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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식 Oct 04. 2023

찬밥 신세


                                 


  경험만큼 좋은 스승은 없는듯하다. 어린 날 겪은 일들이 어느 경우엔 평생을 지배하는 삶의 철학이 되기도 한다.

 어린 시절 외가를 찾았을 때 일이다. 어느 가을날 메뚜기를 잡겠다고 할아버지 뒤를 따라 나섰다. 너른 논 한가운데 벼 포기 사이를 마치 강아지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메뚜기를 꽤 많이 잡았다. 그리고 일을 마친 할아버지와 논두렁을 걸을 때 일이다. 할아버진 무거운 짐을 지게에 지고도 논둑에 흘린 벼 이삭을 구부려 줍는다. 이때 할아버진 벼 한 톨을 가꾸려면 아흔 아홉 번의 손길이 간다고 했다. 그러므로 단 한 톨의 쌀도 귀한 것이란 말씀을 잊지 않았다. 사실 그 때는 할아버지 말씀을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경찰 공무원인 아버지를 따라 잠시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다닐 때 일이다. 점심시간이면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여 주린 배를 물로 채우는 아이도 있었다. 설령 도시락을 싸온다고 하여도 새카만 꽁보리밥이 다수였다. 어느 아이는 소풍 때 멀건 죽을 도시락으로 싸와 바위 뒤에 몰래 숨어서 먹는 것도 보았다. 

 요즘 풍요로움과 휘황한 문명의 불빛에 익숙해진 젊은이들이다. 이들이 이 말을 들으면 선뜻 수긍이 안 간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안다. 며칠 전 음식 쓰레기를 들고 아파트 음식 쓰레기장을 찾았을 때 일만 해도 그렇다. 앞서 걸어간 젊은 여성이 버린 듯한 허연 쌀밥이 음식 쓰레기통에 버려진 게 눈에 띄었다. 밥이 상해서 버린 것인지 그 속사정은 모르겠다. 버려진 쌀밥을 보자 지난날 가난 때문에 배를 주리던 친구들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그러자 음식 쓰레기통에 버려진 밥이 못내 아까웠다. 어린 날 어머니는 밥이 약간 상한 것은 물에 행궈 끓여 먹곤 하는 것을 보고 자란 탓인가 보다.

 다 아다시피 쌀은 아시아인들의 주식이다. 세계 총 생산량의 92%가 아시아 지역에서 생산된다. 이는 아시아인들에겐 쌀이 결코 부차적 곡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생산량이기도 하다. 이로보아 아시아에선 쌀이 단순한 곡물에 그치지 않고 문화이자 생명줄이며 한편 역사이기도 하다면 지나치려나.

 이런 쌀에 관한 사고思考가 필자의 편견만은 아닌가보다. 실은 쌀이 수많은 신화와 전설로 살아 남아있잖은가. 어느 문헌에 의하면 동남아에 있는 쌀의 기원 신화 중엔 시체 화생 형屍體 化生型이란 게 있단다. 동남아에선 죽은 사람(여자)의 몸에서 좁쌀 · 코코야자· 쌀 등의 재배 식물이 생겼다는 신화가 전해온다. 이는 쌀이 단순한 곡물이 아닌 하나의 인격체로 바라보는 그들의 시각에 의해서 일 것이다. 그들도 필자와 같은 쌀에 대한 개념을 지닌 듯하다. 쌀을 함부로 다루거나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관념이 그것이다. 이는 일종의 도령 관념稻靈觀念이 아닐까 싶다.

 이런 관념이 강한 대표적 민족은 태국 북부에서 라오스 쪽에 사는 라오족이란다. 이들은 쌀농사가 단순히 경제 활동이 아닌, 초자연적인 것과 매우 밀접한 종교 행사로까지 인식하고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종족인 라메트 족도 도령을 믿고 있어서 이 영혼이 달아나면 곳간이 텅 비고 기근이 일어난다고 생각한단다. 

  쌀의 기원은 기원 전 7,000여 년쯤으로 알려져 있다. 벼를 가장 먼저 재배한 곳은 인도다. 중국은 기원 전 5000년께로 알고 있다. 반면 한국은 기원전 2000년께 중국으로부터 들어왔다. 또한 쌀은 크게 일본 형과 인도 형으로 나눈다. 일본 형은 일본을 비롯, 한국· 중국· 브라질·스페인· 미국의 캘리포니아 주에서 생산된다. 인도 형은 동남아시아·중국 남부·인도·미국 남부에서 생산된다.

 요즘도 가을 들녘을 황금물결로 수놓으며 알알이 익은 채 고개 숙인 벼이삭들을 바라보노라면 왠지 절로 배가 부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다이어트가 화두로 떠오르자 밥이 탄수화물 덩어리라는 인식에 의하여 쌀이 홀대를 받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시중에 쌀이 남아돈다는 뉴스까지 전해진 적도 있다.

 흔히 무시를 당하거나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처지를 ‘찬밥신세’라고 빗대기도 한다. 그러나 요즘은 어떤가.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한 ‘햇반’이 각광을 받는 시대가 아닌가. 바쁜 일상에 쫓기는 현대인들에게 찬밥은 예전에 ‘식은 밥’이 지녔던 개념이 아니다. 시중에서 손쉽게 구입하여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리기만 하면 따끈따끈한 갓 지은 듯한 밥으로 금세 변신하는 게 찬밥이다.

 뿐만 아니라 밥은 단순히 탄수화물 범벅만이 아니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곡기를 여러 날 끊으면 건강을 잃음과 동시에 생명이 위태롭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도 실은 밥과 연관된 말이 아니던가. 동남아처럼 쌀에 대한 도령관념은 아닐지라도 뙤약볕에 구슬땀을 흘리는 농부들의 노고를 생각해서라도 쌀 한 톨도 귀히 여겨야 할 것이다. 그야말로 쌀을 ‘찬밥 신세’ 취급해서는 안 될 일이다. 아무리 먹거리가 지천인 세상이라 해도 쌀은 우리의 주식인 동시에 목숨 줄이나 진배없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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