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욕구보다 타인의 요구를 우선시하는 히스테리적 성향
살아가면서 늘 편안하지가 않고 불안했고 20대 중반부터는 자각하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내가 나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를 떠올리면 어두운 갈색이 떠올라 슬퍼졌다.
한날은 나를 생각하면 어떤 색깔이 떠오르는지 그려보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화사하고 예쁜 색감이 아닌 우중충하고 구린 갈색, 어두운 카키 같은 더러운 느낌의 색깔들이 떠올랐다.
슬펐다. 분홍색 하늘색 보라색 연두색 노란색 파란색 좋아하는 색깔 다 놔두고 스스로를 어둡고 역한 색깔로 정의하고 있었다니.
예쁜 색깔의 느낌이 나는 사람으로 거듭나고 싶었다. 지금까지의 부정적인 사고방식과 게으른 습관을 고치려는 노력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때 엄마의 중병을 알게 되어 모든 노력이 중단되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2016년 7월까지. 스스로를 완전히 고치지 못한 채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으며 겨우 높여놓은 자존감이 무너지는 날들을 보내야 했다.
2024년 말
8년 전에 아르바이트했던 곳과 비슷한 곳에서 1년 조금 넘게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곳에서의 1년은 크나큰 마음의 상처를 남겼고 그 후유증으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한 기분마저 느끼게 만들었다. 이대로는 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죽을 용기는 또 없어서 살기 위해
자존감 높이는 법
자신을 사랑하는 법
다른 사람에게 받은 스트레스 해소하는 법
등 심리적인 주제를 검색해서 메모하고 실천하려 노력했다.
그러던 중에 답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히스테리와 강박증에 관한 글이 내 눈에 들어왔다. 드디어 내가 이런 사람이어서 항상 불행하다고 느껴왔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나는 정신분석학자 자크라캉의 연구에서 히스테리 와 강박증 중에 다른 사람의 욕망에 맞춰주는 히스테리적 성향을 갖고 있었다.
히스테리와 다른 사람의 욕구
타인의 욕망에 맞추려는 성향: 히스테리적 성향을 가진 사람은 근본적으로 타인의 욕망에 자신을 맞추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늘 자유롭지 못하고 만족스럽지 못했다. 생각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못한다는 억압감이 있었다. 왜 내 맘대로 하지 못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 집에 가거나 사람이 여럿이 모여있거나 하면 화장실 간다는 말을 못 해 참은 적도 많았다. 화장실에 가는 그 기본적인 일이 민폐 같고 말해선 안 되는 혼자 참아야만 하는 일 같았다.
엄마는 어릴 적에도 화장실을 챙겨주지 않았다. 엄마가 화장실 가는 것에 대해 말해주어야 자기 몸의 신호를 화장실과 연결시킬 수 있고 나의 욕구를 말해도 안전하다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 그 과정이 생략되어 내 욕구를 중요하게 여기지 못하고 말도 못 하게 되었다. 초등학교 입학 전후까지는 잠자기 전, 일어나자마자, 놀이에 집중할 때, 신호를 보일 때, 외출하기 전 같은 상황에서는 엄마가 화장실에 가도록 유도해 주는 것이 좋다고.
내가 자크라캉의 히스테리적 성향을 갖고 있다는 것을 글을 읽자마자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은 작은 일상마저도 그런 성향 때문에 힘들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 내가 그래서 그랬구나 하는 일들 몇 가지가 주르륵 연달아 떠올랐다.
가장 최근에는 샤인머스캣을 사려고 시장에 갔다가 주인아저씨가 애플청포도를 팔고 일찍 들어가려고 한다는 말에 사 와서는 후회한 일이 있었다. 애플샤인머스캣이라고 써놓고 팔고 있었는데 집에 와서 검색해 보니 '애플청포도'라는 아예 다른 품종이었다. 청포도와 사인머스캣이 같은 의미라고 혼동해서 쓴 게 아닐까 추측되는데 내가 원한 건 샤인머스캣이었는데 주인이 팔고 싶어 하는 걸 사 오다니 내 욕구보다 주인의 마음을 먼저 헤아린 결과였다.
예전에는 휴대폰 수리를 맡기러 가서는 기사님이 저렴한 기종으로 바꾸시라고 해서 바로 옆 판매점원에게까지 갔다가 다음날 다시 수리 맡기러 간 적도 있었다.
또 옷가게에서 세일은 하지만 낡아버린 옷을 사 온 적도 있었다. 자세히 보고 사지 말까 하는 사이에 판매하시는 아주머니가 쇼핑백에 넣어버리고 옷걸이를 마구 챙겨주면서 계산하는 통에 그대로 사 왔다. 이 일은 두고두고 한이 됐다. 안 산다 하고 놓고 왔으면 됐을 것을...
그럼 도대체 왜 이런 히스테리적 성향을 가진 사람이 되었을까? 언제부터였을까?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가 아니었을까?
내가 태어나던 날 아빠는 엄마에게 병원 가라는 말만 남긴 채 회사를 갔다고 했다.
아무리 둘째라도 오늘 출산할 것 같은 아내를 혼자 병원 가라고 하고 출근해 버리다니 아빠가 얼마나 무심한 사람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내가 엄마였다면 출근하지 말라고 말렸을 텐데 말이다.
엄마는 아빠말을 무시하고 산부인과에서 남자의사가 출산하는 것이 싫어서 조산사를 불렀고 사고가 났다. 내 오른팔 신경이 끊어졌다. 퇴근 후 집으로 와서 나를 봤을 때 왼팔만 움직이고 오른팔은 움직이지 않자 아빠는 다음 날 갓난아기인 나를 안고 병원에 갔다고 한다.
작은 병원은 모른다고 했고 대학병원에서도 의사가 두꺼운 의학서적을 펼치더니 이런 경우가 아주 드물게 있다며 팔을 편안히 놔두면 신경이 자라날 것이라고 했단다. 그래서 아빠는 내 오른팔을 배 위에 올려놓았다고 한다. 의사 말대로 신경이 자라나서 팔을 움직일 수 있게 되긴 했다. 하지만 아빠가 팔을 굽혀서 놔둬서 굽은 채로 신경이 자라 온전치 못하고 약간 구부정하다. 똑바르게는 펴지지도 굽혀지지도 않는다. 86년 당시 우리나라 의학 수준이 지금과 비교하면 당연히 뒤떨어져 있었을 테니 의사도 어떤 자세로 놔둬야 하는지, 중간에 재활치료를 해줘야 신경이 제자리를 찾아 자랄 수 있다는 사실도 몰랐던 것 같다.
중학교 체육시간에 선생님은 내가 일부러 똑바로 안 하는 줄 알고 소리를 지르셨었다. 나에게 직접 물어봐주지 않으셨다. 아빠가 엄마가 날 출산하던 날 출근 안 하고 병원에 같이 갔더라면 내 팔이 괜찮지 않았을까? 아니 아빠가 출근해 버리고 집에서 엄마혼자 조산사를 불러서 낳았더라도 내가 무사하기만 했다면 아빠가 내가 태어나던 날에 나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까지는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내 오른팔은 아빠가 나를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는 증거 같아서 내 마음을 한 번씩 짓누른다.
둘째라서 그랬네.
아빠는 첫딸인 언니를 예뻐하고 더 사랑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 그랬다. 어느 날은 아빠가 빨간 구두를 사 왔는데 언니 것만 사 와서 내가 우니까 아빠는 당황하며 한 켤레 더 사 왔다. 똑같은 걸로. 나는 빨간색이 싫고 언니랑 똑같은 거 싫다고 말했는데도 바꿔오지 않았다.
아빠는 언니와 똑같이 해줬다고 하지만 언니에게 애정이 커 보였다. 그러다 최근에 가수 박진영 님이 딸들에게 노래를 선물하고 싶어서 곡을 썼는데 첫딸에게 줄 곡은 완성했는데 둘째 딸에게 줄 곡은 만들지 못해서 아직 주지 못했다고 말하는 인터뷰를 보게 되었다. 첫 번째 딸은 모든 것이 신기했지만 둘째 딸은 다 첫째에게서 본 것이어서 감흥이 덜해서 못썼다나. 그래서 우리 아빠에게도 첫딸이 더 애틋했겠구나를 머리로는 이해하게 됐다.
둘째를 가진 아빠들에게 말하고 싶다. 아빠에게는 두 번째지만 그 아이에게는 모든 것이 처음이라고. 아빠로 인해 태어날 때부터 자신을 가치 없는 사람으로 여길 수 있으니, 첫째와는 다른 둘째만의 모습을 찾아내서 아낌없이 사랑해 주라고.
문제는 그 때문인지 엄마도 나를 덜 챙겼었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3~4살 때 엄마가 나를 혼자 두고 외출을 했던 날 이웃집 할아버지집에 갔었다. 그 집에는 나보다 어려 보이는 여자아이와 동네 몇몇 아이들도 와 있었다. 거기서 할아버지가 20 몇 개월쯤 된 아이의 몸을 만지는 장면을 목격했던 것 같다. 마당이 있는 집이었는데 가까이서 직접적으로 본 건 아니었지만 먼발치에서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혹시 내 차례가 오는 건 아닐까 무서움에 떨었는데 불행 중 다행으로 그런 일은 없었던 것 같다. 기억은 희미하지만 다음에 아빠가 그 할아버지에게 인사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속으로 '아빠는 저 할아버지의 나쁜 본모습을 모르고 인사를 하네.' 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그 뒤로는 그 집에 안 갔던 것 같다. 서너 살짜리를 집에 혼자 두고 엄마는 어딜 갔던 걸까? 엄마는 고만한 나이의 아이를 혼자두면 안된다는 평범한 육아상식도 몰랐나. 엄마가 나를 집에 혼자 두고 나갔기 때문에 나는 그 어린 나이에 보고 싶지도, 봐서도 안될 장면을 보고 말았고 세상의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었다.
그리고 언니는 유치원 보내고 나는 유치원대신 학원에 보냈는데 학원에서 하는 생일파티에 같이 생일이었던 친구는 한복을 입고 왔다. 하지만 나는 엄마가 한복을 챙겨주지 않아서 입고 있던 노란색 티셔츠를 입고 사진을 찍었다. 한복 입은 친구를 보고 울면서 나는 엄마가 안 챙겨주는 사랑 못 받는 아이라는 생각이 들어 서러웠다. 선생님도 어떤 말로도 달래주지 않으셨고 내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사진만 찍었다. 찍기 싫었는데 말도 못 하고 억지로 찍었다.
커서 보니 언니는 유치원에서 한복 입고 찍은 생일파티 사진이 있었다. 역시 언니만 챙겨주고 나는 안 챙겨줬던 거였다. 엄마와 집에서 대화를 나누지도 않아서 무슨 연유로 한복을 못 챙겨줬는지 알 수 없어 쭉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라는 이름표를 나에게 달아줬다.
그 이름표를 달아서인지 학창 시절의 나는 선생님이나 반장에게 다른 아이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시키거나 잘하는 것도 억지로 해야 하는 아이가 되었다.
여기서 어릴 때의 나는 나에게 ' 엄마에게 사랑 못 받는 아이'라는 네임을 붙였지만 지금의 나에게 엄마가 나에게 어떻게 했든 나는 '사랑받을 가치 있는 사람'이라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