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 두라
“맨날 울고 누워 있으믄 누가 내 새끼 입에 밥이나 떠먹여 준다냐?”
순례는 상을 치른 지 이레만에 떡방앗간으로 향했다.
순례가 살아야 할 이유는 자식이었다.
치마폭에 묻은 기름 자국도 닦을 틈 없이 기계를 돌리고,
찹쌀을 빻고, 참기름을 짰다.
사람들은 손가락질했다.
“남편 잡아먹은 년.”
“남편 죽고도 장사하는 걸 보니 독한 년이네.”
그 시절, 과부는 연민의 대상이 아니었다.
의심의 시선 아래, 밤길을 조심해야 했고,
웃어도 안 됐고, 누군가의 친절에도 조심해야 했다.
엄마는 그 좁은 시골 마을에서 숱한 시선을 마주하며 살아야 했다.
“부끄로와서 얼굴을 못 들고 다녔제. 사람들이 욕할까 봐.”
눈을 피했고, 말을 삼켰고, 아이들에게는 늘 평온한 얼굴을 보였다.
삼남은 그때 엄마 마음이 얼마나 막막했을지 생각하곤 한다.
“그때는 그래도 젊응께, 자신이 있었제. 몸이 안 아픙께야.”
엄마는 그렇게 씩씩하고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런 엄마에게 유일한 안식처는 시댁이었다.
큰 집, 작은 집. 불과 1킬로미터 떨어진 두 집은 엄마의 방패막이었다.
큰 아빠와 작은 아빠는 젊은 과부가 아이들 버리고 떠날게 염려되었는지(?)
항상 곁을 지켜주었다.
누가 엄마를 무시하면 말없이 그 앞에 나섰다.
가장 큰 위로는 큰엄마였다.
같은 여자로, 같은 며느리로, 엄마의 고단함을 누구보다 알았던 사람.
방앗간이 바쁜 날이면 큰엄마는 일을 도우러 왔다.
떡가루가 날리는 공기 속, 뜨거운 기계 소음 틈 사이로 엄마의 목소리가 뚫고 나왔다.
“얼릉 와야제. 이라고 늦게 왔소. 힘들어 죽겄는디!”
엄마는 큰엄마에게 알 수 없이 무례하게 굴었다.
때로는 자신이 힘든 게 큰엄마 때문이라는 듯 불평을 퍼붓기도 했다.
하지만, 엄마만큼이나 목소리가 쩌렁쩌렁한 큰엄마는 한결같이 엄마 곁에 있었다.
두 여자의 목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꼭 싸우는 줄 알았지만, 끝은 항상 웃음이었다.
삼남은 목소리 크고 싸움꾼인 큰엄마가 우리 편인 게 든든했다.
큰 방패막 같았다.
여름날 저녁 무렵이면,
수박 다섯 통을 고무 다라이에 이고 저수지 너머
삼남이네 집으로 걸어오는 따스한 그림자.
큰엄마 나이 60세. 비쩍 마른 큰엄마 몸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왔을까?
뙤약볕 아래에서 하루 종일 수박 작업을 하고 받은 수박을
작은 몸으로 이고 오던 그 무게.
그것은 수박이 아니라, 사랑이고 긍휼함이었다.
남편 없는 과부에 대한 긍휼이요, 아빠 없는 조카들에 대한 사랑이었다.
보름달 빵도 그랬다. 농사일을 하고 새참으로 받은 빵을
본인 입에 넣지 않고 며칠간 모아두었다가 조카들에게 가져다주었다.
때론 곰팡이가 피었어도 그 마음은 따뜻하고 단단했다.
가난한 과부의 돈을 떼어먹고 달아났던 춘식 엄마가
소재지에 나타났다고 했을 때, 버선발로 달려와 준 사람.
그 춘식 엄마가 삼남이네 방앗간 바로 앞에 방앗간을 차렸을 때
밭 갈던 호미를 던지고, 뛰어와 준 사람.
순례와 춘식 엄마가 머리채를 서로 잡고, 한 덩이가 되어 나뒹굴 때
함께 머리채를 잡고 뒹굴어준 사람.
그게 큰엄마였다.
큰엄마가 있었기에 가난한 과부의 삶이 비참하지 않았다.
넉넉하고 든든했다.
그 기억은 지금도 삼남의 가슴속 한구석을 따뜻하게 채워준다.
이제 아흔다섯, 치매에 걸린 큰엄마는 하루에 세 번,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왜 안 오냐, 나 안 찾아오냐… 옛날에 일 시켜서 미안하다잉…”
그 말에, 엄마는 눈을 감는다. 삼남도 고개를 떨군다.
그 시절 받은 사랑을 아직 갚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랑은 언제나 말보다 무게가 있다.
우리는 그 무게를 등에 지고 오늘도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