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 없는 사람, 가지 않는 그리움
박순동
살아가며 문득문득 마음의 빈자리를 파고드는 것들이 있습니다. 거창한 명예나 성취가 아니라, 일상의 작고 사소한 틈새를 채워주던 다정한 온기들입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화려한 풍경보다 손때 묻은 일상의 장면들이 더 절절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 속에 우리가 함께 나눈 생의 온도가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장 먼저 식탁 위로 피어오르는 김 속에서 그 시절을 찾습니다. 정성껏 차려진 밥상에 마주 앉아 "참 맛있다"며 복스럽게 수저를 들던 활기찬 웃음소리가 그립습니다. 철없는 아이처럼 반찬 투정을 부려도 "알았으니 어서 들라"며 웃음으로 받아주던 그 넉넉한 품이 그립습니다.
매일 아침 대여섯 알의 알약을 늘어놓을 때면, 잊지 말고 꼭 챙기라며 미지근한 물 한 잔을 조용히 내려놓던 세심한 배려가 생각납니다. 이제 홀로 삼키는 약은 유독 써서, 물 한 모금에 섞여 오던 그 걱정 어린 눈빛이 더욱 간절해집니다. 돋보기를 찾아 집안을 서성일 때 "거기 있지 않느냐"며 단번에 찾아내 건네주던 밝은 눈길은 이제 없고, 온 집안을 헤매다 결국 제자리에서 안경을 발견할 때면 내 눈이 되어주던 그 사람의 빈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집니다.
산행 끝 뻐근한 허리에 혼자 파스를 붙이다 엉뚱한 곳에 붙여놓고 씁쓸한 미소를 짓습니다. 아픈 부위를 정확히 찾아 조심스레 눌러주던 그 살가운 손길이 사무치게 그립습니다. 꺼낸 바지의 주름이 빳빳하게 잡혀 있거나, 헐거워진 단추가 어느새 단단하게 다시 매여 있을 때면 말없는 뒷바라지 속에 담긴 깊은 애정을 깨닫습니다. 이제 직접 바늘귀를 꿰며 시린 눈을 비빌 때마다, 내 흐트러진 일상을 정돈해주던 그 정성이 눈물겹게 그립습니다.
밤새 고심하며 써 내려간 시 구절을 누구보다 먼저 읽어주며 "참 잘 썼다"고, 내 문장 속 진심을 가장 먼저 알아주던 생의 첫 번째 독자가 그립습니다. 문학상 당선 소식을 안고 달려갔을 때 마치 자기 일인 양 기뻐하며 축하를 건넬 사람이 곁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텔레비전 뉴스에 맞장구를 치고, 드라마 속 주인공의 운명에 함께 화를 내던 그 시시콜콜한 대화들이 이제는 적막한 거실의 공기보다 더 크게 귓가에 맴돕니다.
둘레길을 나란히 걷는 노부부의 다정한 뒷모습을 볼 때나, 기차 안에서 도란도란 여행의 설렘을 나누는 이들을 볼 때면 내 그림자 곁에 슬며시 누군가의 자리를 내어주고 싶어집니다. 낯선 여행지에서 홀로 수저를 들 때, 길가에 핀 이름 모를 풀꽃 하나에도 "이것 좀 보라"며 소란을 떨 수 있는 사소한 기쁨의 동반자가 간절해집니다. 시장을 함께 다니며 반찬거리를 사고 옥신각신하던 시끄러운 웃음이 그립습니다. 다리가 아플까 봐 버스에 먼저 올라 자리를 잡아주던 그 투박하고도 든든한 다정함이 얼마나 큰 위로였는지, 이제야 새삼 깨닫습니다.
계절이 바뀌어 겨울옷을 정리하고 가구를 옮길 때 조잘조잘 참견하며 조언을 건네던 북적이는 온기가 그립습니다. 비 내리는 오후, 집안 가득 고소한 기름 냄새를 풍기며 부침개를 부치던 활기찬 소음이 그립습니다. "비도 오는데 막걸리 한 잔 어떠냐"며 넌지시 건네던 그 한마디가 그립습니다. 아무 말 없이 각자의 책을 읽더라도 서로의 숨소리만으로 충분히 배부른 저녁, 늦은 밤 귀갓길에 2층 창가에 환하게 켜져 있던 마중 같은 불빛이 못내 그립습니다.
아픈 꿈에서 깨어나 식은땀을 흘릴 때 가만히 등을 다독이며 다시 잠들게 해줄 포근한 내 편. 그립다는 것은 내 안에 여전히 사랑할 마음이 충만하다는 뜻이겠지요. 이 시린 그리움들을 한 문장 한 문장 꾹꾹 눌러쓰며, 언젠가 다시 마주할 그 따스한 온기를 기다려 봅니다.
26.2.18. 순동.
설날 연휴를 보내며 생각합니다. 이제는 비록 곁에서 함께할 수 없지만, 마음껏 그리워할 수는 있습니다. 저에게 그리움이란 단순히 슬픔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했던 그 눈부시게 아름다운 시간들을 내 안에서 영원히 숨 쉬게 하는, 나만의 고귀한 사랑 방식입니다.
어둠이 내린 나의 2층집에, 이 그리움으로 꾹꾹 눌러 쓴 글들이 환한 불빛이 되어주길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나의 밤이 조금이나마 덜 적막하게 밝혀지기를 바랍니다.
이 일상의 풍경들이 맑고 고와서, 읽는 이의 마음 한구석도 잠시나마 따스해졌으면 좋겠습니다. 누군가를 이토록 깊이 그리워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나눈 사랑이 깊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절절한 마음을 문장으로 옮기는 동안 그 시절의 온기를 다시금 느낄 수 있어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이 고백이 나에게는 작은 위로가 되고, 그대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가 되기를 빌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