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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7화. 마른 풀 같은 순례 인생

순례는 서른 여섯에 과부가 되었다. 다섯 아이를 품에 안은 채...

by 마음리본
김순례 여사는 마른 풀 같은 인생을 살았다.

그 시절 우리내 엄마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순례의 엄마는 순례가 4살 때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

아버지는 순례가 5살 때 새 장가를 갔다.

어려운 살림에 오빠 둘은 고아원에 보내졌고,

살림밑천인 순례만 새 엄마와 함께 살았다..

새 엄마가 와서 낳은 의붓 동생들을 도맡아 키운 순례는

학교 갈 나이가 되어도 학교를 가지 못했다.

밭일로 논일로 식모 아닌 식모살이를 한 순례는 지금도 한글을 읽지 못한다.


”딱 초등핵교 3학년만 보내줬어도 이라고 까막눈은 안 되제.“

나이 60에 다닌 한글학교는 영 소용없었다.

10칸 공책에 한글을 꼭꼭 눌러 10권 이상을 써도 순례의 한글 실력은 좀체 늘지 않았다.

”그 때는 알았는디 돌아서믄 글을 다 까묵어부러. 인자는 아예 못 읽어불고.

그랑께 배움은 다 때가 있는 것이다.“

글자를 모르는 순례에게 세상은 어떤 곳일까?

삼남은 안다. 글자는 몰라도, 스물 다섯살 유학간 MZ손주들과 대화가 가능하고,

세상 돌아가는 이치는 누구보다 잘 안다는 것을.

나이 60에 미싱을 배워 아들, 며느리, 딸, 사위, 손주까지

21명에 이르는 잠옷 바지를 손수 만들어 선물하는,

무엇이든 잘도 생산해내는 마이다스의 손이라는 것을.


그렇게 식모살이를 했어도, 엄마는 외할아버지 사랑만은 듬뿍 받았다고 했다.

퍼줘도 퍼줘도 끝이 없을 것 같은 엄마의 사랑을 받을 때면 삼남은 묻곤 했다.

”엄마는 어떻게 그렇게 사랑이 많아? 누구한테 사랑을 받은 거야?“

순례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느그 외할아부지제. 내 아부지가 나를 겁나 이삐 했어.

열 몇 살까지 땅에 내려놓지를 안코 업고 댕겼당께. 이뻐갖고.

그랑께, 그 다리병신 서방한테 시집 보낼 띠게 을마나 마음이 쓰렸겄냐.

돈이 없응께. 논 몇 마지기에 나를 거그다가 보낼띠게,
내 아부지가 저 건네 논까지 배웅 와 갖고 울었제. 우리 아부지가...“

순례는 그렇게 ‘다리 병신'(순례는 남편의 장애를 항상 그렇게 이야기하곤 했다.)

이라는 남편에게 시집을 왔다.

정확히 한 쪽 발이 조금 짧은 장애인이었다.

지금의 의학으로는 수술로 금방 고칠 수 있을 것을.

아빠가 뽀옥뽀옥 기어다니던 시절, 어른들이 모두 들일을 나가고,

당시만 해도 아기가 아기를 보던 시절이었다.

너덧살 많은 누나가 기어다니던 남동생의 허벅지를 그만 밟고 말았다.

다리 한쪽이 엉덩이뼈에서 빠져나간 것을 나중에 알았지만

수술하기에는 너무나 큰 돈이 들었다.

그렇게 삼남의 아버지는 장애인으로 평생을 살아가야 했다.

아빠는 머리가 굉장히 똑똑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책을 한번 보므는 다 알아불어. 아조! 한자고, 그 어려운 책들을 다 읽어분당께.“


당시엔 장애인이라면 어디 취직도 못하고 천시받는 시대였다.

그렇게 삼남의 아버지는 그 똑똑한 머리를 써 먹지 못하고

평생 시골 촌구석에 처박힌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술을 마셨다.

술만 곱게 먹었으면 괜찮았는데, 술을 먹으면 남과 시비가 붙어 싸움을 하고,

집에 와서 엄마를 때렸다고 한다. 자신의 무능함과 열등감을

예쁘고, 건강한, 10살이나 어린 아내에게 투영하며 분노를 표출했다.

”술만 묵으믄 때래싸. 아조. 한글도 모르는 무식한 애펜네라고 무시하고....

잘 죽었시야. 잘 죽었어. 살았으믄 내 속을 앵간히 안 쏙였을 것이다.“

”그람서 뭐다러 제사는 해마다 지낸당가?“

”우리 새끼들 잘 봐주라고 그라제. 하영이 아부지, 우리 새끼들 잘 봐주이쇼.

이찌카든지 새끼들 잘 살게 해 주쇼.“

제사를 잘 지내면, 저 세상에 간 아버지가 자식들을 보살펴준다고

순례는 지금도 철떡같이 믿고 있다. 순례의 제사는 마당에 정한수 떠놓고

천지신명께 빌던 때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오로지 자식을 위한 한결같은 마음.

순례에게 자식은 신앙이었다.


순례는 서른여섯에 과부가 되었다.

다섯 아이를 품에 안은 채였다.

큰딸은 열 살, 막내는 이제 막 돌을 지난 아이.

그 해 겨울, 아빠는 떠났다. 간암이었다.

술이 친구였고, 술은 몸을 갉아먹고 있었다.

엄마는 말한다.

“술이 사람을 잡는다이, 나는 술이락하믄 아조 질색이여.”

아빠는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말했다.

“하영이 엄마, 애기들 고아원 보내고… 새 시집 가소. 나한테 시집 와서 고생 많았네…”

엄마는 고개를 저었단다.

이 새끼들을 으찌케 고아원에 버린다냐?

작은 아이들을 품에 안고, 순례는 크게 울 수 없었다.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시무룩한 엄마, 오남매.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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