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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 Oct 31. 2024

화양연화

주절거림

‘왕가위 감독’ 영화 중 나는 ‘화양연화’를 가장 좋아한다. 넘을 듯 넘지 않는 그 아슬아슬한 남녀 간의 관계가 나의 입술을 바싹바싹 마르게 하고, 등줄기에 땀방울이 흐르게 하고, 영화를 보는 내내 단 한순간도 긴장을 놓을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은 많이 사라져 버린 예전의 빈티지한 홍콩만의 분위기를 느끼기에 왕가위 감독 영화만큼 좋은 영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 탓에 한껏 감성적이고 싶어지는 날, 남녀 간의 아슬아슬한 관계에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하며 푹 빠져들고 싶어지는 날, 이 영화를 찾아보게 된다. 영화를 보면 두 배우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며 그들의 세밀한 표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많은데, 화면을 가득 채우는 주인공들의 순간적인 감정과 표정들은 더욱 영화의 몰입감을 높여준다.


이 영화로 인해 ‘화양연화’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되었다. ‘화양연화’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이라는 의미인데, 그 뜻을 알고 나자 바로 이 네 글자가 2시간짜리 영화의 전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인공들에게 이 시절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인생에서 가장 위태롭고 매혹적이었으며, 가슴 아프고 뜨거웠던 순간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다시는 겪을 수 없다는 것이 그 시절을 더욱 찬란하게 만들어 준다. 이 탓에 내가 느끼는 나의 ’ 화양연화‘는 과연 언제일지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나이가 들어 나의 가장 찬란했던 순간을 나는 언제라고 기억할지 아직은 도달하지 않은 그날이 궁금해진다.


영화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바로 마지막 장면이다. 주인공 ’ 차우‘가 벽에 구멍을 뚫어 비밀을 속삭이는 장면은 무심코 넘어갈 수 있는 대사인 “옛날 사람들은 말 못 할 비밀이 있으면 산에 올라가 나무에 구멍을 파고는 자기 비밀을 속삭인 후 진흙으로 봉했대”라는 대사를 상기시킨다. ’ 리첸‘의 대한 ’ 차우‘의 마음과 앞으로 어떻게 내용이 흘러가게 될지 조심스레 예측할 수 있는, 앞으로를 암시하는 이 대사는 자칫하면 그냥 지나치기 쉽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은 우리에게 지나간 장면과 대사를 다시 한번 떠올리게 만든다.


처음 봤을 때, 이 장면과 대사가 이어지는 모습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던 기억이 있다. 아무도 모르게 비밀을 털어놓고 어딘가 후련해진 모습과 함께 씁쓸한 모습으로 혼자 걸어 나오는 ’ 차우‘의 모습은 아직도 내 머릿속에 비디오를 재생이라도 한 것처럼 선명하다. 그의 모습은 왠지 결연에 차 보이기도 하고, 외로워 보이기도 하고, 애절해 보이기도 하고, 한층 더 성숙해 보이기도 한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그녀이며 시절이기에 홀로 아무도 모를 진흙 속에 마음을 봉하고는 현실로 걸어 나오는 ‘차우’. 한 가지 감정으로는 단정 짓지 못할 그의 감정이 영화를 볼 때마다 내게도 전해지는 것 같다.


그래도 ’ 차우‘는 가끔씩 진흙 속에 묻은 그녀를 남몰래 꺼내볼 것이다. 그것은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본인의 가장 찬란하면서도 욕망적인 ‘화양연화’이기 때문이다,


“지나간 시절은 먼지 쌓인 유리창처럼 볼 수는 있지만 만질 수는 없기에 그는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유리창을 깰 수 있다면 그때로 돌아갈지 몰라도”  -화양연화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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