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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수자 Oct 23. 2023

낮에도 별은 빛난다

 11화 첫눈

  초겨울 바람이 재훈이 방 앞에 와서 창문을 두들겼다. 여섯 시였으나 아직도 밖은 캄캄했다. 재훈은 벌떡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일어날 시각이 아닌 아버지가 거실에 앉아 있고, 할머니와 큰누나도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후배란 놈이 투자한 돈을 갖고 줄행랑을 놓았단 말이지?”

  “네, 장래성 있는 사업이라……, 어머니 뵐 낯이 없습니다.”

  “지금 그런 소리를 할 땐가, 어떻게 해결할 생각을 해야지.”

  “연기처럼 사라졌어요, 인터폴 수배도 해놓았지만…….”

  할머니는 무겁게 혀를 찼다.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자식 보내고, 살림 잃고 늘그막에 내가 무슨 팔잔가.”

  아버지는 10년은 더 늙어 보였다. 거칠어진 피부 하며, 부쩍 많아진 흰머리, 초조하고 불안한 표정은 재훈을 다시 한번 슬픔의 늪으로 빠져들게 하였다.

  “그래도, 산 사람은 밥을 먹어야지. 망한 것은 망한 것이고…….”

  할머니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큰누나도 말없이 일어나 부엌으로 따라 들어갔다.

  다음 날, 학교에서 돌아온 재훈은 깜짝 놀랐다.

  마당에는 자개장이며 피아노, 대리석 식탁과 가죽 의자들이 마당을 차지하고, 재훈의 컴퓨터와 누나 노트북까지 나와 있었다.

  “할머니, 왜 이래요?”

  “이제 우리 것이 아니야. 올라가 필요한 책이나 챙겨, 내일 이사를 해야 하니까.”

  “넷?”

  재훈은 놀라서 할머니를 바라보았지만, 할머니는 등을 돌리고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마음이 아팠다.

  재훈은 이층으로 뛰어 올라가 방문을 열었다.

  침대도 보이지 않았다. 재훈이 즐겨 읽던 100권이 넘는 문학 전집도 없었다. 책상 위에는 교과서와 동화책 몇 권만 흩어져 있었다.

  구석에 넘어져 있는 곰 인형이 재훈을 쳐다보고 울고 있는 것 같았다. 얼른 품에  안고 창을 열었다. 그대로 있다가는 풍선처럼 재훈의 마음이 ‘펑’ 하고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옷을 다 벗어 버린 목련 나뭇가지 위에 아직도 여러 개 나뭇잎이 붙어 있었다.

  ‘희망은 있어. 마지막 잎새의 존시처럼 절대로 희망을 잃지 않을 거야. 그래, 찬 바람아 불어 봐. 절대 쓰러지지 않고 일어설 거야. 두고 봐.’

  바람이 재훈의 머리카락을 살짝 들추고는 살그머니 뒷걸음치며 사라져 버렸다.

  책을 정리하고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간 재훈은 안방 문을 열었다.

  큰 방에 가구가 없으니까 더 넓어 보였다.

  아버지가 벽을 향해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재떨이에는 태워 버린 담배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아직도 재떨이 위에 걸쳐진 담배꽁초가 연기를 내면서 타들어 가고 있었다. 아버지 곁에 살며시 앉은 재훈은 담배꽁초를 비벼 껐다.

  “재훈이니?”

  자세를 고치지도 않고 아버지가 말했다.

  “네, 아버지.”

  “미안하구나.”

  아버지는 일어나 앉았다.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이마를 덮고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아버지, 힘내세요. 제가 있잖아요.”

  재훈은 아버지가 너무 가엾어 큰 소리로 말했다.

  아버지는 빙그레 웃었다.

  “그래, 우리 재훈이가 있지. 아버지의 힘이 돼 줄 거야.”

  “아버지는 항상 말씀하셨잖아요. 제가 시험을 못 쳐서 풀이 죽어 있으면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말입니다.”

  “그렇지, 사람을 잘못 본 것도 실패 중의 실패지. 앞으론 절대 그런 일이 없을 거야.”

  아버지의 말에는 힘이 없었다.

  “전 아버지를 믿어요. 꼭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거라고요.”

  “그래, 고맙다.”

  재훈은 돌아서 나오다가 눈물이 앞을 가려 문지방에서 넘어질 뻔했다.

  태산같이 커 보였던 아버지의 마음이 실낱같이 가늘어 보이는 오늘, 그러나, 실제로는 명주실처럼 질기고 단단하리라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할머니는 넓어진 거실에 앉아서 잡동사니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가끔 한숨을 쉬곤 했다.     그러나, 큰누나는 냉정했다. 평소처럼 자세도 꼿꼿했고, 어두운 얼굴도 아니었다.

  미영이 누나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늦게 돌아온 선영 누나는 들어서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할머니는 누나 등을 어루만지며 한숨만 쉴 뿐이었다.

  아버지는 이불 보따리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지만, 자는 것 같지 않았다. 재훈은 아버지 곁에 있다가 잠이 들었다.

  아직 날도 새지 않았는데, 웅성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트럭에는 이미 이삿짐이 실어져 있었다. 변변한 가구는 하나도 없었다.

  “약수터 가는 길에 있는 동네야. 왼쪽은 새로 지은 집들이고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옛 동네가  나온다. 아버지가 먼저 가 있으니까 바로 찾을 수 있어.”

  할머니는 큰누나에게 집 위치를 가르쳐 주고 있었다.

  “할머니,  바로 학교에 갈래요.”

  선영 누나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그래, 내일모레면 시험 치는 날인데, 이렇게 집안이 어수선해서야…….”

  할머니는 언제 쌌는지 도시락을 누나 손에 쥐어 주었다.

  어느덧, 밖은 밝아 오고 있었다.

  재훈도 서둘러 학교 갈 채비를 하였다.

  이사 간 집은 산복 도로 위에 있었다. 좁은 골목으로 이어진 막다른 곳에 있는 재훈의 집은 지붕이 붉은색 함석으로 되어 있었다. 좁았지만 마당도 있었고, 마당에 서면 저 멀리 바다도 보였다.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대문을 돌아 나가지 않아도 이웃들과 얘기할 수 있는 정다운 곳이었다.

  할머니는 비록 살림은 줄었지만, 인심이 있는 곳이라고 가족들을 위로했다. 재훈은 학교까지 가는 데 시간이 걸렸지만, 일찍 일어나기 때문에 예전과 같은 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르내리는데 힘들었지만, 집에만 들어오면 답답하던 마음이 확 트였다.

  멀리 보이는 반짝거리는 바다도 좋았고, 바람도 싱싱했다.  자동차도 장난감 같아서 하루 종일 보고 있어도 싫증 나지 않았다.

  한 해의 마지막 달이었다. 사람들은 종종걸음으로 바쁘고, 해님도 일찍 들어가 버리는 계절이었다.

  소용돌이 속에서도 선영 누나는 최고 대학에 좋은 성적으로 합격했다. 그것은 가족의 영광이었다.

  “그래, 그 어려움 속에서도 좋은 대학에 입학하여 집안에 꽃을 피우니 얼마나 장하니?”

  그러나, 선영 누나는 다른 사람보다 반만 내는 등록금도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염려 마. 큰언니는 취직이 되었고, 네 아버지도 다른 일을 알아보는 중이니까 등록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할머니는 누나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둔 날이었다.

  재훈은 합격한 선영 누나에게 작은 것이라도 선물을 하고 싶었다. 누나는 책을 주면 제일 좋아하겠지만, 찬 바람이 불 때, 누나의 장한 손에 감싸 줄 장갑을 사 주고 싶었다.

  재훈은 가지고 있는 돈을 세어 보았다. 천 원짜리 일곱 장과 동전이 제법 되었다.

  “색깔은 뭐가 좋을까? 푸른 바다색은 추워 보일 거야. 비둘기 목덜미 같은 은근한 색을 살까? 아니야, 해님처럼 따뜻한 빨강이 좋을 거야.”

  선물이란, 받는 것도 좋지만 주는 것도 참 신난다는 걸 알았다.

  백화점에서 흘러나오는 성탄 노래가 신났고, 벽에 붙어 있는, 빨간 모자에 큰 주머니를 짊어진 산타 할아버지 행복한 미소도 재훈을 설레게 했다.

  그러나, 백화점에 들어선 재훈은 실망하고 말았다.

  털이 보송보송하게 난 빨간 장갑은 재훈이가 준비한 돈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어릴 때 혼자 놀다가 작은 구멍으로 구슬을 빠뜨리고 건지지 못하였을 때처럼 안타까웠다.

  돌아서 나오면서 재훈은 심한 추위를 느꼈다. 얼음이 가슴속에 닿은 것 같은 싸늘함이었다. 여태 돈이 없어서 사고 싶은 것을 사지 못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주머니에 든 돈을 만지작거리며 돌아섰을 때, 하늘에서 재훈의 슬픔처럼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야, 첫눈이다!”

  재훈은 여태 우울하던 마음을 털어 버리고 소리쳤다.

  눈이 하늘나라에 계신 어머니가 보낸 선물처럼 두 팔을 벌리며 반가워했다.

  그때, 누군가 재훈의 어깨를 두 손으로 눌렀다. 대나무 아저씨였다. 눈만큼 아저씨도 반가웠다.

  “어디 갔다 오는 길이니?”

  아저씨가 외투 깃을 올리며 물었다.

  “누나 선물을 사러 왔었는데…….”

  “그런데?”

  “못 샀어요.”

  “왜?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어?”

  “아니에요. 돈이 좀…….”

  재훈은 쓸데없는 얘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저씨는 재훈을 빤히 보며 말이 길어졌다.

  “아저씨는 재훈이가 좋아, 운명이니 인연이니 하는 말은 싫어. 그냥 지나가다 마음이 통한 사람처럼 한 번씩 만나 얘기하고 싶구나.”

  “아저씬 할 얘기가 많은 것 같은데, 전 없어요.”

  “그건, 내가 재훈에게 잘못한 것이 많으니까 그렇겠지. 때로는 어른이 아이보다 유치하고 생각하는 것도 얕을 때가 있는 법이야.”

  재훈은 말없이 걷기만 했다.

  눈은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성급한 아이들은 쌓이지도 않은 눈을 모아서 던지기도 했다.

  눈 같은 마음을 갖고 싶었다. 한 곳으로 치우침 없이, 그저 받아들이는 곳이면 어디에나 하얀 모습으로 내려서 모든 이에게 기쁨을 주는 눈, 그러다가 해님이 나타나면 살며시 녹아서 물이 되어 버리는 부드러움.

  재훈은 부드러운 눈처럼 마음에 두었던 미움을 떨쳐버리고 싶었다.

  “아저씨, 그만해요. 이렇게 눈이 오고 있잖아요.”

  재훈은 그 자리에 서서 두 손을 들고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 눈 오는 날에는 즐거운 얘기만 하자. 재훈이 너부터 해 봐.”

  아저씨가 명랑하게 말했다. 목소리는 약간 들떠 있었다.

  “우리 둘째 누나가 최고 대학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어요.”

  “정말 축하할 일이구나……또.”

  “구겨져 있던 내 마음이 활짝 펴졌어요,”

  “야, 그건 더 기뻐할 일이고.”

  “이제는 아저씨 차례예요.”

  “첫눈 오는 날, 재훈을 하고 얘기하게 되어 너무 좋아.”

  아저씨 얼굴에 내린 눈은 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누나에게 선물하려던 것이 무엇이었니? 돈이 모자란다고 했잖아.”

  “그렇지만, 아무한테서나 돈을 꿀 수 없잖아요.”

  “내가 빌려줄게. 대신 재훈이가 돈을 벌면 두 배로 갚기다.”

  “좋아요.”

  재훈은 아저씨와 함께 백화점으로 들어갔다. 선영 누나가 기뻐할 모습에 마음은 풍선이 되었다.

  사람들 가슴마다 사랑을 전해 준 눈은 진정 위대한 화가였다. 금방 세상을 하얗게 칠해 놓고는 군데군데 명암까지 넣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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