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삼남은 엄마를 슬프게 하지 않기로, 착한 딸이 되기로 다짐한 걸까
“일곱 명은 되야 전용차선을 탈 수 있잖아. 너랑 정서방이 같이 가야 돼.”
큰언니의 목소리는 여전히 단호했다.
그 말투는 항상 ‘그렇게 해야만 되는 것’처럼 느껴지곤 했다.
오 남매 중 장녀로서의 권위,
홀로 도시로 나와 고군분투하며 세상에 맞섰던 세월이 그 말끝마다 배어 있었다.
아버지의 시제에 참석하기 위한 전라남도 영암군 서종면까지 왕복 8시간.
토요일이라 차가 막히면 그보다 훨씬 길어질 수 있는 거리였다.
그리하여 허리가 아픈 삼남과, 무릎과 허리가 모두 안 좋은 엄마를 위해
큰언니는 새로 뽑은 9인승 차량을 준비했고,
형부와 남편까지 포함해 딱 7명의 ‘전용차선 작전’을 완성시켰다.
3년 전, 문중에서 땅을 샀다고 했다.
양지바른 산비탈, 터를 갈고 문중 묘지를 조성했다. 아버지 묘를 이장하고
비석을 꾸미는 데 얼마간의 돈을 걷었다. 그리고 3년째 단체로 드리는 합동 시제였다.
오빠와 남동생은 묘를 이장할 때나 시제를 드릴 때 매번 엄마를 모시고 가곤 했다.
딸이라는 핑계로, 멀다는 핑계로, 아버지 산소를 찾지 않은 지 여러 해였다.
아버지......
아버지라는 이름은 삼남에게 잊혀진 존재였다. 얼굴 한번 못 본 아버지...
삼남의 아버지는 삼남이 3살 때 돌아가셨다.
삼남의 어린 시절 최초의 기억이자 아버지에 대한
마지막 기억은 병풍 뒤에 누워있던 죽은 아버지 얼굴이다.
그 침울한 공기, 십장생이 그려진 병풍, 하얀 머리띠를 두르고 두통을 호소하던
젊은 엄마의 절망스러운 얼굴,
병풍 뒤를 빼꼼히 내다보고 아장 대던 3살 배기 아기...
그때 그 순간이 사진을 찍듯 박혀 있다.
그녀의 상상력의 발로일까? 진짜 기억일까?
너무도 생생하고 너무도 또렷한 장면.
슬픔이라는 게 색깔이 있다면 아마도 온통 검푸른 색이었을 그 방안, 공기...
눈물을 삼키는 엄마의 표정.
‘그때 나는 엄마를 슬프게 하지 않기로, 착한 딸이 되기로 다짐한 걸까?’
삼남은 허리에 주사와 침을 번갈아 맞으며, 그 여정에 몸을 실었다.
서종면. 목포와 나주 사이, 영산강 물줄기 따라 평평하게 펼쳐진 들판.
마을엔 높은 산 하나 없고, 길고 넓은 논과 밭이 지평선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남쪽으로 30분만 가면,
그 평야 위에 거짓말처럼 솟은 월출산이 눈에 들어왔다.
돌로 둘러싸인 그 산은 정말로 누가 옮겨다 놓은 것처럼, 신령스럽게 솟아 있었다.
“나는 어릴 적에, 우리 동네가 영암보다 아래인 줄 알았네.”
형제들이 차 안에서 주고받는 말은 고향에 대한 기억과 무지를 교차시켰다.
“그랑께. 영암이 더 번화했응께, 완행버스 타고 30분 올라가는 줄만 알았었제.”
“오늘 보니까 영암이 더 아래에 있더라고. 나 몰랐시야.”
멀다고 믿었던 거리, 평생 위라고 생각했던 지명.
고향은 그만큼 낯설고, 멀었다.
16살 되던 해 떠난 고향.
그곳에서 살았던 시간보다, 떠나와 살아온 시간이 훨씬 길었다.
‘고향이라는 게, 단지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유만으로 굳이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걸까?’
삼남은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고향은 변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강산이 10년이면 변한다지만, 서종은 그대로였다.
관광지도, 기업도, 번화가도 없었던 그곳은 십수 년 동안 시간마저 멈춘 듯했다.
“사람이 없시야. 젊은 사람이 있어야 뭣도 할라고 하제.
맨 노인들만 있어갖고 동네가 발전을 하겄냐?”
어느새 엄마의 한탄이 시작됐다.
“고향 떠날 때 판 돈은커녕, 시방은 살 사람도 없시야.”
“전라도는 공장이 읎어. 맨 농사만 진디, 농사가 뭔 돈이 되디야? 비료값도 못 건진디.”
삼남은 창밖으로 펼쳐진 들판을 바라보았다.
과거로 가는 길은 언제나 물리적이다.
길을 따라가다 보면 기억이 들고, 그 기억 속에서
자신이 어디서부터 무너졌는지를 조금은 이해하게 된다.
그 길 끝엔, 어릴 적 함께 잠들던 마루, 아버지의 묘,
엄마가 남겨둔 손길의 흔적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
그녀의 마음도 다시 심을 수 있을까.
*** 이 글에 등장하는 인물, 학부모, 학생은 모두 허구의 인물이며, 실제 인물과는 어떠한 관련도 없습니다. 본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사건은 창작된 이야기로, 특정 개인이나 기관을 지칭하거나 묘사하는 의도가 없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