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냐 May 06. 2021

오늘은 너를 위한 세상이었을까

어린이날을 보내며

https://youtu.be/AWCtEq4Vp_Q


 며칠 전 길을 걷다가 가로등에 걸린 광고 플래그가 눈에 들어왔다. 5월 5일 어린이날 단 하루 공연되는 어린이용 뮤지컬 홍보였다.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은 콘텐츠를 뮤지컬로 만들어 공연하는 것 같았다. 얼마간 고민하다 티켓 예매 사이트에 들어갔다. 당연히 매진이었다. 우리 조카가 유별나지 않은 이상 조카가 좋아하는 걸 다른 아이들도 좋아하리란 걸 왜 생각치 못했을까. 아이돌 콘서트 예매에 당연히 준하지 못하리라 생각하고 느긋하게 생각했던 지난 날이 후회스러웠다. 그래도 기억에 남을 만한 어린이날 이벤트는 만들어 주고 싶었다. 태권도 학원에서 연 달란트 시장 말고. 나중이 되어서도 추억할만한 그런 이벤트. 


 티켓 예매 사이트를 뒤졌다. 남아 있는 공연 중에서는 (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블랙라이트로 진행한다는 인형극이 제일 좋아 보였다. 예고편에 나오는 연출이 특히 괜찮아 보였다. '미운 오리 새끼'라면 조카가 알고 있는 내용이기도 하고, 공연 시간도 적절해 보여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조카에게 예고편 동영상을 보여주었다. 조카가 재미있을 것 같다고 했다. 다행히 동행을 약속해준 친구 몫까지 예매할 수 있었다. 그날부터 조카는 디데이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그리고 5월 5일이었다. 당일 스케쥴은 빡빡했고 어린 조카에게는 고된 여정이 될 것임이 틀림없었다. 


1. 1시간여 남짓 지하철을 타고 근방으로 이동하기 


 나는 자동차도 없고 면허도 없다. 자연히 대중교통수단이라는 관문을 넘어야 했다. 조카는 다행히 제법 얌전히 기다려 주었다. 지하철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가위바위보-다리 찢기를 했다. 인적이 드문 플랫폼이라 그거라도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큰 소리로 벤치에 쓰인 간격을 두고 앉으라는 내용의 글자들을 읽는 조카를 누군가 대견해하며 지나갔다. 조카는 쑥쓰러워 하면서도 칭찬에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전철을 타고서는 제법 낯을 가리면서도 빨리 흐르지 않는 시간을 지루해 했다. 나와 휴대폰 게임을 하다가 지하철 노선도를 보면서 몇 정거장이 남았는지 계속 세었다. 동행인이 중간에 합승(?)하면서는 새로운 사람의 출현에 조금쯤 더 신나 했다. 


 환승한 지하철 노선에선 착한 언니도 만났다. 요즘 유행하는 실리콘 뽁뽁이 장난감에 눈길을 빼앗긴 조카가 인사를 해도 되냐고 물어 언니가 싫을 수도 있으니까 안 된다고 했는데, 그걸 묵묵히 듣고 있던 아이가 제 가방에서 하나를 더 꺼내 조카에게 내밀었다. 나는 황급히 내가 가지고 있던 사탕을 내밀었다. 조카는 하차 할 때까지 장난감을 소중히 가지고 놀고, 고맙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지하철 역 출구에서는 동행인과 게이트를 나가느냐 나와 게이트를 나가느냐를 두고 잠시 실랑이를 벌였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다가 눈에 띤 글라스 아트를 보며 좋아하는 색이라고 하나하나 짚어 이야기하기도 했다. 길 가다 서서는 민들레 홀씨를 불고 싶어 했다. 육교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섰더니 버튼은 꼭 자기가 눌러야 한단다. 그러더니 갑자기 아까 아이에게 내어 준 사탕을 왜 자기에게는 주지 않느냐고 화를 냈다. 으레 있는 일이라 나는 조카가 배고픈가보다 했는데(우리 집 내력이다. 배고프면 짜증내는 것.) 동행인이 당황에서 우리 사이를 말렸다. 

 

2. 점심으로 피자 먹기


 피자집에 도착했더니 뜬금없이 마요네즈 피자가 먹고 싶단다. 적당히 알아듣고 리코타와 모짜렐라 치즈가 들어간 피자를 시키려는데 동행인이 조카가 원하는 게 크림소스 피자는 아닌지 걱정했다. 그 와중에 조카는 큰 소리로 메뉴판의 가격-숫자를 읽기 시작했다. 이 숫자는 뭐냐고 보채기도 했다. 이 때도 동행인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내가 조카를 상대한다고 하고 급히 주문을 부탁했다. 


 다행히 음식이 서빙되고 나자 조카는 치즈스틱도, 피자도 잘 먹었다. 서버가 다 먹고 기분이 좋아져 얌전히 앉아 있는 조카를 멀리서 놀아 주었다. 계산을 하려는데 '안녕히 가세요, 공주님' 하고 인사도 해 주셨다. 조카도 꾸벅 인사를 했다. 피자 가게를 나올 때 조카의 기분은 다시 좋아져 있었다. 


3. 택시 타고 이동하기


 도저히 여러 번 환승할 엄두가 나지 않아서, 그렇다고 버스를 타기는 주변 지리가 익숙하지 않아서 K택시를 불렀다. 돈을 조금 더 내면 크고 방역이 되어 있는 차를 탈 수 있더라. 기사님은 과묵하고 친절하셨다. 조카가 안전히 오르내리고, 안전벨트를 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 주셨다. 조카는 얌전히 앉아 밖을 구경했다. 


4. 장난감 고르기


 예상 못한 건 아니었지만, 한 동 한 층의 절반이 장난감 판매장이었던 목적지는 아수라장이었다. 그 때까지 안 보이던 아이들이 다 여기에 있나 싶을 정도로. 조카는 실바니안 패밀리서부터 플레이모빌, 레고까지를 안절부절 오가며 이걸 산다고 했다가 저걸 산다고 했다가, 내 손을 놓고 다른 매장으로 뛰어 갔다가를 반복했다. 나는 조카 꽁무니를 쫓아다니기 바빴다. 결국 플레이모빌 아이스크림 가게 세트를 골라서 정신없이 그곳을 빠져나왔다.  



5. 간식 먹고 화장실 다녀오기


 간식을 먹으러 가는 길에 있는 2,000원짜리 놀이기구 자동차를 동행인이 태워주었다. 그렇게 타고 싶어 하더니 막상 놀이기구가 앞뒤로 흔들리기만 하니 재미가 없는지 언제 끝나냐는 말만 반복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내리면서 다시는 타지 않겠다고 약속 아닌 약속을 했다. 


 카페에 들어가 케이크를 주문해 주었다. 점심이 조금 모자랐던 건 아니었나 싶어서였다. 걱정이 무색하게 크림만 조금 떠 먹고, 함께 사 준 생딸기우유를 먹더니 배부르다고 그만 먹는다고 했다. 그 후가 되어서야 외출을 제일 고민하게 했던 '화장실 가고 싶어' 시간이 돌아왔다. 조카는 급박한 상황이 되어야만 말하는 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근처 화장실엔 사람이 적었다. 그 층에 있었던 사람 수를 생각하면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오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화장실에 다녀와서 인형극 티켓을 수령했다. 이번에도 동행인이 현금 지폐를 바꾸어 근처에 있던 가챠 장난감을 두어 개 뽑아 주었다. 다행히 조카가 가지고 싶다던 캔뱃지가 나왔다. 인형극을 보러 들어가기 전까지 조카는 그것을 손에 꼭 쥐고 있었다. 


6. 인형극 관람


 정시가 되자 배우 분들이 나와 주의사항을 설명했고, 불이 꺼지자 조카는 제법 집중했다. 중간중간 대사에 관해 묻고, 아주 마지막 장면에 가서 언제 끝나냐고, 집에 가고 싶다고 말해 금방 끝난다고, 이제 백조 되는 것만 남았다고 설명해주긴 했지만. 형광색 색종이와 수제 블랙라이트로 하는 체험까지 무사히 마쳤다. 


 재미 없어 했던 것 같아 약간 풀이 죽었는데 또 직접 물어보니 괜찮았고 재밌었단다. 이제는 라이트까지 손에 쥐고 놓지 않았다. 그리고 떼를 썼다. 장난감을 손에 쥐고 있어야 하니 내 손도 동행인의 손도 잡지 않겠단다. 멈춰서 조카를 붙들고 혼을 내야만 했다. 아이와 시선을 맞추고, 꼭 붙잡고 말했다. 우리 나오기 전에 한 제일 중요한 약속이 무엇이었냐고.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이모 손을 놓지 않는 것 아니었냐고. 조카는 울먹였다. 기어이 이모가 밉다는 소리가 나왔다. 속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람이 너무 많았고, 그런 곳에 데려 간 내 잘못이었다는 자책만 자꾸 들었다. 조카가 슬그머니 손을 잡아 왔다. 괜히 마음이 아렸다. 그 손을 꼭 붙들고 그 건물을 벗어났다. 


7. 지하철 타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


 돌아오는 지하철 노선은 갈아타지 않아도 되었다. 두 자리가 비어 내가 조카를 끌어안고 타고, 동행인이 그 옆에 앉으니 곁에 계시던 할머니께서 나란히 앉으라며 자리를 비워 주셨다. 죄송하고 감사했다. 집에 갈 것을 걱정하는 조카를 위해 동행인은 유튜브에서 조카가 좋아하는 콘텐츠를 몇 개 틀어 주었다. 조카는 그것에 엄청나게 집중했다. 도착이 괜히 빨리 느껴졌다. 게이트를 빠져나와, 마중 나온 할머니를 향해 뛰어가서 조카는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조잘댔다. 




 저녁엔 일찍 잠들었다가 깨었는데, 그 후로는 왠지 잠이 쉽게 오진 않았다. 정말 조카가 오늘 하루를 재미있게 보냈을지에 대한 확신이 내 안에 없었다. 조카를 위한다고 한 이벤트였는데, 어른들 편한 대로 이리저리 끌고 다닌 건 아닌지 걱정이 됐고,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또 슬퍼졌다. 동행인이 없었다면 조카를 나 혼자 잘 돌볼 수 있었을까 하는 회의감도 들었고, 그 날 하루 너무 긴장한 채 돌아다닌 탓인지 식사한 것이 전부 얹혀 위통으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조카가 옆에 와서 누워달라고 했다며 깨면 와달라는 메시지가 와 있었다. 요즘 조카는 나와 우리 엄마-할머니 사이에서 자기를 좋아한다. 그것조차 이래저래 생각이 많아져 선뜻 가지 못했다. 나는 좋은 양육자 역할을 하고 있는 걸까. '어린이날'이라는 사회적 의례를 수행하기에 바빠 아이와 정서적으로 교류하는 것은 뒷전이 아니었나 하고. 


 결국 아이 옆으로 자리를 옮겨 잠든 얼굴을 보면서는 다시 다짐했다. 다음에 비슷한 기회가 온다면 좀 더 좋은 이모, 좋은 양육자, 좋은 보호자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너를 좋아한다고 더 많이 말해 주어야겠다고. 내 실수, 내 무기력함, 내 서툰 역할 노릇을 모두 받아주어서 너에게 고맙다고.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아닌 네가 좋아하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