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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 Sep 21. 2023

쉴 틈 없이 울리는 인터폰

도쿄 워홀일기 10 (2023/09/12)

오늘은 아침부터 바쁠예정이었기 때문에 저절로 눈이 8시에 떠졌다. 하지만 현실을 외면하고 싶어 떠진 눈을 억지로 다시 감고는 잠을 청해보려 했지만, 이미 깨진 정신에 다시 잠이 오지 않아 몇십 분을 뭉그적거리다 8시 50분에 일어났다. 원래는 첫날에 개통을 해야했던 도시가스를 그날 하지 못해 오늘로 다시 예약을 잡았었다. 하지만 정확한 시간은 모르고 단지 9-12시 사이에 온다는 것만 알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곧바로 씻으러 들어갔다. 씻고 나서도 불편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자 10시 반 정도에 초인종이 울렸다. 봤더니 도시가스직원이었다. 그래서 곧바로 문을 열어 처음으로 이 집에 사람을 들였다. 도시가스 직원은 거의 5분 만에 개통을 해주고는 몇 가지 설명을 하고 곧바로 돌아갔다. 말을 알아듣지 못할까 봐 조금 긴장을 했었는데, 생각보다 대화가 되어 다행이었다. 그가 돌아간 후에는 처음으로 이 집에서 느껴보는 온수에 얼른 따뜻한 물을 틀고는 샤워를 했다. 한참을 그렇게 따뜻한 물을 맞고 있다 개운한 상태로 나와서는 이것저것 워홀 관련 정보들을 찾아봤다.


워낙 찾아봐야 할 것들이 많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찾아보고 있는데, 다시 한번 인터폰이 울렸다. 확인해 보니 우체국이었다. 우체국에서 내게 무슨 볼일이 있어 왔느냐 하면 내가 바로 한국에서 보냈던 무려 8개의 박스를 전달해 주기 위해서 온 거였다. 일본 택배는 보통 본인이 수령을 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내가 없는 시간에 택배가 올까 봐 택배를 보낼 때 미리 박스 앞에 9/12일에 택배를 부탁드린다는 메모를 적어놨는데, 다행히 그 메모의 효과가 있었는지 오늘 택배가 온 것이다. 그런데, 인터폰 너머로 보이는 사람이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여서 난 이걸 보고 얼마나 아찔한 기분을 느꼈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 집은 엘리베이터도 없고 심지어 3층이기 때문에 과연 저 할아버지가 이 8개의 무거운 박스를 들고 올라올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의문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곧바로 문을 열고는 밑으로 내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엄청 힘들어하시는 모습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나도 두 팔을 걷고는 힘을 보탰다. 할아버지께서는 계단을 오르면서 계속해서 “よし(요시)“ 라며 본인에게 힘을 내셨는데, 그 모습이 조금 귀여우면서도 죄송스러웠다. 그렇게 둘이 힘을 합쳐 무사히 8개의 박스를 다 올리고 집 안으로 들어서자 이미 좁은 집은 박스들로 가득 찼다. 하나씩 박스를 뜯어 안의 내용물을 정리하자, 가뜩이나 좁은 집은 더욱이 물건들로 넘쳐났다. 어쩔 수 없는 극한의 맥시멈 라이프인 나는 이것저것 ‘필요할지도 몰라’를 남발하며 챙긴 덕분에 물건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 모습에 ‘조금 덜 챙길 걸 그랬나’라는 후회가 되었지만, 그래도 있으면 다 쓰긴 하기 때문에  일단 어떻게든 정리를 해나갔다.


일본 같은 경우에는 택배가 본인수령과 더불어 본인이 지정한 시간에는 꼭 집에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날짜만 알고 시간을 모르는 경우에는 오늘의 나처럼 집에만 콕 박혀있어야 하는데, 나는 그래도 다행히 오늘 나갈 일이 없어 괜찮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하루종일 택배만 오매불망 기다려야 한다. 맨날 열몇 개의 택배를 시켜놓고 맘 편히 기다리기만 하면 되던 한국의 택배 시스템에 익숙해지다 어떻게 보면 아날로그의 형식인 꼭 본인이 수령을 해야만 하는 조금은 고지식한 일본의 택배 시스템을 경험하자 조금은 불편하다고 느껴졌다. 그렇게 짐들을 정리하고 있자 어느덧 3시가 되었다. 오늘은 또 세탁기와 냉장고를 설치하는 날이었기 때문에 우리 집에 방문을 해야 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것 또한 설치 시간이 3-5시였던지라 정확히 언제 올지 몰라 계속 마음이 불편했다.


그렇게 한 시간을 더 있자 인터폰이 울렸다. 그 소리에 나는 잽싸게 일어나 세탁기를 설치하러 왔다는 것을 알면서도  ”どなたですか“(도나타 데스카)를 물었다. 그러자 당연히 일본어로 대답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인터폰 너머의 남자가 “안녕하세요 냉장고요”라며 너무나 자연스러운 한국말을 건네 나는 당황을 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한국말에 조금 뻘쭘해진 나는  “아.. 넵..!”이라며 대답을 하고는 곧바로 문을 열어주었다. 조금 있자 두 명의 남자가 계단으로 올라왔다. 한 명은 설치를 담당하는 일본사람이었고, 다른 한 명은 아까 내게 한국말을 건넸던 사람이었다. 역시나 그는 내 예상대로 한국인이었고, 통역의 역할도 담당하는 듯했다. 일본에 온 이후로 이렇게 길게 한국어를 사용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무언가 어색하면서도 감격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세탁기와 냉장고는 내 예상과는 달리 금방 설치가 끝났다. 그들은 십 여분의 설치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돌아갔다.


그렇게 하나하나 해결이 되어가자 슬슬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5시 정도에는 니토리에서 주문을 했던 택배가 왔다. 그것들을 다 받아 하나하나 조립을 해나가자 어느덧 저녁이 됐다. 어느 순간 급격한 배고픔을 느낀 나는 문득 내가 오늘 하루 택배를 기다리느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곧바로 열쇠와 돈을 들고는 밖으로 나갔다. 근처 5분 거리에 로슨편의점이 있어 그곳에 가서 바나나우유 하나와 푸딩 하나를 샀다. 봉지를 흔들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는데, 가는 길에 소방차 3대가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라며 사람들 속에서 함께 기웃거리다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와서는 일본에 도착한 지 일주일 만에 빨래를 했다. 밀린 빨래들을 하니 속이 다 시원했다. 그렇게 짐 정리가 어느 정도 일단락 되자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들은 내일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내일이 조금은 걱정이 된다. 하지만 어떻게든 이 또한 지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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