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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수자 Oct 19. 2023

낮에도 별은 빛난다

 9화 반닫이 속의 비밀

  여름 방학을 한 지도 보름이 지났지만, 재훈은 날마다 병원에 다녀야 했다. 오른쪽 다리뼈에 금이 가, 깁스붕대를 하고 목발을 짚고 걸었다. 의사 선생님은 개학할 즈음, 붕대를 풀 수 있다고 했다.

  날씨는 덥고, 몸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니 재훈은 짜증만 늘었고, 날이 갈수록 말수는 줄어들었다.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꼭 필요한 말만 하고 예전처럼 그렇게 자상하게 대해 주지 않았다. 재훈은 서운했다, 자신은 환자가 아닌가? 자신이 어머니에게 그렇게 대해도 어머니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비록 애를 좀 먹인다고 하지만, 어머니는 날 사랑해 줘야지. 그게 진짜 어머니가 아닌가? 하긴 아무러면 어때.’

  재훈은 자꾸만 마음속에다 가시를 심었다.

  병원에 갈 때만 빼고, 재훈은 자기 방에 틀어박혀 책만 읽었다. 안네의 일기의 키티도 만나고, 악독한 고리 대금업자인 샤일록에게 분개하고, 알프스 소녀 하이디와도 얘기하며, 집현전 학자들과 밤을 새우기도 했다. 하지만, 책을 덮고 나면 다 사라졌다. 

  허전했다. 주위에 있는 것까지 낯설고, 재훈이가 있을 자리가 아닌 것처럼 어색해졌다.

  개학이 얼마 나지 않은, 서늘한 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늦게 아침을 먹으러 내려갔더니, 식탁에는 밥이 차려져 있고, 쪽지가 놓여 있었다.

  ‘재훈아, 오늘이 백중날이라 절에 갔다가 늦을 것 같다. 약 먹는 것 잊지 말아라.’

  어머니는 아침 일찍 나가신 모양이었다. 어머니는 초하룻날과 보름이면 꼭 절에 갔다.

  남과 언짢은 일이 있어도 남을 탓하지 않고, 전생에 지은 죗값이라고 했다. 다리가 성하지 못한 어머니는 쉬지 않고 부처님 앞에서 절을 했다. 재훈은 몇 번 따라 하다가 슬그머니 밖으로 나오곤 했다. 집으로 돌아올 때면 어머니 헐렁한 회색 바지에서 향냄새가 났다. 처음에는 그 냄새가 싫었는데, 차츰 괜찮아졌다.

  그날, 누나들도 모두 밖으로 나갔고, 재훈은 혼자였다.

  혼자 있다는 것이 약간 무섭기도 했으나, 한편으로 무거운 책가방을 내려놓았을 때처럼 홀가분하기도 했다.

  ‘엄마를 찾는데 단서가 될 만한 것이 없을까?’

  재훈은 안방으로 들어갔다. 사진첩이 있는 문갑을 열었다. 고동색 사진첩은 재훈의 모습을 정리해 놓은 것이었다. 첫 장을 펼쳤다. 십장생이 수 놓인 병풍 앞에서, 재훈은 바지저고리를 입고 웃고 있었다. 큰 상에는 떡이랑 과일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그다음 장에는 돌아가신 할아버지, 함안에 계신 할머니, 그리고, 온 가족이 재훈을 가운데 두고 둘러서서 웃고 있었다.

  여태까지는 사진을 볼 때 그냥 넘겼는데, 자세히 보니 어머니의 얼굴은 밝지 못했다.

  큰누나를 찾았으나, 큰누나는 숫제 그곳에 없었다. 

  다음 장을 넘겼다. 1학년 입학 사진과 첫 소풍 때 모습, 온 가족이 나들이 간 순간들도 그대로 있었다. 어머니의 표정은 갈수록 밝아 보였다. 

  끝까지 다 넘겨보았지만, 사진첩에서는 아무런 단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서랍장을 열어 보았고, 화장대도 보았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무언가 어디에 있을 거야. 날 백일이 지나고 데려왔다고 들었으니까.’

  어머니가 아끼는 반닫이가 눈에 띄었다. 시집올 때 외할머니가 주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재훈은 반닫이를 아래로 잦혀 열었다. 가계부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그중에 몇 권을 꺼내 훑어보았다. 넘겨보니 빽빽하게 숫자들로 메꾸어져 있었고, 그 밑에는 하루에 일어났던 일을 적어 놓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물가가 올랐다는 이야기, 책 읽은 느낌, 그리고 등록금 준비, 이런 간단한 글귀가 보였을 뿐이었다. 실망하면서 다 챙겨 놓은 후, 문을 닫으려다 제일 깊숙하게 들어 있는 누런 서류 봉투 하나에 마음이 갔다. 보고 싶었다. 등기필증이라고 씌어 있는 곳에는 한자로 된 서류가 여러 장 있었고, 그 밑에는 여러 통의 편지가 있었다.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편지 봉투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편지지를 꺼냈다.


  사모님께 

  겨우 백일이 지난 애를 두고 새 인생을 출발한 죄 많은 인간입니다그것이 모든 사람을 위한 일이었기에잊어버리고 살자고 한 세월이 벌써 8년이 지났습니다.

  이렇게 편지를 드리는 것이 사모님 마음에 괴로움을 끼치지 않을까 걱정스럽기도 하지만전 괴롭히려고 이 글을 올리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이번에 부산에 내려갔다가 우연히 재훈의 모습을 보고 글을 올리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서 난필을 들었습니다.


  재훈은 침을 꿀꺽 삼킨 후, 눈을 크게 뜨고 편지를 바투 잡았다.

  그것은 재훈이가 찾던 바로 그것, 엄마의 흔적이었다.


  그렇습니다재훈을 만난 것을 우연이라고 하면 그것도 죄가 되겠습니다.

  남동생을 만나려고 회사 근처에 갔다가 푸른 초등학교 앞을 지나게 되었습니다마침, 1학년 아이들이 하나둘 나오고 있길래 교문 앞에 섰습니다.

  피는 진한 것일까요전 첫눈에 재훈을 알아보았습니다.

  실내화 가방을 빙빙 돌리며 뛰어나오는 그 모습을 보는 순간제 심장은 멎는 것 같았습니다하마터면 재훈아엄마야.” 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습니다.

  제 동생이 와서 말리지 않았으면 말입니다.

  죄송합니다.

  새 출발은 했지만아이를 가질 수 없는 자신이기에 재훈을 본 후또 보고 싶어 몇 번이나 역으로 달려가곤 했답니다.

  하지만모든 사람과의 약속을 깬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입술을 깨물며 참고 또 참으렵니다.

  부디 잘 키워 주세요그럼 안녕히…….

  용서 바랍니다읽으신 후즉시 태워 주십시오그러면 저의 나쁜 생각도 지워지리라 믿습니다.

황순녀 드림

     

  “황순녀! 그럼, 우리 엄마의 이름이 황순녀란 말이지.”

  재훈은 그 편지를 가슴에 꼭 안았다. 서울에 살며 이름이 황순녀라면 당장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재훈은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그런데, 왜 어머니는 이 편지를 태우지 않고 이렇게 넣어 두었을까?’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또 한 장의 편지를 들었다. 앞의 편지와 달리 깨끗했고, 깔깔했다.

  받는 사람 이름이 생략되어 있었으나, 필체만은 저번 것과 똑같았다.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또 글을 올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마음의 정리를 하기 위해서 펜을 들었습니다.

  버림으로써 모든 것을 다시 얻을 수 있다지만전 마음을 비우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아직도 제가 이 사바세계에 미련을 두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미 속세를 떠나기로 결심한 저는 마지막으로 재훈을 한 번 보고 싶었습니다.

  낳았을 뿐이지어미로서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제가 다시 한번 재훈을 보는 것도 무례한 일이며 사치라고 생각되었기에 과감히 떨쳐 버리려고 했습니다.

  그이까지 저세상으로 보내고마음잡을 수 없는 나날을 보냈습니다재훈이를 한 번만 보면 모든 것을 벗어 버리고 훌훌 떠날 수 있겠노라고 제 동생에게 몸부림치면서 애원했답니다.

  보다 못한 동생이 재훈을 한 번 만났는지재훈을 위해 그런 생각을 깨끗이 잊어버리라고 냉정하게 얘기하더군요.

  돌아가신 그이의 재를 범어사에서 지내고 그다음 날저도 모르게 발길이 재훈의 학교 앞에 멈췄습니다.

  운동장에서 뛰어놀고 있는 재훈은 훌륭한 소년이 되어 있었습니다마지막으로 재훈을 보게 된 것이 부처님의 공덕일까요아니면 저를 시험하려는 마음이었을까요?

  먼발치에서 재훈을 보는 순간전 참으로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집착했을 때 욕심이 나지만그것을 벗어 버리면 이렇게 편하다는 것을 왜 여태 몰랐을까요?

  전 아주 홀가분한 마음으로 길을 떠납니다.


  재훈의 등에선 땀이 흘렀고, 입술은 바싹 타들었다.

  ‘그럼, 범어사에서 만난 아주머니가 바로 나의…….’

  다 읽지도 못한 편지를 잡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때, 초인종 소리가 길게 들렸다.

  재훈은 급하게 두 통의 편지를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고, 반닫이를 닫고는 목발을 찾아서 대문 쪽으로 나갔다.

  가슴이 심하게 방망이질해 왔으며 얼굴도 화끈거렸다.

  “무슨 일이 있었니?”

  미영 누나였다.

  “아, 아니.”

  재훈은 짧게 대답하고 돌아섰다.

  “난 네가 없는 줄 알았어. 벨을 얼마나 많이 눌렀다고…….”

  “……응, 약간 졸았어. 올라갈게.”

  “그래, 조심해.”

  2층으로 올라간 재훈은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꺼내 마저 읽기 시작했다.


  인연도 없는 자식과 인간에게 연연하던 자신이 우스워집니다.

  이 글이 사모님의 손에 들어갈지아니면 한 줌의 재가 되어 버릴지 저 자신도 모르겠습니다다만 이것이 속세에서 쓰는 마지막 글이 될 것입니다.

     

  편지는 마지막 인사말도, 쓴 사람 이름도 없었으나 분명히 엄마의 편지였다.

  재훈의 눈에는 가득 물이 고였다.

  “엄마, 엄마!”

  재훈은 낮게 흐느꼈다.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그 아저씨가 재훈을 찾지 않을 거라는 것이 분명했고, 엄마가 멀리 떠났다는 것 또한 확실했다. 재훈은 움켜잡은 물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갈 때 안타까움처럼 마음이 아득해져서 눈이 퉁퉁 붓는 줄도 모르고 울고 또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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