를 향한 장엄한 예고였다. 나는 그 풍경을 마음의 갈피에 그대로 간직한 채, 천천히 산을 내려왔다.
2026. 2. 24. 순동 북한산 비봉을 다녀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