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크게 떠야 사람들이 만만하게 안 봐"
엄마 김순례 여사는 가끔 식구들에게 말하곤 했다.
“나는 여그 도시 와갖고 돈 벌었제.”
그건 허풍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엄마는 자식들을 모두 도시로 떠나보낸 후,
평생을 살아온 정든 고향을 뜨기로 결심했다.
그러고 보니 엄마는 결단하는 사람이었다.
문방구를 정리하고 떡방앗간을 하기로,
떡방앗간을 정리하고, 장터에 참기름 가게를 열기로,
시골집을 정리하고, 자식들 옆으로 오기로.
엄마의 인생에 무수히 많은 큰 결단이 있었다.
김순례 여사의 무엇이 그토록 결단하게 만들었을까?
그것은 오로지 자식, 자식!
자식이 배곯는 게 싫고, 무엇을 팔아서든 다 해주고 싶은 마음...
이제 막 상을 치른 과부에게 슬퍼할 겨를도 주지 않았던 힘이었겠지.
한때 함께 자란 고향 친구들은 누군가 광주로, 누군가는 목포로, 서울로 흩어졌다.
도시를 향한 동경, 막연한 꿈, "서울 가면 뭐든 될 것 같아서" 떠났던 시간들.
그 분투했던 시간들...
대한민국 땅 안의 격차는 거리로는 얼마 안 되지만 삶의 내용으로는 실로 아득했다.
엄마는 그 시절을 떠올리며 작은언니에게 늘 미안해했다.
”내가 그때 잘 못 했시야. 그것을 대학교에 보냈어야 쓴디.
딸이라고 상고를 보내갖고. 평생을 공부에 한이 맺혀 갖고는. 쯧쯧. “
작은 언니는 집에서 공부를 제일 잘했다.
연합고사를 1개 틀려 광주여상을 수석 입학했다. 하지만 상고 공부는 영 취미가 없었다.
언니는 졸업 후 대학에 미련이 남아 결국 몇 년 간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웠다.
방송대에서 조교를 하며 학사를 땄다. 언니에겐 행복한 대학 생활이었다.
언니는 중국어과를 다니며 통역을 할 정도로 중국어 실력이 수준급이었다.
언니의 과에 대한 열정은 방송대 졸업 후 통역대학원에 합격할 만큼 남달랐다.
비록 그놈의 돈 때문에 입학을 포기했지만.
”이번 직장은 내년까지만 할 거야. 중국인 관광 통역사가 되려구. “
언니는 지금도 중국어를 사용할 날을 기다리며, 중국어 자격증을 따고 있다.
살림밑천이라고 상고에 진학한 언니들은 대학이라는 꿈을 유예해야 했다.
지금, 고향은 낯설었고 도시는 복잡했다.
그러나 그 둘 사이에서 가족은 여전히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서울역에 처음 도착했던 큰언니의 얼굴에는, 두려움과 설렘이 교차했을 것이다.
가장 먼저 고향을 떠났던 큰언니.
하얗고 여성스러운 얼굴에 늘 웃음기가 떠 있었지만,
그 미소 안쪽에선 타향살이의 외로움이 자라고 있었으리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친척집에 얹혀살며
큰집 언니가 소개해준 출판사에서 첫 직장을 시작했던 언니.
사람들 눈엔 귀한 집 서울 아가씨처럼 보였지만,
그 시절 언니는 눈빛을 키우기 위해 거울 앞에서 연습도 했단다.
"눈을 크게 떠야 사람들이 만만하게 안 봐."
언젠가 언니가 웃으며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삼남은 안다. 그 말 뒤에 숨어있던 서러움과 견딤을.
큰언니는 가족 중 제일 예뻤다.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여리여리한 한 송이 백합처럼.
지하철을 타도, 동사무소에 가도 큰언니에게 반했다는 젊은 청년들이 졸졸졸 따라왔다
그 꽃같이 이쁘던 아가씨는 엄마보다도 목소리가 크고, 로봇같이 딱딱해졌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함부로 취급받지 않으려고, 백합은 흔들리는 들꽃이 되었다.
작은언니가 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로 올라오자, 드디어
두 사람은 함께 옥탑방을 구해 독립했다. 비좁고 눅눅한 방.
겨울엔 한없이 춥고, 여름엔 숨이 막히게 더운.
밤이면 변태가 창문을 두드리기도 했고,
한밤중 문을 억지로 열려던 누군가를 향해 작은언니가 "도둑이야!" 소리친 일도 있었다.
기적처럼 도망쳐간 그 발소리.
삼남은 지금도, 그게 아마 영암 서종에서 하늘로 쏘아 올린
엄마의 기도 덕분이었을 거라 믿는다.
그 옥탑방에서, 그 지하방에서, 살림밑천 딸들은 버텼다.
일했고, 아꼈고, 동생들을 생각했다.
건설사, 출판사, 지하철의 사람들 속에서의 시간을, 그들은 말없이 감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