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테 잘 해야 써. 그래야 내 새끼들한테 복이 온당께.
“오매 오매, 니가 하영이냐, 진영이냐, 삼남이냐. 몰라보겄다.”
허리가 반으로 접힌 작은 엄마가 삼남이네 일가족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기억은 흐릿해도, 정은 남아 있는 얼굴.
어제 본 사람처럼 반가워하시던 그 눈빛이 삼남의 가슴을 몽실거리게 했다.
“서울 형님은 잘 계시오?”
엄마가 고향을 떠난 후, 큰엄마는 그 넓은 집을 정리하고
엄마가 있는 곳으로 따라 올라오셨다.
그게 엄마를 위함인지, 홀로 남겨지기 싫었던 건지, 아마 둘 다였으리라.
“잘 계시기만 한당가. 전화통을 아조 붙들고 산당께.
맨날 나 안 온다고 투정이여.”
작은엄마가 웃었다. 엄마도 웃었다. 그 웃음엔 오래된 정이 있었다.
말이 많지 않아도, 서로를 아끼는 사람들만의 정.
작은엄마는 낙지를 꺼냈다. 무안에서 공수한 씨알 굵은 낙지.
살짝 데친 낙지 다리를 접시에 놓았다.
그 옆엔 홍어, 수육, 찰밥, 봄나물. 그리고 손수 담근 김치.
“언능 앉으쇼. 안저서 드쇼잉.”
삼남은 낙지 다리 하나를 입에 넣어 보았다.
입 속에 꽉 찰 정도로 튼실한 낙지 다리. 야들야들, 부들부들...
서울에서는 맛 볼 수 없는 산지직송 맛.
"이 홍어가 흑산도 것이요. 조카들 온다고 저 양반이 돈 애끼지 말라고 안 하요."
한 마리 50만원은 주었을 흑산도 홍어였다.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적당히 삭힌 홍어 한 점이 코를 찌른다.
고향 냄새.
전라도 잔칫상에 홍어가 빠지면, 그 잔치는 성의없고 싱거운 것.
그만큼 귀한 사람에게 대접하는 것이 홍어회다.
완전히 90도로 꺾인 허리를 하고 부엌을 오가던 작은엄마.
그 손끝에서 오랫만에 만난 손윗 동서와 조카들에 대한 사랑이 묻어났다.
넉넉한 전라도 한상이었다. 다 퍼주고도 아쉬워하는 인심이 순례와 참 닮았다.
”형님이 여그 살 적에 그라고 남한테 베풀고, 항시 퍼주고 나눠준께로
형님 자식들이 이라고 다들 빤뜻하니 잘 사요. 나도 인자는 다 퍼주고 살라요.“
그랬다. 엄마는 자기보다 남을 먼저 챙기던 사람이었다.
거지가 지나가도 밥 한 끼를 내어주었다.
“남한테 잘 해야써. 그라믄 내 새끼들한테 복이 돌아온당께.”
그 말처럼, 우리는 굶지 않았다.
이웃의 텃밭마다 널린 쑥갓, 깻잎, 상추. 무, 배추
큰 집, 작은 집서 날마다 공수해오는 쌀로 쌀독 빌 날이 없었다.
도시에 살았다면 분명 도시 빈민이었을 것.
엄마는 가난했지만 궁색하지 않았다.
오남매 과부 집엔 항상 사람들로 북적였다.
함께 음식을 나누고, 웃음과 슬픔을 나누던 사람들로...
“소재지 사람들이 형님 잘 사냐고 맨날 안부를 물어라우. 징하게 인심 좋은 사람이라고.”
엄마는 그 말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뿌듯한 미소였다.
그때, 문이 열리고 오빠가 들어왔다.
소주 한 박스, 맥주 한 박스를 어깨에 짊어진 채.
“내 아들 왔는가. 오느라 고생했네.”
엄마의 얼굴이 활짝 열렸다. 오빠는 대학을 포기하고 군인의 길을 택했다.
준위 승진을 앞둔 지금까지 묵묵히 한 길을 걸어온 사람.
엄마는 말했다.
“지 아부지 일찍 여의고, 애릴 때부터 가장 노릇을 해갖고 겁나 짠하냐잉. 느그 오빠가 젤 짠하다.”
그 말끝이 아려왔다. 다 말하지 않아도 그 마음이 다 느껴졌다.
엄마의 삶이, 작은엄마의 상차림이, 그날의 봄나물이,
삼남의 가슴속 상처난 어딘가를 쓸어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