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시] 분홍빛 유혹에 길을 잃어도 좋은 날
[산문시] 분홍빛 유혹에 길을 잃어도 좋은 날
박순동
어느덧 사월, 세상의 모든 빛깔이 깨어나는 정오의 함성 속에 서 있습니다. 겨우내 무채색으로 침묵하던 오패산 자락이, 오늘은 꽃들의 웃음소리로 북적이는 잔칫집 같습니다.
길의 시작은 벚꽃이었습니다.
머리 위로 하얗게 터져버린 벚꽃의 함박웃음이 눈이 부셔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살랑이는 봄바람 한 자락에 꽃비가 내립니다. 어깨 위에 내려앉은 꽃잎은 봄이 건네는 다정한 안부입니다. 벚꽃길을 거닐며 발아래 흩뿌려진 하얀 꽃잎 양단을 즈려밟는 기분은, 마치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어느 동화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킵니다.
작은 언덕길을 숨 가쁘게 오르다 보니, 공기의 온도가 달라집니다.
능선에 다다르자 시야를 가득 채우는 것은 온통 분홍빛 파도입니다.
산중턱을 통째로 물들인 진달래의 만개. 그것은 차라리 치기 어린 유혹에 가깝습니다. 수줍은 듯하면서도 거침없이 피어난 저 분홍색 군락 속에 마음을 놓아버립니다. 진달래 꽃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은 연분홍빛 필터를 거친 듯 보드랍고 따스합니다.
산책길 옆으로는 개나리가 뒤질세라 노란색 물감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담벼락과 울타리를 따라 촘촘히 매달린 노란 종들이 봄의 교향곡을 연주하는 듯합니다. 그 곁에서 뒤늦게 고개를 내민 매화와 이름 모를 보랏빛 들꽃들이 저마다의 미소를 띠며 인사를 건넵니다.
"나 여기 있다고, 나도 봄이라고" 속삭이는 꽃들의 아우성에 발걸음은 자꾸만 느려집니다.
토요일 오후, 오패산은 꽃들의 미소와 유혹이 넘실거리는 바다였습니다.
벚꽃의 순수한 웃음에 동화되고, 진달래의 화려한 유혹에 설레며, 개나리의 명랑함에 기운을 얻은 시간.꽃길 속에 몸을 맡긴 채 걷는 이 산책은, 단순히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내 마음속에 봄이라는 씨앗을 다시 심는 귀한 의식이었습니다.
봄은 멀리 있지 않았습니다.
내 발길이 닿는 곳, 내 시선이 머무는 분홍빛 능선과 하얀 꽃비 속에 이미 봄은 활짝 피어나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꽃들이 건네는 이 다정한 위로를 가슴 가득 채우고 돌아오는 길, 내 안에서도 분홍빛 진달래 한 송이가 피어나는 것을 느낍니다.
26.4.4. 순동. 토요일 서울시 강북구에 있는 오패산을 다녀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