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테리적 성향을 갖게 된 원인과 새로운 다짐

주체적이지 못했던 과거를 지나, 내 삶의 주인이 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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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다닐 때는 엄마가 맞벌이를 했다. 학교 마치고 집에 가도 아무도 나를 반겨주지 않았다. 엄마는 점심이나 간식이 필요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처럼 아무것도 챙겨놓지도 않았다. 아침에 해놓고 간 밥을 차려먹고 간식도 알아서 사 먹어야 했다. 주로 커다란 웍에 계란스크램블을 한 다음 밥을 넣고 비벼 간은 조미료 '다시다'로 해서 먹었다.


중학교1학년 학기 초, 아직 급식실을 짓고 있는 중이라 도시락을 싸가야만 했던 기간이 있었다. 나는 도시락만큼은 반찬을 다양하게 먹고 싶어서 엄마에게 여러 가지를 싸달라고 했는데 돌아온 말은 언니는 장조림 하나만 싸줘도 잘 먹는데 너는 왜 그러냐였다. 그 말을 듣고 어떤 기분이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엄청 까다롭고 엄마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된 것 같아 마음이 복잡했다.



언니가 나에게 심부름을 시킵니다.


초등학교 국어 문제집 짧은 글짓기 주관식 문제로 내가 지었던 문장이다. 집안에서 밥 차리고 설거지하는 것은 물론 슈퍼, 문구점, 비디오대여점을 언니심부름으로 다녀와야 했다. 한 번은 너무 가기 싫어서 울면서 안 가겠다고 버텨봤지만 언니는 끝까지 갔다 오게 했다. 그렇게 내 감정을 무시당하고 다른 사람의 요구를 우선시하게 된 것이었나 보다.


아빠는 내가 원하는 것보다 아빠가 사주고 싶은 것을 사주는 사람이기도 했다. 별로 갖고 싶지도 않았는데 초등학생 때 mymy를 사줬고 컴퓨터를 사줬고 흥미도 없는데 피아노 학원, 보습학원, 컴퓨터학원을 보냈다. 제대로 못 배우고 중간에 그만뒀다.


고등학교 때 아빠랑 트레이닝복을 사러 갔는데 박시하게 나온 것 같아서 원래 66 사이즈지만 55로 사려고 했다. 점원도 55를 권하는 데도 아빠 때문에 66으로 샀다. 입어보니 역시나 상의가 목이 파인 스타일이다 보니 헐렁해서 불편했다.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을 사는 건 어쩌다 한 번이고 아빠 뜻대로 사야 해서 만족스럽지 못했다.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것 마저 억지로 해야 했다. 초등학생 때는 학년마다 상을 주기 위해 교내대회를 열었었는데 2학년 때 독창대회에서 우수상을 탔다. 그런데 담임도 아니었던 어떤 선생님은 부탁이 아니라 당연하다는 듯이 노래 잘하는 아이들을 모아서 자기 결혼식 축가를 부르게 했다. 또 떨리긴 왜 그렇게 떨렸는지 가수가 되긴 글렀다고 생각했는데 가수 조이님이 동생이 결혼식 축가를 부탁하자 음악방송보다 결혼식 같은 작은 무대가 더 떨린다고 하는 말을 듣고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그때 떨었다고 가수 못할 건 아니었구나. 알게 되었다.


중학교 2, 3학년 2년 동안 담임이었던 선생님은 나를 싫어하는 게 느껴졌다. 뭣 때문인지 화를 내면서 교실 뒤편 게시판을 꾸미라 하셔서 내심 기쁘면서도 뭔가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했다. 선생님이 화내면서 시키니까 긴장했는지 아이디어도 떠오르지 않았고 한글프로그램에서 글자크기를 크게 키우려면 종이를 넓게 바꿔야 하는데 그 방법이 기억나지 않아 세로로 최대한 크게 해서 출력해 갔다. 선생님은 나에게 글자가 작다고 핀잔을 주며 반장에게 글자를 크게 고치라고 시키셨다. 직접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반장에게 지시해서 내가 무능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20대 후반의 젊은 여선생님이셔서 비록 선생님이지만 미성숙하셨던 게 아닌가 싶다.


고등학교 때도 상황은 비슷했다.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더러운 화장실청소를 나에게 시켰고 2학년 때 반장은 체육대회 때 코끼리코돌기에 맘대로 나를 포함시켰으며 그래놓고 못한다고 비난해서 울음이 터졌다. 또한 두 명이서 하는 한자 수행평가를 비호감인 아이와 엮어줬다. 여러 명에게 100원~200원 정도의 적은 돈을 달라고 해서 모은 돈으로 과자를 사 먹는 아이였다. 어쩌다 한 번이 아닌 자주 그러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잘했다고 한자선생님께 불려 가서 칭찬을 받긴 했지만.


그렇다. 하기 싫어도 선생님이 시키면 해야 했고, 언니가 시켜서 해야 했고, 아빠가 해주는 대로 해야 했으며, 고2 때는 반장이 정해주는 대로 해야 했다.

그리고 엄마한테 도시락반찬 여러 가지 싸달라고 했다가 까다로운 사람이 됐다.

내 요구가 받아들여진 경험은 적은 반면 무시받고 존중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살아왔다. 그런 환경이 다른 사람의 눈치를 살피고 내 감정과 필요보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중요시하여 요구를 들어주는 사람으로 자라게 했다.




인생이라는 경기에서 더 이상 수비수가 아닌 공격수가 될 거야


20대 때라고 다르지 않았다. 대학교 같은 반이나 아르바이트에서 만난 친구들이 불편한데도 끌려 다녔다. 싫다고 말하지 못했다. 싫은지 좋은지를 알아차리는데도 한참이 걸리고 감정을 인식하는 데 무뎌졌었다. 한마디로 나는 내 삶의 주인이 아니었다.


인생이라는 경기에서 그저 수동적으로 상대의 공격에 맞춰 방어하는 수비수에 불과했다. 이제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나의 플레이를 펼치는 공격수로 살아가고 싶다.


2024년 12월 말인 39세까지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했다. 그리고 현재까지 약 1년째 직장 내 괴롭힘과 개인정보보호법위반으로 신고 가능할 만한 개인적인 경계선침범, 사생활 침해를 입은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 중 심리치유방법을 검색하다가 문제의 근본원인인 내가 타인의 요구를 나 자신의 욕구보다 우선시하는 히스테리적 성향의 사람임을 알게 되고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왜 그런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삶을 되돌아보았더니 답이 나왔다. 첫 번째는 가족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고 2차적으로 학교에서 반장, 친구, 선생님 등 주변인들이 더 강화해 왔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불행했고 내 맘대로 할 수 없다는 무력감과 답답함을 갖고 살아왔음을 사무치도록 깨달았다.


나는 다른 사람을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나의 몸과 마음의 안전과 편안함이 우선이다. 그렇지만 어릴 때부터 난 자신이 소중하지 않고 무가치하고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받아왔고 무의식에 뿌리 깊게 박혀 있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피해자 역할을 자처하며 살아왔다. 그동안은 명확히 인지하지 못했지만 이제 문제가 무엇인지 알았으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첫걸음을 떼었다.


앞으로의 삶은 나를 위해, 나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살기로 했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묻고 원치 않을 때는 과감히 거절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원하는 것을 맘껏 누릴 자격과 권리가 있다. 다른 사람을 실망시켜도 그건 그 사람이 감당해야 할 몫일뿐이다. 그리고 남의 감정까지 신경 쓰는 건 그 사람을 나약한 사람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 내가 원하는 대로 안 해줘서 잠시 속상해도 알아서 회복할 거라 믿으면 그만이다.


누군가 지금 행복하지 않다고 느껴진다면 이 글이 자신을 성찰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행복으로 가기 위한 첫 번째 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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