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나비가 된 할머니
장다리꽃이 활짝 핀 바다가 보이는 마을은 제주도 한 귀퉁이를 옮겨놓은 듯합니다.
봄이 되면 온통 배추나 무꽃으로 마을이 노랗고 하얗게 핀 큰 통꽃이었습니다.
예부터 무가 많이 난다 하여 무골이라 불리는 이 마을 가장 큰 집에 할머니 한 분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와 함께 일군 밭이 무골의 반을 넘었습니다. 그러나 아들만 다섯을 둔 할아버지는 일찍 저 세상 별이 되었습니다.
부지런한 할머니는 젊음을 거의 밭에서 보냈습니다. 땅은 정직했습니다. 심은 그대로 거두어 그 돈으로 아들을 공부시켰습니다.
아들이 모두 대학 공부를 마치고, 하나둘 결혼을 할 무렵에는 밭도 한 마지기씩 팔아야 했습니다. 자식들은 서울로 인천으로 대구로 부산으로 떠나갔습니다.
더 공부하겠다고 미국으로 간 막내아들까지 짝을 지어준 할머니에게 남은 것이라곤 덩그런 집 한 채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기뻤습니다.
아들은 모두 좋은 자리에 취직했고, 며느리도 공부를 많이 했고, 얼굴도 예뻤습니다.
무골 사람들은 할머니를 부러워하였고, 복 많은 늙은이라고 불렀습니다.
요즘 할머니는 밭에 가서 일을 하는 대신에, 남새밭에서 무와 배추를 심고 마당에는 여러 가지 꽃을 가꾸며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아들은 한 달에 한 번씩 할머니가 쓸 충분한 돈을 보내왔고, 며느리들도 좋은 옷이랑 편리하게 쓸 물건들을 부쳐왔습니다.
할머니는 그 큰 집에서 혼자 지내기가 적적하여 건넌방을 세놓았습니다.
세를 든 건넌방에도 할머니 또래 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들과 며느리, 손자가 둘 있었습니다. 많은 식구로 방을 얻기 힘들었던 부부는 할머니를 무척 고맙게 여겼습니다.
할머니 또한 쓸쓸하던 집안에 사람 소리가 나니 한결 살맛이 나는 것 같았습니다.
낮에는 건넌방 할머니와 이야기도 하고 야채를 뽑아 점심도 함께 먹었습니다.
그러나 밤이 되면 할머니는 혼자가 되어 건넌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한숨이 푹 나왔습니다.
“아이들이 보고 싶구나. 보고 싶구나.”
그래서 할머니가 수화기를 들고 한번 다녀가라고 말하면 며느리들은 하나같이 말했습니다.
“어머니, 아이가 아파 요즈음 병원에 다녀요.”
“죄송해요, 그이가 출장 중이거든요.”
“제가 운동을 하다가 어깨를 다쳤어요.”
“자주 찾아뵈어야 할 텐데 사업이 너무 바빠요.”
아들과 며느리들은 모두 바빴습니다.
그러면 할머니는 곧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런 조심하지 않고, 그래그래, 건강해야지. 내 걱정은 마.”
수화기를 놓고 할머니는 밖으로 나갔습니다.
별빛이 마당에 쏟아져 내리고, 어둠 속에서도 꽃들이 할머니를 반깁니다.
“그래, 그래. 나에게는 너희들이 있지.”
할머니는 어릴 때 재롱부리던 아들 모습을 환하게 웃어주는 꽃에서 봅니다.
‘품 안의 자식이라더니…….’
‘자식들이 바빠서 못 온다는데 내가 왜 이러나.’
‘늙은이가 주책없이 서러움을 자식한테 넘기다니…….’
건넌방의 불빛은 유난히 따뜻해 보입니다.
“아버님, 어머님, 자리 펴놓았습니다.”
“오냐, 그래 너희도 자거라.”
“할아버지, 제가 팔 주물러 드릴게요.”
“아니야, 내가 주물러 줄 테야.”
“그 녀석들, 넌 할머니, 너는 할아버지를 주물러 드리면 되겠네.”
“그래요, 하하하.”
“아이고, 시원해라. 시원해.”
할머니는 오른손으로 왼쪽 어깨를 두드리면서 건넌방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으면서 쓸쓸하게 웃었습니다.
건넌방의 불이 꺼지자, 할머니도 들어와 자리에 누웠으나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뜬눈으로 하얗게 밤을 새웠고, 그런 밤이 점점 쌓여 갔습니다.
할머니는 말이 없어졌고, 남새밭에 나오는 일도 드물어졌습니다.
할머니 손발은 서서히 힘이 없어지고, 점점 왼쪽 팔다리를 움직일 수 없게 되었고, 혼자서 일어날 수도 없었습니다. 수저도 들지 못하고 화장실에도 갈 수 없었습니다. 말도 잃었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아들과 며느리들이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자식들에게 한마디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식들은 모여서 의논하였습니다.
그렇게 보고 싶었던 아들은 잠깐 곁에 있다가 바쁘다며 돌아갔습니다. 며느리들도 뒤따라갔습니다. 할머니 곁에는 돈을 받고 시중을 들어주는 간병인만 남았습니다.
할머니는 남새밭 가까이 있는 창가에 누워 간병인이 주는 죽을 먹고, 약을 마시며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며 나날을 보냈습니다.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는 할머니를 젊은 시절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때는 참 행복했습니다.
하루 종일 일만 하였지만, 힘든 줄도 모르고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는 것을 보면 항상 즐겁기만 했습니다. 그뿐인가요? 세상에 외로움이란 게 있는 줄도 불행한 일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그 젊은 시절이 할머니 눈앞에서 아른거렸습니다.
할머니 눈가에는 주르륵 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저 멀리 끝없이 펼쳐진 노란 장다리꽃의 물결 위로 하얀 나비 떼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할머니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차올랐습니다.
수많은 나비 떼가 하늘 위로 날아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할머니 팔다리도 부드럽게 움직이는 것 같았습니다.
나비들은 팔랑팔랑 내려오는 눈송이 같기도 하고, 벚꽃이 떨어질 때의 꽃잎 같기도 하였습니다. 푸른 하늘에 하얀 나비들이 춤을 추며 할머니 곁으로 다가오더니 맴을 돌다가 하늘 위로 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할머니 몸도 점점 가볍게 떠오르더니 어느덧 한 마리의 나비가 되어 나비 떼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장다리꽃이 활짝 피어 눈이 부신 날, 할머니는 나비가 되어 하늘로 오르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